여장남자 시코쿠 랜덤 시선 4
황병승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부드럽고 딱딱한 토슈즈

 

 

나 아끼코는 그렇게 하는 것이 나쁘다, 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나빠요 싫은 행동이에요, 라고 말하는 순간

나 아끼코가 더 나쁜 사람이 되고 마는 건 왜일까

그렇다고 침묵을 하면 뭔가 달라질까

그래도 역시 나쁜 사람이 되고 만다

 

나 아끼코를 초(超)비참하게 만들지 않는 한

앞으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꼭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라고 타협을 할까 한다

 

저녁에는 극단(劇團)의 언니 오빠들과 함께 장어 멍게 해삼을 먹었다

그것들의 공통점은 물에서 산다는 것이지만

그것들이 얼마나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지는 모르겠다

서로 얼마나 궁합이 잘 맞는 음식인지도

나 아끼코는 모르겠다

 

장어 한 번 멍게 한 번 그리고 해삼...... 이렇게 순서대로 먹었다 계속해서

뭔가 석연치 않으면서도 나 아끼코는 한껏 온아한 표정으로

건배를 하고 뉴스를 보며 오물오물 수다를 떨었다

 

아끼코 상! 아끼코 상! 그렇게 하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그렇게 하는 것이다

다들 그렇게 한다는 것은 그것이 머리의 차가움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비옷을 입은 기자는

장마통에 집이 무너져 사람들이 깔려 죽었다고 전한다

나 아끼코에게 집이라는 건 빗소리를 듣기에 참 좋은 장소인데......

비 때문에 집이무너지고 사람들이 깔려 죽었다는 보도는

언제 들어도 즐거움과 초재미를 준다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

 

 

+)  황병승의 시에서는 분열적인 주체가 등장한다. 황병승의 시적 주체는 어린 아이와 어른의 경계, 남자와 여자의 경계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그의 시에서 아이와 어른, 혹은 남녀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은 의미가 없다. 때로는 여장남자이고, 또 자궁 달린 남자이기도 하며, 페니스 달린 여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의 시적 주체는 혼성적이다. 그러나 고정되거나 완전하지 않은 시적 주체, 남자이기도 하고 여자이기도 한 존재가 그의 시에 불안정한 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환멸을 동반함으로써 슬픔을 자아낸다.

모호해지는 것은 성 정체성뿐만이 아니다. 시코쿠의 세계에서 모든 것은 흔들리고, 이동하고, 전도된다. 죽은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되고, 북향이던 집이 남향이 되고, 진실은 거짓을 위해 봉사하며, 진짜는 내 얼굴이 아니라 뒤통수가 된다. 이곳은 남성과 여성이, 삶과 죽음이, 안과 바깥이, 앞과 뒤고, 진실과 거짓이, 현실과 환상이, 자꾸 자리를 바꾸는 세계이다. 당연하게도 이 세계의 이질 혼재는 성 정체성이라는 ‘소재’ 차원에 한정되지 않는 것이다. 황병승의 문체, 즉 한문, 한글, 영어, 이탤릭체, 전각 기호 등의 혼합된 사용은 분열적인 시적 주체와 접목되어 그의 시에 카오스적인 의미를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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