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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입이 없는 것들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275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6월
평점 :
75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한가
옅은 하늘빛 옥빛 바다의 몸을 내 눈길이 쓰다듬는데
어떻게 내 몸에서 작은 물결이 더 작은 물결을 깨우는가
어째서 아주 오래 살았는데 자꾸만 유치해지는가
펑퍼짐한 마당바위처럼 꿈쩍 않는 바다를 보며
나는 자꾸 욕하고 싶어진다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해만 가는가
이성복, 『아, 입이 없는 것들』中
+) 시인은 말한다. "지난 세월 씌어진 것들을 하나의 플롯으로" 엮어 "해묵은 강박관념"들을 만날 수 있었다고. 나는 반대로 말하고 싶다. 그 안에 갇혀 있는 관념들을 엮어 플롯으로 만들었다고.
125편이나 되는 시는 연작시적 구성을 취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우주적 구성으로 보았는데, 육체와 정신을 우주, 그러니까 자연의 테두리 안에 위치시키고 있다. 시인에게 해나 나무, 바다 등은 자연 그 자체라기 보다, 화자의 육체 혹은 정신과 맞닿은 연결고리가 되는 것이다.
"몸"에 흐르는 "피"는 인간의 육체이자, 우주적 존재인 자연의 일부를 표상하기도 하며, 물상이 아닌 정신(인간의 내면 심리 및 가치)이기도 하다. 이는 앞서 언급한대로 육체와 정신을 자연이라는 원형상에 두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묘사들로 증명된다.
125편의 시에 숫자와 제목이 붙어있다. 그것은 마치 대화형식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자신과 타인과의 대화라기 보다, 자기 스스로 자신과 나누는 대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면을 발견하기 위해 애쓰는 태도가 아니라, 이미 내면을 들여다보며 그것을 바탕으로 타인을 짐작해보는 것이다. 그의 눈에 비친 자연의 변화들은 그런 내면 심리를 조망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치밀한 묘사 뒤에 깔린 비교적 가벼운 깨달음들이었다. 물론 시가 반드시 교훈적일 필요는 없지만, 마치 일기장의 글귀들처럼 느껴지는 시구절들은 시를 깊이 있게 끌어당기지 못한다. 그러나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는 구절들은 분명히 있다("소금쟁이 / 떠 있는 수면의 안간힘으로 / 너를 견뎠다, 피붙이여")
전체적으로 시의 음수율과 음보율이 고른 편이라, 읽기에 쉬운 편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시인이 의도한 것인지도 모르나, 짧은 시편들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읽는데 멈추지 않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