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 랜덤 시선 1
최하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눈발이 날리다 말고

 

 

눈발이 날리다 말고 바람이 일어난다

 

마른풀들이 달린다 산 아래로 나는 빠져나간다

 

길 위에는 네가 남긴 시간들과 너를 여읜 통증이

 

뻗쳐 있다 나는 다리 건너 서울상회를 지나 삼거리로

 

가지만 집들은 꼭꼭 대문이 잠겨 있고 개들도 짖지

 

않는다 개들은 좀처럼 짖거나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나는 정배리 쪽으로 간다 언덕 위 나무들은 숨죽인

 

소리를 하고 나는 무엇 때문에 숨을 죽이고 있는지 그럴 이유라도 있는 것인지

 

묻지 않는다 아직도 해는 공중에 떠 있고

 

그림자들은 흔들리고 나는 사랑이 없는 길 위에

 

서성이고 있다 시간이 서성이고 있다

 

 

최하림,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中

 

 

+) 이 시집에서 '시간'은 포착되는 순간 풍경 속으로 녹아들어 간다. 풍경이 시집 전체를 지배하고 있지만, 그건 단순한 묘사가 아니다. 그 속에는 '시간'과 '언어'가 숨어 있다. 시인이 언급하는 시간은 과거를 비롯하여, 현재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있다.("시간들이 날아간다 나는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 오늘은 어린 시절의 일들까지도 송구스럽고 길 떠난 // 사람들이 걱정스럽다"[공중으로 너풀너풀 날아간다])

 

시간은 개인적인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화자의 기억 속에서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시간은 "우리"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움직임은 역동적이라거나 활동적인 것은 아니지만, 한 걸음씩 나아가기 시작하는 차분한 일렁임 같은 것이다. 마치 잔잔한 파도가 천천히 일렁이기 시작하 듯 말이다.("시간들은 거기 그렇게 돌과 같이 // 나둥그러져 있을 뿐..... 시간의 배후에서는 밤이 일어나고"[십일월이 지나는 산굽이에서])

 

혼자만의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시간일 수 있는 것은 "매일같이 우리가 보고 마시던 시간들"[K와 함께]이기 때문이다. "너"와 "나"를 이어주고 있는 것은 그들이 함께 보낸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서는 그것이 풍경 속으로 스며들면서 장면 장면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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