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그건 저도 압니다. 제가 사려는 선풍기는 대개 아무도 팔겠다고 말하지 않는 선풍기죠. 파는 사람이 없더라도 저는 사려고 합니다. 말하자면 저는 그냥 외로운 구입을 하겠다는 얘기입니다."                                                     「공야장 도서관 음모 사건

 

그가 댄 핑계의 목록을 만들어 살펴봤다. 선약이 있어서 내지는 몸이 피곤해서나 지금 나가고 없는데요 같은 것들. 사람을 가장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지금 나가고 없는데요라고 자기가 거짓말을 할때다. 자신이 자신의 부재를 알린다는 것. 재미없는 일이다.

                                                        「마지막 롤러코스터


어떻게 보면 사진은 가장 현실적인 예술이다. 항상 흐르는 시간의 가장 마지막 순간을 찍을 뿐이며 사진기가 놓인 그 공간에서 단 한발짝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진 속의 시간과 공간은 결코 혼재할 수 없다. 사진의 매력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시간과 공간이 대체할 수 없는 단 한 번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여진다.

                                                       「뒈져버린 도플갱어

 

열심히 무슨 일을 하든, 아무 일도 하지 않든 스무 살은 곧 지나간다. 스무 살의 하늘과 스무 살의 바람과 스무 살의 눈빛은 우리를 세월 속으로 밀어넣고 저희들끼리만 저만치 등뒤에 남게 되는 것이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보다도 더 빨리 우리의 기억 속에서 마르는 스무 살이 지나가고 나면, 스물한 살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

                                                                         「스무 살

 

 

김연수,『스무 살』

 

 

+) "흐르는 시간의 가장 마지막 순간"을 잡아내는 것이 사진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던가. 솔직히 사진은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작업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순간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저 짧은 한 문장을 통해서, 그 '순간'도 처음과 마지막이 있음을 알았다.

 

독서를 하면서 버리지 못한 습관 중의 하나가, 도서관을 거닐다 우연히 제목이 끌리면 책을 집어드는 습관이다. 그날도 책 몇권을 뒤적거리다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이 책을 들고왔다. 이 습관의 장점은 우연치않게 값진 작가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고, 단점은 꼭 책을 다 읽는 버릇때문에 고역을 치를 때가 있다는 것이다. 솔직히 이 책은 그닥 재미있는 소설은 아니었다. 고역까지는 아니래도 지루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의 시선은 '현실과 그 너머', '글과 글 사이'에 위치한다. 무엇보다 다양한 독서와 그림에 대한 관심이 묻어나는 글편들을 발견할 수 있다. 단편들을 쓰면서 소제목을 적어가며 소설을 전개하는 그의 글쓰기 방식이,글을 이끄는 힘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곧 그가 정리하는데 익숙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짐작을 가졌다.

 

그러한 점은 내용에서도 묻어난다. 그는 삶에서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시간과 죽음의 문제를 교묘히 엮고 있는 그의 글을 보면서, 과연 그가 그 가운데 서 있는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졌다. 그의 글쓰기 방식처럼 시간과 죽음의 문제를 정리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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