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회 - 나우주 소설집
나우주 지음 / 북티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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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건 엄마 뿐이었다. 다들 가면을 쓰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시치미'라는 가면을, 아버지는 '망각'이란 가면을, 어쩌면 엄마도 '태연함'이란 가면을 쓰고 있는지 몰랐다. 동생은 어땠을까. 모르겠다. 나는 가면을 잘 못 골랐다. '무심함'을 쓰기엔 뻔뻔해질 수가 없었고, '태연함'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당당함'을 썼다. 무참함에서 당당함까지의 괴리는 컸다.

p.33. [코쿤룸]

"뭐가 만날 다 괜찮아 엄마는. 왜, 왜 다 괜찮은 거냐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다 기억하면서. 엄마에게 처음 다락방으로 숨으라고 그 안으로 밀어 넣은게 나였다는 걸. 안 들어가겠단 엄마를 숨겨 준 것도 고자질한 것도 나였다는 걸.

"다 기억하면서. 다, 다 기억하잖아!"

엄마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버릇처럼 손사래를 친다.

"넌 뭘 그렇게 심각하게 사냐. 너처럼 기억력 좋았으면 난 벌써 죽었다."

p.40 [코쿤룸]

"꿈마저 잃은 루저로 살라는 거니? 글쎄다. 나도 처자식이 생기면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그저 하루에 하나씩, 하루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에 취하고, 하루는 게임 속 캐릭터에 취하고, 하루는 도서관에서 책 속에 파묻히고, 그렇게 살고 싶다."

"그럼 도태되잖아."

"그러면 왜 안 되는데?"

왜 안 되냐고? 그러면 현상 유지가 안 되니까. 죽도록 노력해도 쉽지 않은 세상이니까.

p.76 [집구석 환경 조사서]

나우주, <안락사회> 中

+) 이 책은 등단 후 오랜만에 첫 책을 발간하는 저자의 단편소설집이다. 총 7편의 작품이 실려있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무겁고 어두운 색감이라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신랄한 현실을 담고 있기에 더 그렇지 않나 싶다. 장면을 리얼하게 그려냄으로써 자본주의 현실의 이면을 비판하는 작가의 시선은 명확히 드러난 듯 하다.

[코쿤룸]에는 알코올중독의 아버지가 엄마를 학대하고, 그런 부모를 지켜보는 아이들의 심리와 성장 후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버지가 엄마를 학대할 때, 그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순간을 모르는 척 하는 사람들에 의해 주인공은 더 큰 수치스러움을 느낀다.

그러면서 주인공에게 집이란 혼자만의 공간이면서 관계의 불필요함을 이어갈 필요가 없는 공간으로 형성된다. 즉, 어른이 된 주인공에게 집은 더이상 가족의 문제를 안고사는 공간이 아닌, 수치스러움 따위 끌어들일 필요가 없는 그런 곳이 된다.

그렇게 주인공은 오프라인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보다 온라인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더 편한 사람이 된다. 심지어 자신의 원룸에 숨어있는 엄마가 불편해서 아버지에게 데려가라고 연락을 할 정도니까. 그 불편함은 심리적 고통에서 발산된다.

주인공이 겪는 수치스러움은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보다, 스스로의 눈에 비친 자신이 더 견딜 수 없어서 생기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적나라한 그 감정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이 소설 외에도 소외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을 감싸주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을 드러낸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초등학생의 진로희망란에 정규직이라고 써내는 부모의 입장을 헤아려보며, 정규직이 자기 가족에게도 얼마나 아프게 숭고한 표현인지 돌아보는 선생님의 이야기 [집구석 환경 조사서], 아빠가 사라진 상황에서 엄마가 관심갖는 하숙집 남자에게 고백하며 엄마의 입장도 아빠의 입장도 자식의 입장도 모두 감당해보는 딸의 이야기 [클리타임네스트라],

폭력적인 아버지와 무기력한 엄마, 장애인 오빠 사이에서 분노와 두려움의 감정을 쌓은 여자 이야기 [기억의 제단], 허세에 찌든 공인중개보조인 남자의 추락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낯낯을 드러낸 이야기 [아름다운 나의 도시], 아버지의 명예퇴직 후 초라한 모습이 취직도 못한 자기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아들의 이야기 [조용한 시장],

개 농장에서 길러지거나 유기견들이 안락사 직전에 겪게 되는 사람에 대한 믿음과 배신 이야기 [안락사회], 번아웃 증후군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각기 나름의 사연과 병명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 [봄의 시] 등등이 그것이다.

한 권을 다 읽고 리얼한 현실에 씁쓸한 마음이 들었고, 누군가는 바라보고 관심가져야 할 부분을 저자가 묘사했다는 점에 공감했다. 안락사회에서 안락하지 못한 이들과, 누군가에게는 전혀 안락하지 않은 안락사회의 모습. 즉, 안락사회는 어찌 보면 중의적이고, 또 어찌보면 반어적 표현이 될 수 있지 않나 싶다.

* 이 서평은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읽고 제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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