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세계사 시인선 65
박상순 지음 / 세계사 / 1996년 5월
평점 :
품절


지난밤 한 남자가 말했다

 

 

지난밤, 한 남자가 말했습니다ㅡ이제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지난밤, 술 취한 배들이 하늘을 날고, 술 취한 구름이 하늘을 덮고, 풀들의 뿌리는 어둠의 깊이를 미처 알지 못한 채 땅을 향해 거꾸로 솟아올랐습니다.

 

지난밤, 한 남자가 말했습니다ㅡ이제 하늘이 터질 것 같아. 큰 가방을 마련해, 큰 가방. 내 눈물을 거두고, 술 취한 배들, 술 취한 구름, 거꾸로 솟아오른 풀들의 뿌리를 거두어야 해.

 

지난밤, 한 남자의 머리 위헤서 하늘이 터져버렸습니다ㅡ술 취한 배들, 술 취한 구름, 거꾸로 선 풀들의 뿌리, 가방집의 가방들도 모조리 터져버렸습니다

 

지난밤,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터진 하늘과 긴 강물이 그의 곁에 숨죽여 앉아 있었습니다.

 

지난밤, 한 남자가 가방집 지붕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ㅡ꿈 속의 내 가방은 작은 뿌리, 내 가방은 취한 배, 내 가방은 술 취한 구름, 내 가방은 기나긴 강물, 그리고 내 가방은 거대한 눈물.

 

  만져 봐, 만져 봐.

 

지난밤, 한 남자가 세계의 끝에서 말했습니다. 만져 봐. 터진 하늘 아래 피는 봄, 터진 가방 아래 흐르는 거대한 강물, 꽃봄처럼 터져나온 내 심장이 너의 손을 잡는 꿈.

 

박상순,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中

 

 

+) 박상순의 시를 읽을 때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는 것 이상을 상상하는 것이 편하다.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꼭 보이는 것만큼만 상상해야 한다는 점이다. 자칫 지나치게 부풀려서 상상할 경우, 그의 의도와는 다른 전혀 엉뚱한 곳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있었다", "말했다", "갔다", "않았다" 등 이 시집에 쓰이고 있는 과거형의 어투는 '과거'라는 시간과, '경험'이라는 주체의 행동이 결합되어 강조된다. 게다가 그것은 과거에서 단절되지 않고 계속 현재로 이어지고 있다.("나는 / 언덕 아래로 끝없이 // 굴러가고 있었다"[불 꺼진 창]) 이는 경험한 것들이 현재에 반사되어 그 잔향이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시어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상징을 내포한다. 앞서 언급한 경험의 잔향이 그 개인적인 상징성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있다. 그것이 기호를 시어로 선택한 시의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닐까. 기호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시인이 그 순간 가장 편리한 것으로 선택한 것 뿐이다.([도넛을 만드는 A, ,B, C])

 

이 시집에서 '나'는 마치 청년의 한 사람으로 느껴진다. 방황의 길 위에서 내성적인 자아의 독백처럼 들리는 시편이 보이며,("네가 네 청춘을 밟고 오는 소리가 들리는구나.[너 혼자]) 그 길 위의 동반자적 존재와의 관계에 고민하는 시편도 보인다.("마라나;없음 / 나;없음 // 꽃길;없음 / 나;없음"[마라나;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4])

 

그의 시는 불투명성을 갖고 있다. 내면을 보여주지 않고 표면상 언어로 주제를 짐작하게 하는데, 어쩌면 이게 그의 시적 매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불투명성이 그의 시를 난해한 것으로 만들수도 있다. 난해하지 않기 위해서 그는 불투명함의 끝에 거울을 만드는 재주가 필요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