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 랜덤 시선 8
최치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연못

 

 

연못에는 내가 들어가지 못한 숲이 있다

물푸레나무의 젖은 머릿결 속으로 은빛 잉어 한 마리 길을 간다

하늘과 새와 이름 모를 꽃들이 툭 툭 잉어의 지느러미에 깨어난다

비로소 세계가 몸을 튼다 틀어진 길의 끝에서

바람이 분다 숲이 숲으로 겹쳐진다

수면의 주름이 연못의 시간을 밀고 내 발끝까지 찰랑댄다

감당할 수 없는 주름의 시간이여 나에게도 삶은

이렇게 밀려왔었다, 밀려간다

온몸으로 우는 것은 누군가 내 속에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풍금처럼 가볍게 밟아도 일어서고 쓰러지는 것은

또렷하게 아픈 것이다 연못엔

내가 들어가지 못한 숲이 있다 그곳엔 은빛 잉어 한 마리

푸르고 깊은 상처를 내며 길을 간다

비로소 세상이 몸을 튼다

언젠가 숲에 들지 못한 날들이 단단한 돌멩이 되어

연못 속으로 던져진다

간절한 것들이 그리운 것들로 되기까지

나는 연못 위를 서성였다

 

최치언,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中

 

+) 그의 시집 처음 몇 편을 읽고서 한 30대 후반쯤, 인생의 굴곡을 겪고 있는 남자일꺼라 생각했다. 그건 "미상 밟는 아내"와 "올림푸스 세탁소"를 운영하는 "주인장"을 발견하는 시선때문이었다. 아주 단순하게도 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그가 보는 것을 같이 바라보며 그를 찾아내려고 애썼다.

 

머리말에서 그가 언급한대로 "생을 뜨겁게 달구는 불"은 그의 시 곳곳에서 묻어난다. 그 '생'을 선택한 것도 시인의 마음이겠지만, 생에 잠재된 '불'을 선택한 것도 시인의 판단이다. "여자", "남자", "노인", "아이(유아)", "그", "나," "당신" 등이 바로 그가 선택한 생의 주인공들이다.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그의 시에는 특별한 사람보다 일반적인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가 고민했을 "불" 또한 마찬가지다. 특별한 것 같지만 사실 일반화시켜서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말","비명소리", "새", "시선", "꽃" 등으로 시인은 사람들의 삶을 조명한다. 그것들은 인생의 어떤 해결책이나 고민 혹은 고통의 장면이라기 보다, 인생을 그대로 드러내는 매개체다. 물론 "새"를 통해 자유를 갈망하는 화자의 욕망을 묘사하고, 타인과의 소통을 희구하는 "시선"을 형상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인이 연결하는 '생'과 그 생을 뜨겁게 달구는 '불'이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감정을 절제하며 바라보는 그 '생'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가 풍자와 비판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와 "노인"을 좇고 있는 그의 시선이 멈추지 않고 치밀하게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에서 사람에 대한 애정을 포착할 수 있다.

 

최치언은 언어유희를 즐기는 편인데 ("나는 불 안에서 불안에 떨고 있었지"[화장터]) 시를 읽을수록 감질맛난다. 그 언어유희가 시에서 한 문장으로서 혹은 시어와 시어를 복잡하게 이어주고 있는데, 그것은 생의 면모를 그려내는 것 같다.([도망가라 메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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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inpix 2007-07-10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집 읽었었는데, 이 리뷰를 읽으니 다시 읽어봐야겠네요.^^

우비소녀 2007-07-10 15:34   좋아요 0 | URL
^^ 그런가요? 그런데 아마 저도 시간이 지나서 다시 보면 또 새롭게 보일 것 같아요. 시란 그런게 멋지잖아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