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취인 불명
캐스린 크레스만 테일러 지음, 정영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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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 모두는 똑같은 상황에 봉착해 있습니다. 다른 헛되고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승리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로 우리는 헛된 삶을 살고 있고 솔직하지 못해요.

                                                                                    p.47

 

 

자유주의자는 무언가 행동하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죠. 그들은 인간의 권리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지만 그냥 말만 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들은 표현의 자유에 대해 떠들어대기를 좋아하죠. 그런데 표현의 자유라는게 무엇입니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적극적인 사람들이 하는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일 뿐 아닌가요? 자유주의자만큼 쓸모없는 것이 뭐가 있을까요. 한때 자유주의자였던 나는 자유주의자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며 수동적인 정부를 비난하죠. 하지만 강력한 사람이 떨쳐 일어나고, 적극적인 사람이 변화를 만들기 시작할 때 당신의 자유주의는 어디 있는 겁니까? 자유주의자는 변화에 반대합니다. 자유주의자에게는 모든 변화가 잘못된 것이죠.

                                                                                  p.96

 

 

캐스린 크레스만 테일러,『수취인 불명』中

 

 

+) 나치 지배 하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이 소설은 미국에서 함께 우정을 쌓았던 '막스'와 '마틴'의 서신으로 엮어 전개된다. 독일로 돌아간 마틴에게, 변치 않을 우정을 맹세하며 시작되는 편지는 나치가 지배하게 되면서 긴장감이 들끓는 내용으로 변화한다.

 

한 사람의 사고 혹은 가치관이 변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작이 어려울 뿐 한번 변화의 물꼬를 트면 엄청난 속도로 달라진다. 그건 사고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이끌어 간다. 달라지는 세계 속에서 더불어 변해가는 마틴에 대해, 막스는 끝없이 그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며 걱정하지만 마틴은 막스를 "케케묵은 감상주의"자로 몰아갈 뿐이다. 그에게 현실은 어느새 "적극적인 행동주의"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의 목표와 가치관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을 선택하는 것은 자신이지만, 그것을 다른 색깔로 만들어버리는 것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회이다. 이미 마틴에게 독일은 적극적인 승리자들이며, 막스는 수동적인 안일주의자이다. 대체 현실에 안주한다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수취인 불명", 이 소설에서는 그것만큼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말이 없다. 절친한 관계를 유지한 독일인과 유태인. 그들 사이에서 "수취인 불명"은 이미 '단절'의 표상이 되었다. 그것은 믿음의 단절이자 현실의 끝이다. 종족과 종족의 갈등, 국가와 국가의 전쟁,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오해 등을 서신을 통해 보여주는 이 책은 꽤 적나라하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지만, 모든 관계의 단절을 던져주며, 믿음의 파괴를 제시한다. 물론 그 바탕에는 나치 하에 주입식 교육으로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있다.

 

편지 한 장이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었던 상황, 그게 나치가 지배하던 현실이었다. 유태인과의 인사 한 마디로 온 가족이 파멸에 이를수도 있는 것. 이 소설은 짧지만 그 모든 것을 순식간에 보여준다. 마치 실화처럼 생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편지의 형식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때가 바로 이런 순간이다. 서술자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 하지만 아무렇게나 중얼거리는 것이 아니다. 작가의 생각이 녹아나는 표현들이 요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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