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술 -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무튼 시리즈 20
김혼비 지음 / 제철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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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어떤 대상을 말도 안 되게 좋아하면 그 마음이 감당이 잘 안 돼서 살짝 딴청을 피우는, 그리 좋다고는 하지 못할 습관이 이다. 말도 안 되게 좋아하다 보면 지나치게 진지해지고 끈적해지는 마음이 겸연쩍어 애써 별것 아닌 척한다.

말도 안 되게 좋아하는 걸 말이 되게 해보려고 이런저런 갖다 붙일 이유들을 뒤적이기도 한다. 그래서 술을 좋아하는 것 같다. 술은 나를 좀 더 단순하고 정직하게 만든다. 딴청 피우지 않게, 별것 아닌 척하지 않게, 말이 안 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채로 받아들이고 들이밀 수 있게.

p.12

매번 아주 즐겁게 마셨다. 간을 빼놓고 온 토끼처럼 우울함만 쏙 빼놓고 모든 술자리에 임했다. 그 누구에게도 나의 상태에 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건 손에 잡히는 이유가 없어서만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붙잡고 울며불며 고통을 호소하는 건 너무 뻔해 보였다. 안 그래도 비참한데 뻔하기까지 한 건 싫었다. 그냥 그때는 이렇게 힘들어도 티내지 않는 것이, 이렇게 힘들어도 누구에게 기대지 않고 혼자서 꿋꿋하게 '어른다운 방식'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그 기분이, 세상에게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어렸다. 매우 어렸다.

p.53

게다가 '마시더라도'에 해당하는 상황이 지나치게 세분화되었다는 점에서 결국 마시게 될 거라는 패배주의가 짙게 깔려 있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가급적'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편리한 말인지 '하지 말라'는 말을 꾸며주는 척하지만 슬그머니 '해도 된다'의 편도 들어주니 말이다. 어쨌든 규칙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좋을 것이다.

p.107

술이란 건 참 시도 때도 없이 시제에 얽매이지 않고 마시고 싶다는 점에서나, 마시기 전부터 이미 마시고 난 이후의 미래가 빤히 보인다는 점에서나, 일단 마시기 시작하면 앞일 뒷일 따위 생각 안 하는 비선형적 사고를 한다는 점에서 너무나 헵타포드어 같지 않은가.

p.110

술꾼으로서 질색하는 것은 술 또는 술 마시는 방식을 강권하는 모든 종류의 행위다. 위계나 관행 때문에 '원치 않는' 푹탄주를 마셔야 한다거나 '원샷'을 강요받는 술자리에는 절대 가지 않는다. 평소 좋아하던 술이라도 강요가 섞이는 순간 술은 변질되어버린다.

p.195

김혼비, <아무튼, 술> 中

+) 이 책은 '아무튼' 시리즈의 하나로 '술'에 대한 단상을 담고 있다. 술을 좋아하는 저자의 술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 술을 마시는 마음가짐, 술마시는 사람들과의 인연, 그냥 먹던 식사도 종류에 따라 안주가 되며 술이 첨가되는 과정, 주사 혹은 숙취의 다양한 모습들, 술을 줄이려는 노력, 술의 종류와 혼술 혹은 밖술 등의 술자리 탐색 과정 등을 유쾌하게 풀어냈다.

읽으면서 몇 번이나 웃었는지 모른다. 때로는 진지하고, 때로는 유쾌하다. 그래서 가끔씩 웃었고, 또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수 있었던 책이다. 술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면서 미소지을 수 있는 책이다. 또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이 보면, 술 마시는 사람들 중 어떤 이는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하고 접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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