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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유서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손화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8월
평점 :
나는 이 세상 전부를 빌려 살아왔다. 이제 그 빚을 갚아야 한다. 할부는 생각할 수도 없다. 단번에 모든 것을 갚아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도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
이제 나는 지나온 삶에 감사하며 빚을 갚아야 할 때가 왔다.
삶에는 행복한 순간들이 간간히 자리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단 한 순간도 존재 그 자체에 멈춰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단 한 순간도 존재적인 순간은 없었다. 모든 것들은 항상 존재의 성립 과정 중에 있는 셈이었다. 세상에 정적이고 영원한 것이 없다는 말은 진리일지도 모른다.
p.161
친애하는 알버트, 이런 상황이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고립하기 마련이지. 우리끼리는 흔히 지하실로 내려간다고도 해. 오늘 저녁, 내 전화를 받지 않는 당신 마음을 충분히 이해해.
p.174
그렇다면 나의 존재와 세상과의 조화는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어쩌면 이것은 머지않은 날 의미 있는 질문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스스로 세상을 벗어날 수는 없지 않은가? 내겐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셈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홀로 고립된 존재가 아니다. 나의 존재적 정체성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의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p.210
오직 내게 남은 시간이 필요 이상으로 길지도 짧지도 않기만을 바란다. 어쩌면 그 시간은 딱 적당할지도 모른다.
p.225
요슈타인 가아더, <밤의 유서> 中
+) 이 소설 속 주인공 알버트는 불치병에 걸려서 살 날이 몇 개월 남지 않은 사람이다. 어느 날 갑자기 옛 연인이었던 의사에게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것이다. 그날 밤 알버트는 가족과의 추억이 존재하는 오두막집으로 찾아가 혼자서 방명록에 유서를 쓰기 시작한다.
이때만해도 그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몸이 굳어서, 결국 나중에는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살아야하는 인생을 스스로 끝내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든 것이다. 그래서 오두막 바로 앞 호수에 스스로 걸어들어가기로 다짐하고 유서를 쓴다.
이 소설에서는 그가 내린 선택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유서를 쓰며 그가 겪고 있는 혼란, 당황스러움, 분노, 수많은 생각들에 공감하며 나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점이 의미가 있다. 불치병으로 살 날이 얼마남지 않은 상태에서, 죽기 직전에 내 주변의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개인의 위치를 가족과 공동체 그리고 대륙과의 관계로 곳곳에서 그려낸다. 물론 그 과정에서 개인으로서 홀로 선택하고 고민하며 힘들어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의 입장에 공감하며 같이 고민하도록 만든다.
알버트 개인으로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의 선택이 문제겠지만, 가족 입장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스러운 죽음과 그가 내린 선택(이를테면 그가 호수에서 자살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가 문제일 것이다. 저자는 알버트의 입장에서 그 모두를 잘 담아냈다.
소설의 절정과 결말 부분에서 저자가 반전 아닌 반전처럼 제시한 스토리 전개는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소설을 다 읽고나니 그래서 초반부에 그랬구나 싶게 이해가 되니, 구조를 잘 짠 작품이지 않나 싶다.
내가 죽었을 때 남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해 한번쯤 생각하게 만든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