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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린생활자
배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7월
평점 :
"여기 무서운데 편했어요. 잠도 잘 오고. 이런 말하면 웃기지만 그동안 프레파라트 위에 놓인 거 같았어요. 아슬아슬하면서도 누군가에게 낱낱이 다 파헤쳐져버리는 기분. 차라리 여기가 더 좋네요. 사방 꽉 막힌 곳에서 나 홀로 이렇게 있다가, 아무도 모르게 서서히 죽어갈 수도 있는. 그러니 서두르지 않으셔도 돼요."
21% [근린생활자]
그러고 보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었다. 그것을 위해 어떤 방법을 취하든, 어느 편에 붙든 비난받을 일은 아니었다. 순병 씨가 인생을 통해 깨달은 진리라면 그것 하나였다. 먹고살기 위해 열심히 살았고 누구보다 악착같이 일했다.
39% [소원은 통일]
그에게 중요한 건 오늘이었다. 지금 닥친 일을 어떡하든 해치우자는 생각뿐이었다. 하루하루가 벅차고 힘들었기에 그렇기도 했지만 그러는 편이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48%
"큰 죄를 덮기 위해선 작은 죄를 곁에 둬라."
아버지는 어린 그를 가르쳤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세상사는 그렇게 돌아갔다.
50% [그것]
사소한 것이라도 원하는 무언가가 성취된 적이 없는 그였다. 다른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으니 비교할 생(生)도 없었다. '그래야 해서'가 아니라 '그래야 하는'줄 알고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왔듯' 침묵하고 운명을 탓해야 했다.
63% [삿갓조개]
모든 걸 잃게 한 도벽이 지금의 날 밥 먹게 했다.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미자 언니도 그랬다. 너무 가난해서 몸을 팔았는데 그러다 보니 더 가난해졌다. 그 때문에 병에 걸렸고 아기는 낳자마자 죽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을 가난과 불행에 빠트리게 한, 몸 파는 짓으로 지금 밥 먹고 산다. 인생의 덜미가 잡힌 것이 나머지 인생을 살게 한다는 게 미자 언니와 나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77% [사마리아 여인들]
배지영, <근린생활자> 中
+) 이 책은 정규직의 삶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의 삶을 담고 있다. 여기 실린 여섯 개의 단편 소설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정해진 날짜에 꼬박꼬박 월급을 받고, 사대보험 보장이 되는 그런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인물들이다. 비정규직, 일용직, 단기직 등등의 표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또 불법인 줄 알면서도 타인에게 크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걸 본업으로 알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도 등장한다.
이건 마치 70, 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무언가 늘 부족하고 상처받으며 살게 되는 삶. 과거나 미래를 생각할 여력조차 없는 삶. 그나마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라도 밀려나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애쓰며 사는 삶. 이 소설집에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작가의 문장들이 마음에 들었던 소설이었다. 신문 기사 사회면에서 본 듯한 이야기들을 소재로 삼아서 한 편 한 편 구성을 하고 일관되게 써내려간 느낌이다. 모처럼 흥미롭게, 안타깝게, 그러나 공감하면서 읽은 소설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