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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지음 / 열림원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내가 처음 당선 소식을 들은 날, 내 어머니가 전화를 받은 장소가 떠오른다. 노래방, 내 어미도 가는 곳. 한 번의 농담과 또 한 번의 농담, 그다음 번의 농담으로 삶의 품위를 지키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쁜 소식이 어머니를 짓누를 때, 내 어머니가 놀러 가지 않고 살러 간 곳. 그러나 가끔은 정말 순전히 놀러만 가기도 하는 곳.
16%
작가들은 그 말 주위를 부지런히 싸돌아다닌다. 삶이 가진 진부함의 잔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면서.그러다 가끔은 말들의 뒤뚱거림 속에서 또 새로운 박자를 발견해가면서 말이다.
31%
아는 이야기를 다 쓰면 그다음엔 어떤 글을 지어야 하나 근심한 적이 있다. 바보같이 몸도 글도 한결같을 거라 생각하던 때의 일이다. 단어 하나가 몸을 완전히 통과한 후에는 그 전과 전혀 다른 뜻이 된다는 걸 몰랐다.
39%
여름이 끝날 무렵, 나는 그곳에서 '당신은 왜 글을 쓰는가'란 질문과 다시 만나보기로 했다. 누군가 우리에게 삶이, 인생이, 역사가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는데 굳이 왜 그런 수고를 하느냐 묻는다 해도 할 수 없었다.
68%
-한 조각 꽃잎이 져도 봄빛이 깎이나니.
'두보', [곡강]
80%
"저를 가장 절망하게 만든 건, 더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었어요."
86%
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 中
+) 김애란의 소설을 감탄하며 읽은 적이 있다. 그때도 어쩜 이렇게 글을 잘쓸까 싶었는데. 이 책은 내가 최근 읽은 에세이집 중에 단연 최고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단연 최고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탐나는 문장' 때문이다. 이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말을 어떻게 하는 사람일까 궁금해졌다. 글만큼이나 말을 잘할까.
에세이집은 사실 읽기에 편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술술 넘어가기에 읽는 속도도 빠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책을 집어들고 나는 꽤 오래도록 읽었다.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어야 할만큼 탐나는 문장들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세밀한 관찰과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는 풍부한 어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논리적인 문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탄이 나오는 세밀한 감정 표현.
이 책을 읽으면서 중얼거렸다. 아, 나같은 사람은 글쓰기를 해서는 안되겠구나. 내가 이렇게 느낀 것은 나 자신에 대한 좌절이나 실망이 아니라, 저자의 필력에 대한 부러움과 부러움과 부러움 때문이다. 타고난 부분도 있겠지만 이렇게 일관된 문장력을 가지고 있는 걸 보니 글쓰기가 엉덩이의 힘이라는 말이 맞나보다 싶다. 얼마나 많이 써보았을까.
이 책은 저자가 생각하고 기억하고 싶은 '이름' 혹은 '말', '타인' 등에 차분히 기록한 산문집이다. 어떤 맥락으로 분류하기 보다 저자가 꾸준히 적은 에세이라고 해두면 좋을 것 같다. 읽는 내내 설레는 문장들이 많았다. 모처럼 탄탄한 문장들을 읽어서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