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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 우치다 다쓰루의 혼을 담는 글쓰기 강의
우치다 다쓰루 지음, 김경원 옮김 / 원더박스 / 2018년 2월
평점 :
설명을 잘하는 작가들의 공통점은 먼 곳에서 거시적으로 조감하듯 내려다보는가 싶으면, 갑자기 미시적으로 현미경적인 거리까지 카메라의 눈을 들이대는 등 초점 거리의 줌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점입니다.
21%
소쉬르는 인간이 언어를 다룰 때 스스로 생각한 것보다 무의식적으로 훨씬 더 많은 작업을 해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애너그램은 우리가 생각하는 차원의 수사나 기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훨씬 자연적인 것, 훨씬 무의식적인 것입니다.
38%
이런 것이 '스틸'입니다. 기호에 대한 개인적 호오라고 해도 좋겠는데, 신체화된 것입니다. 스틸도 주체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습니다. 싫은 것은 싫고 좋은 것은 좋지요. 자유의사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인간이 언어기호를 조작할 때에는 두 가지 규제가 있습니다. 즉 '랑그'는 외적인 규제, '스틸'은 내적인 규제입니다.
에크리튀르는 이 두 가지 규제의 중간에 위치합니다. 에크리튀르는 일본어로 잘 옮겨지지 않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사회방언' 또는 '집단적 언어 운용'이라고 하면 될까요?
계층적인 에크리튀르를 깊이 내면화해버린 사람은 스스로 자유롭게 독창적인 의견을 이야기하려고 하지만, 실은 주어진 대사를 그대로 읽을 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자기 자신을 자기 계층에 못 박고 있지요. 사회적 유동성을 결여한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최하층으로 쓸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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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신도 사회는 가능하면 높은 유동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크리튀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집단을 고정시키고 유동시키지 않기 위한 장치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만큼 자유롭고 유동적이고 생성적인 것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이 수업에 임하고 있습니다.
55%
목소리를 내어 읽거나 '베껴 쓰기'를 하는 등 신체를 사용하면 뇌의 재조직화에 눈에 띄게 속도가 붙습니다. 신체를 매개시키면 시킬수록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체가 동기화하면 자신의 신체 안에서 자기도 몰랐던 감각이 생겨납니다. 전대미문의 감각이지요. 그것이 '내 몸 안에서 일어난 사건'인 이상 언어화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79%
우치다 다쓰루,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中
+) 처음 이 책을 읽고자 했던 것은 '창조적 글쓰기'에 대한 저자의 강의록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쓰기에 대한 기법이나 창조적 발상을 하는 방법들을 언급할꺼라 생각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읽을수록 그런 기법적인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글을 쓰는 사람이 독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혼을 담아 쓰는 글쓰기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을 차분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독자를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글을 써야 하고,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체력을 유지하는 것에 힘쓰며 일관된 자세로 글쓰기에 임해야 한다는 것도 전해준다.
나는 무엇보다 소쉬르의 '애너그램'에 대한 저자의 설명과 롤랑 바르트의 '에크리튀르'를 설명하는 것이 인상깊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점, 또 사회적 유동성을 결여한 사람일수록 계층적 언어에 익숙해서 독창적인 문장이 아닌 계층적 언어로 이루어진 문장을 쓰게 된다는 점이 그렇다.
가끔 내가 많이 선택하는 단어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저자의 말대로라면 그건 어쩌면 '선택'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반응'일 수도 있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된 기분이다. 그리고 사회적 유동성을 고려해서 언어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벗어나 열린 자세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창조적 발상은 그렇게 틀을 깨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