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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고에 저택 살인사건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한희선 옮김 / 시공사 / 2008년 11월
평점 :
3,40분을 가니 길은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과연 어느 쪽이 본래 길이고 어느 쪽이 샛길인지 그 방향에서는 순간적으로는 판단을 하기 어려운 갈림길이었다.
그날 이곳에서 우리들의 운명은 이 길과 마찬가지로 두 방향으로 분기해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 중 적어도 몇 명쯤은 여기서 그것을 잘못 골라 버렸다.―그 생각은 불손한 것일까. P.612
일본 추리소설을 열심히 읽고 있다마는 이렇게 유명한 책을 쓴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할 때면 ‘아직 멀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키리고에 저택 살인사건>을 쓴 아야츠지 유키토는 <관 시리즈>로 엄청 유명하다는데 그 시리즈들을 읽어보지도 못했으니 말이다. 거기다 1987년에 <십각관의 살인>으로 데뷔를 한 작가이고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는데도 읽어본 적이 없다는 것은 정말 아직까지 제대로 책읽기를 못하고 있다는 느낌과 책을 그다지 많이 읽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키리고에 저택 살인사건>은 눈보라가 치는 어느 겨울날, 고립된 한 저택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그린 소설이다. ‘암색텐트’라는 극단의 사람들은 여행을 왔다가 타고 가던 버스가 고장이 나 외딴 고개에 멈춰 버리고 만다. 버스를 수리하기엔 시간이 너무 걸려 결국 걸어서 시내로 가기로 결정을 하지만 출발할 당시 화창했던 날씨는 눈보라가 치기 시작하고 마침 눈에 보이는 저택에 가게 된다. 그 곳에는 눈보라를 피해 온 의사 닌도가 머무르고 있었고 주인의 허락을 받아 눈보라가 그칠 때까지 그 곳에 머무르게 된다.
저택은 참 기묘한 곳이었다.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외딴곳에 호수와 정원, 온실까지 있는 거대한 저택이었고 집안엔 귀한 물건도 잔뜩 있었다. 주인은 얼굴도 보이지 않고 저택 안에 일하는 사람들은 무뚝뚝했다. 더욱더 그 저택을 기묘하게 만드는 것은 뜻하지 않은 일로 저택을 찾은 사람들의 이름을 뜻하는 물건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냥 사람들이 느끼기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자꾸 보니 해석을 그런 식으로 하게 만드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암색텐트 단원 중 주인공인 작가 린도는 사람들의 이름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을 뜻하는 물건이 파손이 되면 그 사람도 살해 당한채로 발견이 되는 기이한 일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그것도 우연히 들은 오르골 속의 [비]라는 동요의 가사 대로 말이다.
이 책을 읽을 땐 상당한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일단 저택 자체가 크다보니 사람들이 온실이며 정원, 도서관, 예배당 등의 여러 장소를 다니고 각자 살해당하는 장소와 이름을 뜻하는 물건이 있는 장소가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독자로 하여금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등장인물의 이름이었다. 암색텐트 단원들은 연출가인 야리나카 아키사야를 제외하면 모두 가명을 가지고 있고 이 이름이 바로 범인을 찾아내는데 결정적은 단서를 주기 때문이다. 책의 맨 앞엔 저택의 평면도와 등장인물의 이름이 적혀 있지만 너무 자주 앞으로 왔다 갔다 해야 하기에 차라리 종이에 이름이라도 적어두고 계속 보면서 읽는 것이 편했다.
<키리고에 저택 살인사건>은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함께 추리를 하는 즐거움을 주는 책이다. 일단 악천후로 인해 범인과 다른 사람들이 모두 한 장소에 있는데다가 화자의 눈으로 보는 곳에 화자도 놓치고 있는 단서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고 나는 추리엔 소질이 없나보다고 좌절했지만 말이다. 작가는 사회파 추리소설이 지나치게 진지하고 사회 문제에만 매몰되어 매력적인 명탐정과 상상을 초월한 트릭과 반전이 펼쳐지는 본격 추리소설의 진정한 재미와 매력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본격 추리소설의 맛을 간직하면서도 참신한 재해석을 가미한 ‘신본격’ 추리소설을 제창했다고 한다. 사회파 추리소설은 실제 이 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부조리들을 그려내 뭔가 독자들을 하여금 울컥하게 만든다면 신본격 추리소설은 단순하게 추리 그 자체에 재미를 느끼게 만든다. 사회파 추리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추리의 즐거움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