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네온사인과 불꽃이 어슴푸레하게 물든 밤하늘이 펑펑하는 굉음과 함께 덮쳐와 천천히 자신을 짓누르고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리카는 얼른 고타의 손을 잡았다. 고타는 리카에게 손을 잡혔지만, 맞잡지는 않았다.
"불꽃 너머에 달이 있어요." 고타가 불쑥 말했다. 정말로 깍은 손톱처럼 가는 달이 걸려있었다. 불꽃이 떠오르면 그것은 사라지고, 불꽃의 빛이 빨려들 듯이 사라지면 슬슬 모습을 드러냈다.
P.298


가쿠다 미쓰요의 <종이달>은 이 책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도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거나 들어본 책일 것이다. 그럼에도 작가인 가쿠다 미쓰요는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작가이다. 2005년 <대안의 그녀>로 제135회 나오키상을 수상하며 평론가들에게 "어느 하나 버릴 작품이 없는 작가" 라는 찬사를 받은 유명한 작가라고 하지만 말이다. 그나마 이 작품을 제외하면 일드로 나온 <8일째 매미> 하나는 알고 있다.(정말 제목만 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정말 세상엔 수많은 작가들이 있고 대단한 작품들도 많으며 난 편협한 책읽기와 생각보다 많은 책을 읽지 않는다는걸 느끼게 된다.


책 얘기를 하자면 이 책의 주인공은 우메자와 리카라는 41세의 평범한 주부이다. 평범하다고는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그녀는 절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냥 겉으론 그래 보일뿐이지 그녀의 속은 공허하며 어딘가가 고장나있다. 리카가 남편인 마사후미와 결혼한것도 그렇다. 너무너무 사랑해서 결혼했다기 보다는 결혼전 이름인 가키모토 리카가 자신의 일부가 아닌 자기 자신이 되어버릴것 같다는 공포를 느끼고 청혼을 했을때 냉큼 승낙한 것이다.(난 도무지 그게 어떤 느낌인지 이해가 안된다.) 그렇게 자신의 일부를 잘라버리려고 도망치듯 결혼해 일도 그만두고 한동안은 집안을 가꾸고 남편의 밥을 정성껏 차리며 지내지만 이내 공허함이 다시 밀려든다. 노력을 해도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는 생기지도 않았고 요리교실들을 다니면 바쁘게 지내보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내가 벌어다 주는 돈'이라는걸 생색내는 남편때문에 문제의 은행에 계약직으로 취직하게 된 것이다.


소설의 배경이 1990년대 일본 은행이기에 지금 우리가 알고있는 은행 시스템과는 차이가 있다. 지금은 고객들이 은행을 방문하지만 그때 일본 은행은 은행원들이 집을 방문해 상품을 팔고 고객이 현금을 주면 은행으로 가지고 와 입금하는 시스템이었다. 리카가 어느 고객의 집을 방문했을때 고타를 만나게 되고 또 우연히 다시 만나 술을 마시면서 남편과는 다른 감정을 고타에게서 느끼게 된다.


리카의 부정은 처음엔 작은 것으로 시작되었다. 20대 초반인 고타의 뽀송뽀송한 얼굴을 떠올리니 40대에 결혼한 아줌마인 자신의 모습에 자신감이 없어졌고 화장품을 사러갔다 현금이 모자라 고객이 맡긴 돈을 사용한것이다. 물론 그 당시는 바로 채워넣긴 했지만 이때의 경험으로 두번째 고객의 거액의 돈을 쓰는건 쉬운 일이 되어버렸다. 남편과의 관계와는 달리 리카는 고타에게 최선을 다하기 위해 옷도 예쁜 것을 사입고 에스테딕도 다닌다. 빚이 있는 고타의 빚을 다 갚아주고 둘이 자유롭게 만나기 위해 멘션을 빌리고 자동차를 사고 고타를 해외여행도 보내준다. 처음엔 자신이 갚을 수 있다고 리카는 생각했지만 점점 씀씀이가 커져가 더이상은 자신의 힘으로 갚을수없는 돈을 써버린다. 이것을 감추기 위해 또 다른 고객의 돈에 손을 대고 또 손을 대며 그러면서도 여전히 남의 돈을 펑펑 쓰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 책엔 리카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리카를 다른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는 3명의 사람이 나온다. 참 재미있는게 그들 모두 돈에 관련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리카를 정의로운 소녀로 기억하는 여고 동창 유코는 그리 어렵게 사는 것도 아니면서 뷔페에 가면 준비해간 통에 음식을 싸올 정도로 짠순이에 억척스러운 여자다. 그리고 그녀의 절약은 가족 모두 동의한거라 생각했지만 딸이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며 위기를 맞는다. 리카를 정숙하고 고상한 여자로 기억하는 전남친 가즈키는 낭비벽 있는 아내 때문에 고생이다. 부유한 집에서 자란 아내는 아이들에게 최고급만 해주길 원하고 그 요구를 다 해줄 수 없는 가즈키는 결국 이혼의 위기를 맞게 된다. 마지막으로 리카를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하는 요리교실 친구 아키는 쇼핑중독으로 이혼당했다. 딸은 남편이 키우고 가끔 딸을 만나는데 딸은 아키를 엄마가 아닌 물주로 보고 있다.


리카만이 아니라 등장하는 돈에 대해 다른 관점으로 살아가는 이 3명은 돈 때문에 위기를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리카는 어떨까? 그녀는 고타와 계속 행복했을까? 책의 첫 시작이 태국에서 도피중인 리카의 모습이 나오고 다른 이들의 대화에서 일본에 가지 않고 숨어서 사는 방법이 등장하니 이들의 미래에 해피엔딩이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사진이 등장한지 얼마 안된 일본에선 초승달 모양의 가짜 달을 매달고 사진을 찍는게 유행이었다고 한다. 사진을 남기는 것은 가장 행복한 순간이며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이니 종이달은 바로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보내 행복한 시간을 의미한단다. 리카에겐 고타가 바로 그 종이달이었다. 남편과의 권태로움도 잊고 나 자신을 스스로도 알지 못함에서 오는 공허함도 잊게 해주는 종이달 말이다. 하지만 종이달은 결국 가짜일뿐이다. 그것은 영원할 수 없으며 만족감을 채워 줄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리카와 고타의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나는 리카의 그런 감정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 그 공허함을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고타에게서 채우려 했는지 말이다. 그러나 분명 어느 순간 나도 이런 종이달로 만족감을 채우려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의 나는 리카와 같은 바보같은 선택을 하지 않길 바란다.


언젠가 또 리카를 만날 일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문도, 마시다 만 커피도 그대로 두고 계산대에서 계산을 했다. 만약 리카를 만나는 일이 있다면, 나는 그녀에게 무엇을 물을까. 무엇을 손에 넣었는지 물을까. 아니면 그만큼 큰돈의 대가로 무엇을 놓을 수 있었는지 물을까.
P.3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