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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크르
서진연 지음 / 답(도서출판) / 2019년 1월
평점 :
시뮬라크르 : 순간적으로 생성되었다가 사라지는
우주의 모든 사건 또는 자기 동일성이 없는 복제를 가리키는 철학 개념.
다 읽고 난 후 막연히... 장자의 '호접지몽'이 떠올랐습니다.
마지막까지 표지에 나와있던 의문점은 풀지못한 여운으로 남았네요.
"이 모든 게 다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각기 다른 삶을 사는 4명의 주인공들이 등장합니다.
초반에는 갑자기 마주하는 세계에 적응을 못했어요.
대재앙과 함께 현실과 가상세계를 넘나들기 때문이에요.
생각해보니 '이 세계' 추리는 초반부터 시작이었네요ㅎㅎ
읽으면서 하나씩 따라잡다 보면 어느새 책 중반을 넘어가는데
이때부터는 몰입감이 상당해서 단숨에 읽어내려갔습니다.
단편으로 4개의 이야기가 나오는 게 아니라
4명의 삶이 엇갈려서 나오는 방식이라 약간 둥절하기도 했어요.
이 세계가 진실인지.. 저 세계가 진실인지 감이 안 잡혔거든요ㅋ
사별한 남편의 아바타와 함께 아픈 상처를 딛고 새 삶을 살고 싶은 세영.
세영도 충격을 받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영도 사무실에서
'부재중' 모드로 그 사태를 지켜봤고, 그래서 저녁에 남편이 앞 동에
사는 여자가 뛰어내렸다는 말을 전하는데도 적절히 반응해 주지 못했다.
게임 속 아바타일 뿐인 남편이 하는 말들이
상황에 맞게 프로그래밍된 언어인지,
카멜이 남편의 입을 빌려 보내는 어떤 메시지인지 의구심마저 일었다.
세영은 바로 남편의 아바타를 재우고 서버와의 접속을 끊어 버렸다.
- 무채 계열의 빨강 18 본문 중 -
교통 사고로 기억의 대부분을 잃고 낯설지만 익숙한 느낌에 당황하는 혁.
그런데 이곳으로 이사 온 때가 언제였더라? 혁은 기억나지 않았다.
단기 기억 상실증이라도 걸린 듯 요즘 부쩍 그런 일들이 잦았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들이 거기 있고 당연히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이 떠오르지 않았다.
교통사고 후유증일 수도 있었다. 혁은 불안했지만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괜찮아질 수도 있는데 공연히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아내는 혁의 이런 증상을 먼저 알아채고 일부러 한적한 지역으로
요양 삼아 이사 온 것일 수도 있었다.
- 서쪽 하늘의 삼각편대 7 본문 중 -
친구의 그림을 자신의 것인양 내놓고 유명해진 완.
"그럴까?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를 중심에
놓고 보는 관점이고, 그 모두를 하나하나의 나로 본다면, 어느 곳도
다 진짜라고도, 가짜라고도 할 수 없는 것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누가 누구 흉내를 냈다고 해서 어느 것을 진짜라고도 가짜라고도
할 수 없는 것 아닐까, 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내내 그런 생각이 들더군."
"알 듯 모를 듯하네요."
"다음 그림은 일곱 개의 시선에 관한 이야기일세."
- 무채 계열의 빨강 15 본문 중 -
지구 대재앙 후, 처참한 세상 속에서 삶을 살아나가는 루.
시장은 발표 내용을 말하기에 앞서 한 장황한 연설에서,
방사능 오염 물질의 도시 내 유입이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이대로라면 지구상의 인류가 완전히 멸종될 것이라고 협박했단다.
그리고 이내 검역 방법과 기준치를 발표하고,
기준치 이상으로 감염된 자는 B 지구의 시설로 보내 치료받을 수 있도록
조처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검역에 협조하라고 회유했다.
그 말을 믿는 사람은 물론 아무도 없었다.
- 무채 계열의 빨강 16 본문 중 -
이들의 관계는 서로 얽혀있습니다. 이 점이 매우 흥미로웠어요.
지구의 대재앙이 닥치기 전까지의 평화로운 일상에서 한순간에
변해버린 처참한 현실은 평범했던 모든 삶을 통째로 바꿔버립니다.
인공지능에 인격을 넣고 한 사람의 추억과 경험을 넣는다면
그 존재의 의미와 인격은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하는 걸까요.
그들도 각각의 인격체로 가상공간에서의 행복한 삶을 꿈꾼다면?
인정해야 할까요.. 아니면 간단히 삭제해버려도 되는 걸까요.. ㅠ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죽은 이를 잊지 못해 아바타를 만들어낸다는 점에는 공감도 되었지만
처분, 삭제라는 단어를 만나니 멈칫-하게 되더라고요..
지구 재앙이나 인류멸망, 바이러스 감염 또는 좀비가 나오는 소설을 좋아하는데
이렇게 4개의 다양한 시선으로 같은 '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신선했습니다.
인격을 가진 인공지능 아바타는.. 아직까진 절대 만나고 싶지 않네요ㅋ
어디선가 문득 나를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지거나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거나
아니면, 처음 왔는데 낯익은 느낌의 데자뷔 현상을 자주 경험하시는 분에게
주말의 책으로 <시뮬라크르>를 추천드려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