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 개정판
이도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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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참으로 여러가지가 있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 연인의 사랑. 형제, 친구간의 사랑. 종교적인 사랑...

그래도 항상 인간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은 연인, 남녀의 사랑이 아닐까?

그 사랑에도 많은 변수가 존재하고 색깔이 다르고 방법이 다르고, 그래서 어떤 법칙이 존재할 수 없는, 그리고 설명하기 힘든 사랑들...

그 많은 사랑들이 모두 상처 받지 않고 무사할수 있을까?

작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네 사랑이 무사하기를, 내 사랑도 무사하니까.

 

라디오 작가 공진솔은 같이 호흡을 맞추게 될 새로운 피디소식에 민감해져있다.

나름 평판은 나쁘지 않지만 시집을 낸 적이 있는 피디라니, 작가로서는 꽤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닐수 없다.

하지만 서글서글하니 그리 깐깐하지도 않으면서, 감각이 있는 이건 피디와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차츰 그의 삶속에도 들어가게 되면서 어쩔수 없는 감정들이 생김을 알게 된다.

사랑...

그러나 건에게는 오랜 사랑이 있었다.

친구 선우와 연인인 애리.

선우는 언제나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그를 바라보는 애리는 항상 조금은 외로와할수 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주는 건이의 모습을 진솔 또한 바라보고 있다.

 

 

"...우울해 보여요, 많이."

"그렇긴 하죠. 이유는 다르지만."

"애리씨 때문에?"

그가 멈칫, 하더니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지만 진솔은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응시했다. 복잡하고 미묘한 기색이 건의 눈빛을 스쳐가더니 이윽고 그는 희미하게 나무라듯 웃었다.

"당신, 파울이야."

 

 그러나 건이 또한 진솔을 향한 마음이 단순한 친구 관계는 아님을 느껴가게 된다.

 

"그래서 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 진솔 씨는, 나한테 일기장 같은 사람이에요."

"...일기장?"

"표현이 좀 그런가? 아무튼 어제도 이화동 우리 집까지 강제로 데리고 갔었지, 오늘도 당신이랑 마무리가 안 되니 뭔가 허전했지. 수첩에 몇 줄 적는 것처럼 꼭 진솔씨한테 하루를 정리하게 되잖아요. 요즘 계속 그랬으니까."

 

마침내 진솔은 용기를 내어 건에게 자신의 사랑을 말한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말들이 사람의 의지를 이기고 수면으로 떠오르는 것일까. 진솔은 가슴에서 넘쳐 오르는 안타까움으로 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는 무심히 돌아보았다. 거의 눈썹이 의문스럽게 올라갔다. 저도 모르게 말이 되어 나오는 것처럼, 진솔은 그를 응시한채 입을 열었다.

"나요...할말이 있어요."

그도 잠자코 그런 진솔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자...당신 사랑해요."

아, 이런 믿기지 않는 순간에도 산의 공기는 얼마나 맑게 느껴지는지. 바람은 또 얼마나 선선하고, 가을 기운은 왜 이렇게도 마음을 싸-하게 만드는지.

 

그러나 건은 진솔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시간을 달라고 한다.

진솔 또한 기꺼이 그를 기다리기로 마음을 먹는다.

  

 건은 애리에 대한 마음도 진솔에 대한 마음도 정의를 내릴 수가 없다.

그러나 애리는 바라볼수 밖에 없는 존재.

아마도 진솔에 대한 마음이 사랑이 아닐까 스스로에게 되뇌인다.

 

"요즘 항상 같이 지냈죠. 낮엔 일터에서 만나고, 퇴근하면 둘이 시간 보내고, 당신 원고 쓰는 시간까지 뺐는 줄 알면서. 오늘 아침도 오피스텔을 나올때 부터.... 진솔씨 하고 싶었던 거, 하나는 같이 해주고 싶다 생각했어요. 그 다이어리에 적혀 있던 것 중에서, 젠장."

"사랑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게 사랑이 아니면 또 뭐란 말이야."

 

진솔또한 사람에게는 각자의 사랑이 있는거라 생각한다. 모두 같을 수는 없다고.

 

꼭 말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다시 생각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라고. 사랑에는 여러 모습이 있고, 모든 사람의 사랑이 다 같은 모양, 같은 색깔일 수는 없을 테니까. 건에겐 그의 보폭과 속도가 있는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또 다시 바람과 같은 선우에게 상처를 받는 애리를 보는 건은 그만 진솔 앞에서 애리에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게 되고, 그일로 진솔은 건에 대한 마음을 접기로 한다.

 

"그렇게 오래 기다려야 할 만큼 생각할 게 많다면, 그렇게 오래 들여다봐야 비로소 알게되는 감정이라면, 번번이 그 사람이 아플때마다 당신 마음도 같이 아파서 미치겠는 거라면.... 그건 아니거든요.... 나 아니면 안 되는 꼭 내가 필요한, 그런 절박한 감정은 아니거든요. 그냥, 당신은 내가 좋겠죠. 인간적으로."

 

혼란스럽고 실망스럽고 절망 가운데 있는 진솔에게 건의 할아버지는 말한다. 

 

"사람이 말이디... 제 나이 서른을 넘으면, 고쳐서 쓸 수가 없는 거이다. 고쳐지디 않아요."

"보태서 서야 한다. 내래, 저 사람을 보태서 쓴다...이렇게 생각하라우. 저놈이 못 갖고 있는 부분을 내래 보태줘서리 쓴다.... 이렇게 말이디."

 

건과 진솔은 자신의 사랑을 알 수 있을까? 찾을 수 있을까?

 

네 사랑이 무사하기를

내 사랑도 무사하니까

 

세상의 모든 사랑이, 무사하기를

 

방금 쓴 문장은 말이 안된다. 세상의 모든 사랑이 무사할 수 있나? 그렇지 않다. 서로 부딪치는 사랑, 동시에 얽혀 잇는 무수한 사랑들. 어느 사랑이 이루어지면 다른 사랑은 날개를 접어야만 할때도 있다. 그 모순 속에서도 사랑들이 편안하게 아침을 맞이하고, 눈물 흘리더라도 다시 손 붙잡고 밤을 맞이하기를 바라는 건 무슨 마음인지. 무사하기를. 당신들도 나도, 같이.

 

 

참으로 오래간만에 한번 손에 붙잡았다 놓지 않은 책이었다.

무엇보다 요즘같지 않은 아날로그적인 사랑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첫눈에 뿅~~~가서 즐겁고 진하게 즐기다가 왠지 짜릿함이 없어지면 그냥 쿨하게 헤어지는, 그런 사랑이 아니어서 너무 좋았다.

이것이 사랑일까? 알 수 없어서 나름 부인도 해보고, 아닌 척도 해보다가

그래도 이것이 사랑임을 깨닫고는 상대방의 속도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내가 받을 사랑만 계산하는 것이 아닌 상대방이 주려하는 사랑도 가늠하고 배려하는 그런 모습이 아름다왔다.

특히 건이 할아버님의 말씀은 정말 명언이시다.

우린 항상 내가 받을 사랑만을 생각하며 산다.

사실 인간의 사랑이란 받은만큼만 사랑하게 되어있다. 원래 인간이란 존재는 원래 이기적이니까...^^

그래도 내가 해줄수 있는 사랑을 생각하며 사는 것도 인간이다.

보태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은,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모두에게 정말 필요한 말일지 모른다.

각자의 사랑의 색깔과 모양이 다르듯이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보태가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네 사랑이 무사하고 내 사랑도 무사하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만큼 사랑의 과정도 빠르게 지나가는 요즘,

사랑을 하고있는 사람들과, 사랑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 사랑을 계속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람들이 모두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나의 아이들도 이렇게 진실하면서 조금은 느릿한 사랑을 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작가가 남자이면서도 나름 여자의 심리를 잘 이해하며 썼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만 그리 수려한 문장체는 아니다. 문학적 가치를 가질만한 문장이나 글귀들을 찾아낼 수는 없었지만,

빨려들게하는 구성은 탁월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전체적인 호흡이 빨랐던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의 심장속도와 같은 템포로 진행되는 살짝 걷는 듯한 진행이 오히려 날 편안하게 읽게 해주었다.

사실 요즘 내가 읽었던 소설의 대부분이 읽다보면 누가 말하는 것인지 알수가 없을 정도로 왔다갔다,

나중엔 손으로 짚어가며 이건 누가 말한거, 이건 누가 말한거, 이러면서 읽었던 터라

내 흐름에 딱 맞는 책이라 너무 반가웠다.

다 읽고 났더니 마음에 남는 잔잔한 따뜻함도 좋았다.

 

이 책속에서 재미있었던 한 귀절.

 

'생각날 때 마다 마셨더니

이젠 마실 때 마다 생각나네 시팔'

 

선우와 애리의 가게벽에 남아 있던 낙서의 한구절이다.

너무나 마음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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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죽을 수 있게 해줘 - 스캇 펙 박사가 현대인에게 던지는 자살과 안락사에 대한 메시지
M. 스캇 펙 지음, 조종상 옮김 / 율리시즈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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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시설의 놀라운 발전으로 인간의 생명은 끊임없이 연장되어 왔다.

그에 따라 우리의 의지에 반해 이어지는 생명의 연장 문제도 같이 논의되어 온다.

전에는 그저 죽음을 맞이 할수 밖에 없는 질병도 놀라운 의료기술로 생명이 연장되고 치유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때는 과연 이것이 치유의 과정인가, 그저 같은 상태의 연속선상에 놓이는 것은 아닌가 하는 기로에 설때도 있다. 그 끝을 알수 있으면 좋으련만 우리는 아무도 그 결말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런 상황이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안락사라는 주제는 복잡하다. 심지어 안락사의 일반적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안락사란, 오로지 환자나 죽어가는 누군가에게 의사나 가족중 한 사람이 행하는 하나의 행동일까? 또는 환자나 죽어가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자신을 죽이는 행위에 사용되는 용어일까? 안락사에는 환자의 동의가 필요한가? 또 가족의 동의는 어떠한가? 안락사는 다른 평태의 자살 및 살인과 분리될 수 있는가? 단순히 생명유지장치의 플러그를 뽑는 것과는 어떻게 다른가? 환자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과도한 조치 사용의 제한이 안락사의 한 종류라면 과도한 조치와 일반적 조치의 차이점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안락사와 고통의 관계는 어떠한가? 육체적 고통과 정서적 고통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는가? 고통의 정도는 어떻게 평가 하는가? 무엇보다도 윤리적인 문제가 왜 관련되며 윤리적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지은이는 민감한 안락사의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 또한 이 질문에 심각하게 고민하고, 고뇌한다.

그것은 지은이의 죽음에 대한 두가지 경험담 때문이었다.

펙 박사는 자신의 할머니가 위중한 상태에서 각종 의료적 행위의 도움을 받아 생명을 연장하게 되는 것을 보고 회의를 느꼈었다. 연세도 드시고, 약간의 치매 증상까지 있으신 분에게 그런 의료적 행위로 삶을 연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모든 치료를 이겨내시고 건강을 찾으셨다.

이후 5년동안 할머니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으며 투정을 부리거나 불평하는 일도 없었다. 할머니는 언제나 행복해 보였고 재치나 유머감각도 그 어느때보다 좋았다. 그러므로 나는 의사들이 할머니를 살리기 위해 정맥 절개술을 감행하고 당시 내게는 과도한 조치로 보였던 방법들을 사용한것에 대해 감사할 수 밖에 없다.

다음의 한 예는 거의 신체적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어 각종 약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 로저라는 환자의 경우다. 펙 박사는 하루가 다르게 신체가 죽어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며 이렇게 고통스럽게 로저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과연 그를 위한일일까 하는 회의가 든다.

과장이 기계를 가지고 나간후 나는 거의 15분동안 토니를 쳐다보며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그러고는 다시 일어나서 정맥 주사기 튜브의 죔쇠를 조절하여 주사액 유입량이 반으로 줄어들도록 했다. 거의 들이붓다시피하던 주사액은 이제 빠른 속도로 방울져 떨어지는 정도가 되었다. 그런 다음 나는 의사 휴게실로 가서 담배 한대를 피웠다. 10분이 채 안돼서 병실로 돌아왔을때 토니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지은이의 손으로 로저의 생명선을 끊은것이다.
과연 펙 박사는 안락사에 대해 찬성의 입장을 가지고 있는것일까?
우리들은 모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사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이 옳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죽음 맞을 때 심한 육체적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려움은 안락사 운동을 촉진 시키는 역할을 한다.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는 과정이 오로지 공포스럽고 길며 쓸데없이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전에 스스로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건 합리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공포증의 대부분은 이런 기본적인 생존적 두려움에 기인한다. 인간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 두려움은 의식적 존재인 인간의 고유한 고통이다. 그러나 이 두려움을 어떻게 다룰것인지는 선택의 문제다.

이런 점에서 펙 박사는 현대의 의료인들이 환자에 대한 고통에 너무나도 둔감함을 지적하고 있다.

진단이 끝나면 서둘러 통증을 안전하게 줄일 수 있도록 약을 처방해야 한다. 만약 의료진이 환자의 극심한 통증을 쓸데없이 오래 지속되도록 놓아두게 되면 환자를 고문하는 것과 다름없는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통증에 대해 적절한 처치를 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 가장 널리 자행되는 의료 범죄다.

그러나 펙 박사는 여러가지 면에서 안락사를 찬성하지는 않고 있다.

나는 안락사를 비판하는 두가지 이유를 서술했다.

하나는 명백히 신학적이며 보통 모든 자살과 관련된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창조자이자 양육자인 하느님이 우리의 삶에서 우리 자신만큼 상당한 이해당사자가 된다는 것이다. 자유의지가 있는 피조물로서 우리에게는 스스로를 죽일수 있는 힘이 있다. 그렇게 할 윤리적, 도덕적 권리가 있느냐에 관한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자살을 통해 인간은 자신에게 삶을 부여한 자와 관계없이 자신의 죽음의 때를 결정한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부정이자 그 영혼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부정이다.

안락사를 비판하는 또 다른 이유는 신학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특별히 내가 정의했던 안락사와 관련된다. 우리는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는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것들을 배운다. 그러나 늙어가고 죽는 과정에 수반되는 생존적 고통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죽이는 행위는 스스로 그 배움의 길을 막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그런 학습의 기회를 설계한 하느님을 속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종교적인 이유가 주된것이긴 하지만 그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의지와 선택권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실명이나 그밖의 질병, 노화나 죽음을 축복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기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그러자면 대단한 의지가 필요하다.

하느님은 우리는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다른 어떤 것보다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선 또는 악을 선택할 수 있다. 심지어 하느님도 인간의 의지를 반영하여 치유한다.

아내와 나는 둘 다 낙태를 찬성하지만 버스라이트라는 단체에도 약간의 후원금을 보내고 있다. 버스라이트의 목적은 낙태한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낙태를 선택하지 않도록 여성들을 지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단체에 가입한 이유는 선택권을 믿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책의 목적도 바로 그러하다. 안락사를 선택하거나 심지어 이를 돕는 사람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연사의 선택을 장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선택을 한다는 것을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옳은 결정이라고 누가 확신할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이문제에 대해 단숨에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많이 생각하면서 각자의 의지와 선택권을 넓혀가야 한다.

안락사의 논의가 뜨거워지면 뜨거워질수록 사회는 건설적이면서도 빠르게 두 근본적인 문제를 더욱 쉽게 공론화 할 것이다. 그 문제 중에 하나는 결점 많고 예측 불가능한 미국 의료의 특성으로서 특히 통증 관리와 자연사를 돕는 일에 관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세속주의다. 만약 이 두가지 병폐를 뽑을 수 있게끔 사회를 자극할 수만 있다면 안락사 논의는 커다란 희망의 불씨가 되는 셈이다.

나 또한 이 책을 읽으며 안락사나 자살을 이해, 찬성한다거나, 반대한다는 그런 입장을 정리하게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어느 한 쪽을 택한 사람들을 비난 하지는 않게 된것 같다. 물론 자신의 선택에 대해 신중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약간의 분노감(공인인경우 그것에 대한 파장을 생각해)도 일어나기는 하지만 일방적인 나의 잣대로 바라보는 것은 잠깐 멈추게 될것 같다.

그리고 내가 만약 나의 상태에 대해 이런 판단을 해야 하는 때가 온다면 나 또한 힘들고 고통스럽게 생명을 연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결정이라면 쉽게 판단하기 어려울것 같다.

그래서 평소에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본다.

 

이 책은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자살과 안락사에 대한 문제를 지은이의 전문적인 분야를 살려 잘 풀어나갔다고 볼수 있다.

다만 전체적인 내용이 조금 산만하여 정리가 잘 안되고 맥이 끊기며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것은 지은이의 오랜 경험을 통한 수많은 사례들이 읽는이의 이해를 도와주는데 많은 역할을 했고, 그 사례들이 상당히 재미있었다.

지은이의 주장은 마지막 까지 읽지 않으면 무엇을 즉, 안락사에 대한 찬성인지 반대인지 알수가 없도록 모호하다.

물론 이 주제가 단칼에 무 자르듯이 말할수 있는 주제는 아니지만...

그래서 지은이 또한 많은 예외와 개인의 선택에 자율성을 두며 말하기도 했다.

또 지은이의 종교성때문에, 그리고 지은이의 주장은 이 종교성에 무게를 많이 두고 있기에

이 책의 뒷부분은 상당히 종교적이다.

그러나 책 표지 어디에도 그런 내용을 가늠할수 없기에

같은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다 보면 뒷부분에서 조금 난감해 할것 같다.

그래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조금은 고민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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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칠이 실종 사건 샘터어린이문고 32
박현숙 지음, 이제 그림 / 샘터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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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마을.

원래 이름은 따로 있지만 사람들은 도깨비 마을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도깨비가 나오는 산을 깎아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이마을이 생겼다.팔을 쭉 뻗으면 하늘을 만질 수있을 것 같은 높은 동네.

자고 일어나면 사람이 늘어나고, 또 자고 일어나면 집이 늘어났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가 방망이를 두드려 집과 사람들을 만들어 낸 것처럼.

그래서 '도깨비 마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봉기 할아버지도 그때 도깨비 마을로 왔다.

사람들은 도깨비 마을로 가기 위해 수백개의 계단을 만들었다.

한숨에 다 오를 수 없는 계단을 사람들은 몇번씩 허리를 펴고 쉬어가며 올랐다.

(p14)

이제 얼마 안있으면 새로운 아파트를 짓기위해 철거되는 달동네.

개발을 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아파트에 살수 있는 기회를 가정 먼저 주겠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형편으로는 살수없는 가격에,

집을 마련하기위해 정든 동네를 떠나야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른들은 그런 어려움들을 부딪치며 아둥바둥 살아가기 바쁘지만

그속에서 어린 아이들은 자신에게도 소중한 무언가를 주장하지 못하고 조금씩 주눅이 들어간다.

명칠이가 이사를 갑니다.

하지만 소중한 개 똥칠이는 데리고 갈수가 없습니다.

명칠이는 친구 봉기와 송이에게 자신이 아끼던 카드와 구슬까지 주면서 똥칠이를 부탁합니다.

얼떨결에 똥칠이를 맡게된 둘은 나름대로 열심히 보살피지만

똥칠이는 어딘지 자꾸 아파보이고 밤에는 구슬프게 울기까지 합니다.

걱정이된 둘은 명칠이가 준 12000원을 들고 동물병원을 갑니다.

똥칠이는 새끼를 배고 있었습니다.

많이 허약해져 있다는 말에 둘은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 상황에 둘다 마을을 떠나게 되고,

어느날 똥칠이가 없어집니다.

검은 그림자속의 목소리를 듣던 날 밤, 사라진것입니다.

영양을 판다는 네거리 식당에 팔린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둘은

똥칠이를 찾기 위해 학교도 빠져가며 수사를 벌입니다.

둘이 용의자로 추측한 사람들을 미행해가며 똥칠이를 찾던중,

.....

사람들은 도깨비 마을을 떠나면서 가지고 가는 것보다 버리고 가는 것이 더 많았다.

(p15)

현재의 집보다 좁은곳으로 갈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많은것들을 버리고 이사를 갑니다.

그러나 그들이 놓고 가는것들이 단지 물건만은 아닐것입니다.

아이들또한 많은 것들을 버릴수 밖에 없지만 그들의 선택이 아닙니다.

'하봉기 집'

봉기네 집 담벼락에는 까만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다.

담벼락의 벽돌이 깨진 구멍마다 풀들이 우거져 있었다.

봉기가 태어나던 날 아빠는 담에 봉기 이름을 써놓았다.

봉기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빠가 쓴 글씨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봉기는 이 글씨를 볼때 마다 꼭 아빠가 이름을 불러 주는 것 같았다.

이제 마을이 없어지면 '하봉기 집'도 없어진다.

봉기는 아빠와 헤어지는 것처럼 코끝이 찡했다.

(p43)

가로등도 들어오지 않는 도깨비 마을.

불빛이라고는 달랑 봉기집에서 나오는 형광등 불빛밖에 없는 곳.

이제 텅빈 도깨비 마을에 바람만 남았다.

혼자 남은 바람이 동네를 삼킬것처럼 겁을 주며 다녔다.

봉기는 꿈을 꾸었다.

도깨비 마을에 방망이를 든 도깨비가 나타나는 꿈이었다.

도깨비는 황금빛의 반바지를 입고 방망이를 휘두르며 동네를 뛰어다녔다.

도깨비가 지나는 자리마다 사람이 한명씩 생겼다.

도깨비 마을은 금세 사람들로 꽉 찼다.

그사람들중에는 명칠이도 있었고 송이도 있었다.

또 담에 글씨를 쓰는 아빠도 있었다.

뒷모습니어서 아빠 얼굴을 볼수 는 없었지만 '하봉기 집'이라고 쓰는 걸보면 아빠가 분명했다.

(p48)

봉기는 사람이 없어진 도깨비 마을이 아니라

도깨비 방망이의 요술로 사람들이 생겨나는 마을을 원하는지도 모릅니다.

돌아가신 아빠가 돌아오시기를 원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낡은 것은 없어지는게 당연하거든. 이마을은 너무 오래되고 낡아서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아.

무너뜨리고 그 위에 새것을 짓는 것은 발전되어 가는 과정이지. 서운하겠지만 다 우리가 이해하고 견뎌내야 할 부분이다."

"낡지 않은 것데도 없어진게 많아요."

"그게 뭐니? 이사 갈때 가지고 가지 그랬니?"

"물건이 아니고요. 친구들이요.

아기때부터 함께 골목에서 뛰어놓았던 친구들이 먼곳으로 뿔뿔이 이사가고 이제 달랑 봉기 한명 남았어요.

아마 다시는 볼수 없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마당에 꽃밭도 없어졌어요.

할아버지가 직접 가꾸신건데, 마당을 가들 채우던 꽃도 이제는 다시는 못볼거예요."

"친구는 다시 사귀면 되고, 꽃은 새로 심으면 된단다."

(p118-119)

이 책은 없어진 개 똥칠이를 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단순히 똥칠이를 찾는다기보다

우리가 쉽게 버리고 잊어버리는 것들을 찾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봉기와 송이는 자신이 자라온 도깨비 마을을 그속에서 함께 느껴지는 추억들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추억의 하나인 똥칠이도 마찬가지이지요.

어쩔수 없이 도깨비마을은 철거되었지만

검은그림자 목소리의 아저씨네 집에 똥칠이를 맡기고

봉기가 아빠의 손길이 남아있는 벽돌을 그곳에 가져다 둔것은

봉기의 소중한 바램이 있기 때문입니다.

도깨비 마을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바램이요.^^

초등학교 3,4학년이 읽기에 적합한 책입니다.

납치범을 찾기위한 추리를 해가는 과정이 조금 허술하기도 하지만

그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흥미진진해 보일것 같습니다.

끝부분의 나름의 반전은

(어른들이 읽을때는 예상할만한 반전이지만)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합니다.

(중2짜리 울딸도 반전이라고 표현했으니까요^^)

그런 과정속에서 자칫 어두울수 있는 철거문제라든가 유기견문제들을

쉽게 다가갈수있도록 풀어놓은점이 좋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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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입니까 반올림 24
김해원 외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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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해원 김혜연 임어진 임태희

 

 

 

울딸은 요즘 독서 삼매경이다.

하지만 본인이 원해서 하는 독서가 아닌 국어 수행평가로 독서 포트폴리오를 내기 위한 독서이다.

며칠전 딸은 내게 급명을 내렸다.

 

"짧고, 재밋고, 뒷이야기 쓸수 있으며, 감동적이고, 주인공의 캐릭터가 강렬한 책좀 빌려다 줘."

 

아니,

내가 무슨 속독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소에 책을 많이 읽고 보는 작가나 출판업자도 아닌데

그 수많은 책중에 뭘 고르란 말?

 

그래도 금쪽같은 딸의 엄명인지라, 도서관에서 이리저리 책을 고르던 중,

내 눈에 띄인 책 하나.

<가족입니까>

우선 단편집이니 금방 읽을거고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니 주제 분명하고,

각각의 캐릭터별로 모든 상황이 엮어져 나오니 흥미진진할것이다.^^

오우, 나의 탁월한 선택...

 

딸에게 휙 던져주니, 딸 반응도 괜찮다.

돌아서 생각해보니 내가 더 궁금해진다. 이 책의 내용...

 

그래서 펼쳐든 책...

 

 

광고회사 쌈박기획에서는 이번에 마두테크놀로지의 신제품인 핸드폰 광고를 맡게 되었다.

여러가지 컨셉을 가지고 고민하던중 한가족을 모델로하여 연작광고를 만들기로 한다.

카피는

지금 하세요.

귀가가 늦는 딸에게 어떤 문자를 보낼까 고민하는 엄마,

밤새 트럭을 운전하다가 딸이 보닌 따뜻한 메시지를 받고 힘을 내는 아빠,

공부하느라 지친 동생에게 익살스런 동용상과 노래를 보내주는 다정한 누나,

엄마의 결혼 기념일에 파도소리 갈매기소리 들리는 바다를 동영상으로 보내는 아들.

각 역할을 맡게되는 안지나 팀장, 박동화 출판사 사장, 연기지망생인 공예린, 쌍둥이형에게 언제나 비교당하는 김재형 을 각각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예린이의 생각

엄마, 나 좀 그냥 나둬요. 나도 할수 있다고요.엄마는 내가 엄마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줄 알지만 아니라고요.엄마가 내손 내발 내생각 다 묶어 놓고 이었다고요....내가 소질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할수 있는지 없는지 내가 판단하도록 놔둬요.

가족은 울타리?

울타리는 보호막이기도 하지만, 가로막이기도 하다. 울타리는 세상에 지친 사람을 보듬어 주기도 하지만, 세상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을 가두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걸 아는 걸까?

 

안 팀장의 생각

나는 줄곧 깨금발을 딛고 높은 곳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구나. 그래서 앞으로 혹은 뒤로 넘어질까봐 무척이나 겁을 냈구나. 난 혼자니까 모든걸 잘 해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지. 모르는게 있어서도 안 되었고 아파서도, 지쳐서도 안되었어.외로움은 나약한 것,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믿어 버렷지. 하지만 외로운 사람들이 자꾸만 눈에 밟히는 건은 왜일까. 엄마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어쩌면 나는 이제껏 엉뚱한 곳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던 게 아닐까?

 

 

재형이의 생각

입으로는 차마 하기 어려운 "어머님, 죄송해요 어쩌고...."하는 문장을 쓰는데 방문이 열렸다. 나는 문장을 만드는데 몰입한 나머지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문장을 다 쓰고 고개를 들었을때 팔짱을 끼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싸늘한 표정이었다. 아니, 한심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도 모르게 핸드폰 폴더를 닫아버리고 말았다. 이제껏 작성한 긴 문장이 마침표 하나 남기지 않고 지워져 버렸다. 죄송한 마음도 함께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내가, 아니 우리가 주위에 철조망을 쳐 놨다고? 엄마는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아~~핸드폰 때문이었던 거다.

 

 

박동하의 생각

그렇게 하루 시간을 다 쓰고 나면, 몸은 완전히 투항 직전의 장졸처럼 기진맥진해져서 오로지 집 생각밖에 안 남게되는 것이다. 가는길에 한잔 걸칠수 있다ㅕㅁㄴ 그나마 위안이 됐다. 그걸로 피로한 몸이며 머릿속 찌끼들을 씻어 내고 나면, 집은 그 자체로 고스란히 천근같은 몸을 받아 안아 눕혀주는 어머니 손 같았다. 그리고 아내나 딸은 그 집안 에 당연히 포함된 어떤 내용물 같은 존재였다. 둘도 나름대로 바깥 삶이 있고 서로 간섭하거나 불편을 끼칠수 있고 삐죽삐죽 튀어나오거나 부딪칠수 잇다는 생각은 별로 해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집의 애용물로 포함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지 못했다. 어쩌면 인정하기가 싫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에서야 조금씩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집은 나에게만이 아니라 아내나 딸에게도 엄연한 둥지라는 걸. 그리고 그 둥지를 어떻게 여기고 어떻게 나들든 내 생각을 강요할 수는 없다는 걸. 그리고 그조차 언제까지나 그대로가 아니다.

 

가족이라는 것도 낡은 집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오래 묵어서 편하긴 한데, 시간이 지나면 여기저기 닳아서 자꾸 탈이 나고 손을 보아야 하는 집같은 존재들 말이다. 그래도 그렇게 자꾸 고치고 돌보면서 계속 살아가야 하겠지.

 

 

 

오늘 울아들이 컴책상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노크 없이 불쑥 들어갔더니 화면에서 뭔가를 클릭하는 장면을 포착...

한마디 쏘아붙여주었다.

삐져서 자기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버린 아들

한참있다 나온 아들은 핸펀 업데이트 시키는데 불안해서,

얼마전 남편이 모르고 핸펀 업데이트중 내비업데이트를 같이 시키는 바람에

아들 핸펀이 내비의소프트웨어로 인식되는 불상사가 있었기에...

앞에 지키고 있으면서 공부하다가 다끝나서 클릭하는 순간 엄마가 들어왔다는 설명...

 

아마 엄마에게 사과의 문자를 보내려다 그만둬 버린 재형이와 같은 마음 아니었을까?

 

쿨한 엄마가 되어야지 마음을 먹다가도 매일매일 일상이 그게 잘 안된다.^^

 

 

 

 

 

 

 

가족 입니까

작가
임어진, 김해원
출판
바람의아이들
발매
2010.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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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0월 초 이웃이신 햇살박이님의 포스팅을 보고

바로 도서관에서 빌린 책.

띄엄 띄엄 읽느라고

도서관 연체 독촉 문자까지 받으면서 이제야 다 읽었다.^^

 

이 책은 저자가 <샘터>에 연재 했던 글을 모아 펴낸 에세이다.

그러다 보니 짧은 보통 에세이들보다 한 꼭지가 정말 짧은 글들로 구성되어있다.

그러다 보니 난 정말 읽기 쉽더라는...^^

 

남들보다 조금 불편한 모습으로 살아오면서도,

전혀 남들과 다르지 않게,

아니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온 그녀이기에

글 한줄한줄이 더 강하게 와닿는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렇게 열심히만 치열하게 살지만은 않았다.

삶을 즐길줄 알았던 것 같다.

 

그런 그녀가 암이라는 새로운 장애물을 앞에 두고

또 어떻게 넘어가게되는지,

사실 그 과정이 이 책속에 나와있지는 않지만

그녀의 글속에서 그녀가 현명하고 지혜롭게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난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그래도 그녀는 참 행복했던 사람같다.

 

그녀의 부모님이 그녀를 이해하고 이끌어주고

또 지적으로나 환경적으로 호기심을 유발하고 채워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많은 장애우들이 그들의 생각과 뜻을 많이 펼칠 수 없는것은

사회의 여러 조건들도 있지만

(사실 그녀에게도 사회의 조건은 똑같이 작용했을테니까)

부모의 사회적 문화적 수준도 많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가정의 경제력이 부족하다면 아무래도 장애우를 돌볼 시간이 없고

그만큼 외부세계의 자극에 있어서 뒤쳐질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다 보면 배움도 적어지고,

사회에 나갈 기회도 더 적어지고...

 

 

그녀의 문체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아주 잘쓴다고는 사실 말하지 못하겠다(그러는 너는?^^)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고, 설득력도 있지만

아주 마음에 쏘~~옥 와닿는 그런 문장력은 아니었다.

그래도 읽으면서 계속 미소지을수 있는

그런 책이었다.

 

 

마음에 와닿은 문장들...

 

 

15년이 흐른 지금 생각해도 여전히 가슴이 내려앉을 정도로 힘든 경험이었다. 그러나 그 경험을 통해서 나는 절망과 희망은 늘 가까이에 있다는 것, 넘어져서 주저앉기 보다는 차라리 다시 일어나 걷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배웠다.

 

그런데 영희, '운명의 장난'은 항상 양면적이야, 늘 지그재그로 가는 것 같아.

나쁜쪽으로 간다 하면 금방 '아, 그것이 그렇게 나쁜건 아니었군'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좋은 일이 생기거든. 협소공포증이 생겨 엘리베이터 걸을 그만두고 나서 나는 정원 장식용품 점원으로 취직했고 거기서 죽은 우리 남편을 만났지. 재작년 그사람이 죽을 때까지 우린 53년을 같이 살았어.

남편을 만난 건 내 삶에서 가장 큰 축복이었어.

 

그렇습니다. 중요한것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곳의 삶을 마무리하고 떠날 때 그들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못 다한 사랑을 해주리라는 믿음, 진실하고 용기있는 삶을 살아주리라는 믿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 주리라는 믿음, 우리도 그 들의 뒤를 따를 때까지 이곳에서의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리라는 믿음 - 그리고 그 믿음에 걸맞게 살아가는 것은 아직 이곳에 남아있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면 헛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늘 반반의 가능성으로 다가오는 오늘이라는 시간을 열심히 살아간다.

 

민숙아, 어디선가 읽은 이야기인데, 사람이면 누구나 다 메고 다니는 운명자루가 있고 그 속에는 저마다 각기 똑같은 수의 검은 돌과 흰 돌이 들어있다더구나.

검은 돌은 불운, 흰돌은 행운을 상징하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일은 이돌들을 하나씩 꺼내는 과정이란다. 그래서 삶은 어떤 때는 예기치 못한 불운에 좌절하여 넘어지고, 또 어떤 때는 크든 작든 행운을 맞이하여 힘을 얻고 다시 일어서는 작은 드라마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아마 너는 네 운명자루에서 검은 돌을 몇개 먼저 꺼낸 모양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남보다 더 큰 네 몫의 행복이 분명히 너를 기다리고 있을것이다.

 

또하나, 꼭 네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로키산맥 해발 3,000미터 높이에 수목 한계선 지대가 있다고한다. 이 지대의 나무들은 너무나 매서운 바람때문에 곧게 자라지 못하고 마치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한 채 서있단다. 눈보라가 얼마나 심한지 이 나무들은 생존을 위해 그야말로 무릎 꿇고 사는 삶을 배워야 했던 것이지.

그런데 민숙아,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바로 이 '무릎 꿇은 나무'로 만든다고 한다.

 

내가 살아 보니까 내가 주는 친절과 사랑은 밑지는 적이 없다.

내가 남의 말만 듣고 월급 모아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한것은 몽땅 다 망했지만,

무심히 또는 의도적으로 한 작은 선행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에 고마움으로 남아있다.

 

어차피 65억 인구 중에 내가 태어났다 가는 것은 아주 보잘것 없는 작은 덤일 뿐이다. 그러나 이왕 덤인 김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덤이 아니라, 없어도 좋으나 있으니 더 좋은 덤이 되고 싶다.

 

 

바닷가에 매어 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인다

풍랑에 뒤집힐때도 잇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

(김종삼  -어부-)

 

사람들이 '당신은 이제 영화 속의 슈퍼맨이 아니라 진짜 슈퍼맨이 되었다'라고 말할때마다 저는 무척 언짢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게 슈퍼맨이라면 그래요, 전 슈퍼맨이지요. 그러나 환상속이 아니라 현실속의 슈퍼맨이 되는 것은 너무나 힘겹습니다.

왜 저의 상처에도 역할이 주어져야 하는 지요.

 

이 글을 어떻게 마무리 할 수 있을까? 리브가 싫어해도 할 수 없다.

이 글을 마무리 할 수 있는 말은 단 한가지 - 과거에 그들이 환상속의 슈퍼맨이었다면 이제 그들은 진짜 슈퍼맨이 되엇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오래된 상처까지 이리저리 들추어내고, 그 상처가 없어질세라 꼭 끌어안고, 자신은 상처투성이라 아무것도 못한다며 눈물 흘리고 포기하는데 이들은 여전히 꿈과 희망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신마비 구족화가이자 시인인 이상열 씨가 쓴 '새해소망'이라는 시

"새해에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게 하소서."

 

어떤 여자가 중병에 걸려 한동안 무의식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 세상과 저세상의 경계선을 방황하고 있는데 갑자기 몸이 위로 붕 뜨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딱히 설명할 수 없지만 그녀는 자신이 하느님 앞에 서 있다고 확신 했다. 모습은 보이지 않고 어디선가 근엄하면서도 온화한 목소리만 들렸다.

"너는 누구냐?"

"저는 쿠퍼 부인입니다. 시장의 안사람이지요."

"네 남편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저는 제니와 피터의 어미입니다."

"네가 누구의 어미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저는 선생입니다.초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너의 직업이 무어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너는 누구냐?"

"저는 매일 교회에다녔고 남편을 잘 내조 했고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나는 네가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 네가 누구인지 물었다."

결국 여자는 시험에 실패한 모양이었다. 다시 이 세상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병이 나은 다음 그녀의 삶은 많이 달라졌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나는 이제껏 나만 보고 살았는데, 열심히 나를 지키고,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나만을 보살피며 살앗는데,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나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토마스 머튼이라는 신학자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의 참된 기쁨은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고 '자기'라는 감옥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창살 없는 그 감옥에 나를 가두고 온갖 타이틀만 더덕더덕 몸에 붙인채 아직도 내가 누군지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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