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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 개정판
이도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은 참으로 여러가지가 있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 연인의 사랑. 형제, 친구간의 사랑. 종교적인 사랑...
그래도 항상 인간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은 연인, 남녀의 사랑이 아닐까?
그 사랑에도 많은 변수가 존재하고 색깔이 다르고 방법이 다르고, 그래서 어떤 법칙이 존재할 수 없는, 그리고 설명하기 힘든 사랑들...
그 많은 사랑들이 모두 상처 받지 않고 무사할수 있을까?
작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네 사랑이 무사하기를, 내 사랑도 무사하니까.
라디오 작가 공진솔은 같이 호흡을 맞추게 될 새로운 피디소식에 민감해져있다.
나름 평판은 나쁘지 않지만 시집을 낸 적이 있는 피디라니, 작가로서는 꽤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닐수 없다.
하지만 서글서글하니 그리 깐깐하지도 않으면서, 감각이 있는 이건 피디와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차츰 그의 삶속에도 들어가게 되면서 어쩔수 없는 감정들이 생김을 알게 된다.
사랑...
그러나 건에게는 오랜 사랑이 있었다.
친구 선우와 연인인 애리.
선우는 언제나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그를 바라보는 애리는 항상 조금은 외로와할수 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주는 건이의 모습을 진솔 또한 바라보고 있다.
"...우울해 보여요, 많이."
"그렇긴 하죠. 이유는 다르지만."
"애리씨 때문에?"
그가 멈칫, 하더니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지만 진솔은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응시했다. 복잡하고 미묘한 기색이 건의 눈빛을 스쳐가더니 이윽고 그는 희미하게 나무라듯 웃었다.
"당신, 파울이야."
그러나 건이 또한 진솔을 향한 마음이 단순한 친구 관계는 아님을 느껴가게 된다.
"그래서 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 진솔 씨는, 나한테 일기장 같은 사람이에요."
"...일기장?"
"표현이 좀 그런가? 아무튼 어제도 이화동 우리 집까지 강제로 데리고 갔었지, 오늘도 당신이랑 마무리가 안 되니 뭔가 허전했지. 수첩에 몇 줄 적는 것처럼 꼭 진솔씨한테 하루를 정리하게 되잖아요. 요즘 계속 그랬으니까."
마침내 진솔은 용기를 내어 건에게 자신의 사랑을 말한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말들이 사람의 의지를 이기고 수면으로 떠오르는 것일까. 진솔은 가슴에서 넘쳐 오르는 안타까움으로 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는 무심히 돌아보았다. 거의 눈썹이 의문스럽게 올라갔다. 저도 모르게 말이 되어 나오는 것처럼, 진솔은 그를 응시한채 입을 열었다.
"나요...할말이 있어요."
그도 잠자코 그런 진솔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자...당신 사랑해요."
아, 이런 믿기지 않는 순간에도 산의 공기는 얼마나 맑게 느껴지는지. 바람은 또 얼마나 선선하고, 가을 기운은 왜 이렇게도 마음을 싸-하게 만드는지.
그러나 건은 진솔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시간을 달라고 한다.
진솔 또한 기꺼이 그를 기다리기로 마음을 먹는다.
건은 애리에 대한 마음도 진솔에 대한 마음도 정의를 내릴 수가 없다.
그러나 애리는 바라볼수 밖에 없는 존재.
아마도 진솔에 대한 마음이 사랑이 아닐까 스스로에게 되뇌인다.
"요즘 항상 같이 지냈죠. 낮엔 일터에서 만나고, 퇴근하면 둘이 시간 보내고, 당신 원고 쓰는 시간까지 뺐는 줄 알면서. 오늘 아침도 오피스텔을 나올때 부터.... 진솔씨 하고 싶었던 거, 하나는 같이 해주고 싶다 생각했어요. 그 다이어리에 적혀 있던 것 중에서, 젠장."
"사랑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게 사랑이 아니면 또 뭐란 말이야."
진솔또한 사람에게는 각자의 사랑이 있는거라 생각한다. 모두 같을 수는 없다고.
꼭 말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다시 생각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라고. 사랑에는 여러 모습이 있고, 모든 사람의 사랑이 다 같은 모양, 같은 색깔일 수는 없을 테니까. 건에겐 그의 보폭과 속도가 있는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또 다시 바람과 같은 선우에게 상처를 받는 애리를 보는 건은 그만 진솔 앞에서 애리에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게 되고, 그일로 진솔은 건에 대한 마음을 접기로 한다.
"그렇게 오래 기다려야 할 만큼 생각할 게 많다면, 그렇게 오래 들여다봐야 비로소 알게되는 감정이라면, 번번이 그 사람이 아플때마다 당신 마음도 같이 아파서 미치겠는 거라면.... 그건 아니거든요.... 나 아니면 안 되는 꼭 내가 필요한, 그런 절박한 감정은 아니거든요. 그냥, 당신은 내가 좋겠죠. 인간적으로."
혼란스럽고 실망스럽고 절망 가운데 있는 진솔에게 건의 할아버지는 말한다.
"사람이 말이디... 제 나이 서른을 넘으면, 고쳐서 쓸 수가 없는 거이다. 고쳐지디 않아요."
"보태서 서야 한다. 내래, 저 사람을 보태서 쓴다...이렇게 생각하라우. 저놈이 못 갖고 있는 부분을 내래 보태줘서리 쓴다.... 이렇게 말이디."
건과 진솔은 자신의 사랑을 알 수 있을까? 찾을 수 있을까?
네 사랑이 무사하기를
내 사랑도 무사하니까
세상의 모든 사랑이, 무사하기를
방금 쓴 문장은 말이 안된다. 세상의 모든 사랑이 무사할 수 있나? 그렇지 않다. 서로 부딪치는 사랑, 동시에 얽혀 잇는 무수한 사랑들. 어느 사랑이 이루어지면 다른 사랑은 날개를 접어야만 할때도 있다. 그 모순 속에서도 사랑들이 편안하게 아침을 맞이하고, 눈물 흘리더라도 다시 손 붙잡고 밤을 맞이하기를 바라는 건 무슨 마음인지. 무사하기를. 당신들도 나도, 같이.
참으로 오래간만에 한번 손에 붙잡았다 놓지 않은 책이었다.
무엇보다 요즘같지 않은 아날로그적인 사랑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첫눈에 뿅~~~가서 즐겁고 진하게 즐기다가 왠지 짜릿함이 없어지면 그냥 쿨하게 헤어지는, 그런 사랑이 아니어서 너무 좋았다.
이것이 사랑일까? 알 수 없어서 나름 부인도 해보고, 아닌 척도 해보다가
그래도 이것이 사랑임을 깨닫고는 상대방의 속도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내가 받을 사랑만 계산하는 것이 아닌 상대방이 주려하는 사랑도 가늠하고 배려하는 그런 모습이 아름다왔다.
특히 건이 할아버님의 말씀은 정말 명언이시다.
우린 항상 내가 받을 사랑만을 생각하며 산다.
사실 인간의 사랑이란 받은만큼만 사랑하게 되어있다. 원래 인간이란 존재는 원래 이기적이니까...^^
그래도 내가 해줄수 있는 사랑을 생각하며 사는 것도 인간이다.
보태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은,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모두에게 정말 필요한 말일지 모른다.
각자의 사랑의 색깔과 모양이 다르듯이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보태가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네 사랑이 무사하고 내 사랑도 무사하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만큼 사랑의 과정도 빠르게 지나가는 요즘,
사랑을 하고있는 사람들과, 사랑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 사랑을 계속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람들이 모두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나의 아이들도 이렇게 진실하면서 조금은 느릿한 사랑을 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작가가 남자이면서도 나름 여자의 심리를 잘 이해하며 썼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만 그리 수려한 문장체는 아니다. 문학적 가치를 가질만한 문장이나 글귀들을 찾아낼 수는 없었지만,
빨려들게하는 구성은 탁월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전체적인 호흡이 빨랐던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의 심장속도와 같은 템포로 진행되는 살짝 걷는 듯한 진행이 오히려 날 편안하게 읽게 해주었다.
사실 요즘 내가 읽었던 소설의 대부분이 읽다보면 누가 말하는 것인지 알수가 없을 정도로 왔다갔다,
나중엔 손으로 짚어가며 이건 누가 말한거, 이건 누가 말한거, 이러면서 읽었던 터라
내 흐름에 딱 맞는 책이라 너무 반가웠다.
다 읽고 났더니 마음에 남는 잔잔한 따뜻함도 좋았다.
이 책속에서 재미있었던 한 귀절.
'생각날 때 마다 마셨더니
이젠 마실 때 마다 생각나네 시팔'
선우와 애리의 가게벽에 남아 있던 낙서의 한구절이다.
너무나 마음에 와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