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죽을 수 있게 해줘 - 스캇 펙 박사가 현대인에게 던지는 자살과 안락사에 대한 메시지
M. 스캇 펙 지음, 조종상 옮김 / 율리시즈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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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시설의 놀라운 발전으로 인간의 생명은 끊임없이 연장되어 왔다.

그에 따라 우리의 의지에 반해 이어지는 생명의 연장 문제도 같이 논의되어 온다.

전에는 그저 죽음을 맞이 할수 밖에 없는 질병도 놀라운 의료기술로 생명이 연장되고 치유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때는 과연 이것이 치유의 과정인가, 그저 같은 상태의 연속선상에 놓이는 것은 아닌가 하는 기로에 설때도 있다. 그 끝을 알수 있으면 좋으련만 우리는 아무도 그 결말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런 상황이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안락사라는 주제는 복잡하다. 심지어 안락사의 일반적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안락사란, 오로지 환자나 죽어가는 누군가에게 의사나 가족중 한 사람이 행하는 하나의 행동일까? 또는 환자나 죽어가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자신을 죽이는 행위에 사용되는 용어일까? 안락사에는 환자의 동의가 필요한가? 또 가족의 동의는 어떠한가? 안락사는 다른 평태의 자살 및 살인과 분리될 수 있는가? 단순히 생명유지장치의 플러그를 뽑는 것과는 어떻게 다른가? 환자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과도한 조치 사용의 제한이 안락사의 한 종류라면 과도한 조치와 일반적 조치의 차이점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안락사와 고통의 관계는 어떠한가? 육체적 고통과 정서적 고통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는가? 고통의 정도는 어떻게 평가 하는가? 무엇보다도 윤리적인 문제가 왜 관련되며 윤리적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지은이는 민감한 안락사의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 또한 이 질문에 심각하게 고민하고, 고뇌한다.

그것은 지은이의 죽음에 대한 두가지 경험담 때문이었다.

펙 박사는 자신의 할머니가 위중한 상태에서 각종 의료적 행위의 도움을 받아 생명을 연장하게 되는 것을 보고 회의를 느꼈었다. 연세도 드시고, 약간의 치매 증상까지 있으신 분에게 그런 의료적 행위로 삶을 연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모든 치료를 이겨내시고 건강을 찾으셨다.

이후 5년동안 할머니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으며 투정을 부리거나 불평하는 일도 없었다. 할머니는 언제나 행복해 보였고 재치나 유머감각도 그 어느때보다 좋았다. 그러므로 나는 의사들이 할머니를 살리기 위해 정맥 절개술을 감행하고 당시 내게는 과도한 조치로 보였던 방법들을 사용한것에 대해 감사할 수 밖에 없다.

다음의 한 예는 거의 신체적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어 각종 약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 로저라는 환자의 경우다. 펙 박사는 하루가 다르게 신체가 죽어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며 이렇게 고통스럽게 로저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과연 그를 위한일일까 하는 회의가 든다.

과장이 기계를 가지고 나간후 나는 거의 15분동안 토니를 쳐다보며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그러고는 다시 일어나서 정맥 주사기 튜브의 죔쇠를 조절하여 주사액 유입량이 반으로 줄어들도록 했다. 거의 들이붓다시피하던 주사액은 이제 빠른 속도로 방울져 떨어지는 정도가 되었다. 그런 다음 나는 의사 휴게실로 가서 담배 한대를 피웠다. 10분이 채 안돼서 병실로 돌아왔을때 토니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지은이의 손으로 로저의 생명선을 끊은것이다.
과연 펙 박사는 안락사에 대해 찬성의 입장을 가지고 있는것일까?
우리들은 모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사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이 옳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죽음 맞을 때 심한 육체적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려움은 안락사 운동을 촉진 시키는 역할을 한다.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는 과정이 오로지 공포스럽고 길며 쓸데없이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전에 스스로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건 합리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공포증의 대부분은 이런 기본적인 생존적 두려움에 기인한다. 인간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 두려움은 의식적 존재인 인간의 고유한 고통이다. 그러나 이 두려움을 어떻게 다룰것인지는 선택의 문제다.

이런 점에서 펙 박사는 현대의 의료인들이 환자에 대한 고통에 너무나도 둔감함을 지적하고 있다.

진단이 끝나면 서둘러 통증을 안전하게 줄일 수 있도록 약을 처방해야 한다. 만약 의료진이 환자의 극심한 통증을 쓸데없이 오래 지속되도록 놓아두게 되면 환자를 고문하는 것과 다름없는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통증에 대해 적절한 처치를 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 가장 널리 자행되는 의료 범죄다.

그러나 펙 박사는 여러가지 면에서 안락사를 찬성하지는 않고 있다.

나는 안락사를 비판하는 두가지 이유를 서술했다.

하나는 명백히 신학적이며 보통 모든 자살과 관련된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창조자이자 양육자인 하느님이 우리의 삶에서 우리 자신만큼 상당한 이해당사자가 된다는 것이다. 자유의지가 있는 피조물로서 우리에게는 스스로를 죽일수 있는 힘이 있다. 그렇게 할 윤리적, 도덕적 권리가 있느냐에 관한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자살을 통해 인간은 자신에게 삶을 부여한 자와 관계없이 자신의 죽음의 때를 결정한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부정이자 그 영혼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부정이다.

안락사를 비판하는 또 다른 이유는 신학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특별히 내가 정의했던 안락사와 관련된다. 우리는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는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것들을 배운다. 그러나 늙어가고 죽는 과정에 수반되는 생존적 고통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죽이는 행위는 스스로 그 배움의 길을 막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그런 학습의 기회를 설계한 하느님을 속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종교적인 이유가 주된것이긴 하지만 그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의지와 선택권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실명이나 그밖의 질병, 노화나 죽음을 축복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기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그러자면 대단한 의지가 필요하다.

하느님은 우리는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다른 어떤 것보다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선 또는 악을 선택할 수 있다. 심지어 하느님도 인간의 의지를 반영하여 치유한다.

아내와 나는 둘 다 낙태를 찬성하지만 버스라이트라는 단체에도 약간의 후원금을 보내고 있다. 버스라이트의 목적은 낙태한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낙태를 선택하지 않도록 여성들을 지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단체에 가입한 이유는 선택권을 믿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책의 목적도 바로 그러하다. 안락사를 선택하거나 심지어 이를 돕는 사람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연사의 선택을 장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선택을 한다는 것을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옳은 결정이라고 누가 확신할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이문제에 대해 단숨에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많이 생각하면서 각자의 의지와 선택권을 넓혀가야 한다.

안락사의 논의가 뜨거워지면 뜨거워질수록 사회는 건설적이면서도 빠르게 두 근본적인 문제를 더욱 쉽게 공론화 할 것이다. 그 문제 중에 하나는 결점 많고 예측 불가능한 미국 의료의 특성으로서 특히 통증 관리와 자연사를 돕는 일에 관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세속주의다. 만약 이 두가지 병폐를 뽑을 수 있게끔 사회를 자극할 수만 있다면 안락사 논의는 커다란 희망의 불씨가 되는 셈이다.

나 또한 이 책을 읽으며 안락사나 자살을 이해, 찬성한다거나, 반대한다는 그런 입장을 정리하게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어느 한 쪽을 택한 사람들을 비난 하지는 않게 된것 같다. 물론 자신의 선택에 대해 신중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약간의 분노감(공인인경우 그것에 대한 파장을 생각해)도 일어나기는 하지만 일방적인 나의 잣대로 바라보는 것은 잠깐 멈추게 될것 같다.

그리고 내가 만약 나의 상태에 대해 이런 판단을 해야 하는 때가 온다면 나 또한 힘들고 고통스럽게 생명을 연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결정이라면 쉽게 판단하기 어려울것 같다.

그래서 평소에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본다.

 

이 책은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자살과 안락사에 대한 문제를 지은이의 전문적인 분야를 살려 잘 풀어나갔다고 볼수 있다.

다만 전체적인 내용이 조금 산만하여 정리가 잘 안되고 맥이 끊기며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것은 지은이의 오랜 경험을 통한 수많은 사례들이 읽는이의 이해를 도와주는데 많은 역할을 했고, 그 사례들이 상당히 재미있었다.

지은이의 주장은 마지막 까지 읽지 않으면 무엇을 즉, 안락사에 대한 찬성인지 반대인지 알수가 없도록 모호하다.

물론 이 주제가 단칼에 무 자르듯이 말할수 있는 주제는 아니지만...

그래서 지은이 또한 많은 예외와 개인의 선택에 자율성을 두며 말하기도 했다.

또 지은이의 종교성때문에, 그리고 지은이의 주장은 이 종교성에 무게를 많이 두고 있기에

이 책의 뒷부분은 상당히 종교적이다.

그러나 책 표지 어디에도 그런 내용을 가늠할수 없기에

같은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다 보면 뒷부분에서 조금 난감해 할것 같다.

그래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조금은 고민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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