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황무지
S. A. 코스비 지음, 윤미선 옮김 / 네버모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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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황무지 (네버모어, 2021년)

#당신의머리속에깊숙한펀치를날릴

저는 이 책을 2022년에 읽었고, 그 해에 읽었던 가장 뛰어난 장르소설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리뷰를 쓰기 전 다시 한 번 발췌독 했는데, 처음 읽을 때 느꼈던 찐득한 감정들이 다시 잘 배어 나왔고 좋은 소설이라는 느낌을 또 한번 받았습니다. 미국에서 2020년 발간되었고, 원제는 'Blacktop Wasteland'입니다. Barry Award for Best Novel (2021), Anthony Award for Best Novel (2021), ITW Thriller Award for Hardcover Novel (2021) , Los Angeles Times Book Prize for Mystery/Thriller (2020)를 포함한 여러 어워드에 지명당하거나 수상하였습니다.


'누와르'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프랑스어로 검다는 뜻으로, 정확히 나누기를 어렵지만 비슷한 성향을 가진 일군의 필름 무리를 뜻합니다. 이 책을 가만히 읽다 보면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질감, 폭력적, 잔임함이 기본적으로 깔려있으며, 배경은 깜깜할 것 같고, 등장인물의 주위 이곳저곳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죠. 이런 특징이나 색채는 이 책의 이질감들에 통일성을 주고, 고유의 특징이나 즐거움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소설은 누와르라고 결론 내릴 수 있었습니다. 해외의 유명 서점 사이트에서도 비슷한 성향의 작가인 '돈 윈슬로'나 '데니스 루헤인'과 같은 카테고리로 추천을 하고 있더군요. 일부 기사에서는 직접적으로 누와르 소설이라고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비슷한 결론에 이른 거겠죠.

이 소설의 놀라운 점은 처음 몇 페이지에 넘어서면서 이미 완벽한 매력을 담아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단편소설과 같은 자동차 경주로 시작하는데요. 짧은 분량 안에는 시원한 엔진 소리, 주인공의 손쉬운 승리, 이어지는 배신과 반전, 배신자에 대한 처참한 복수 등이 잘 나타나서, 이미 이 소설의 분위기, 인물, 매력을 독자에게 환하게 보여줍니다. 뒤이어 이어지는 주인공 '보러가드'를 통해 이뤄지는, 가족을 위한 정의, 배신에 대한 복수 같은 단순한 스토리에 독자는 스르륵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 소설은 가독성 높은 흐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루할 새 없이 여러 등장인들이 번갈아 가면서 주인공의 뒤통수를 날립니다. 조금 괜찮아 싶은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르거나 범죄에 연루됩니다. 모든 인물이 매력적이지만 또한 너무 빠르게 사라지죠. 이토록 주변 인물을 혹사해서야 두 번째 시리즈는 기대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입니다. 주인공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쿠엔티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처럼 무차별적으로 폭력과 살인이 발생합니다.

보러가드 ‘버그’ 몽타주, 미국 동부 해안을 무대로 은행 강도나 보석가게 강도 도주차량 운전에서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드라이버인, 그는 과거를 청산하고 고향인 버지니아의 레드힐카운티에서 아내 키아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살며 정비소를 운영하고 현재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동네에 경쟁 대형 정비소가 들어서자 보러가드는 점점 생활고에 시달린다. 월 매출은 월세를 낼 돈에 턱없이 부족하고, 몇 달을 밀린 은행 대출, 십 대 시절에 낳았던 딸의 대학 등록금 문제, 그리고 요양원에서 쫓겨나기 일보 직전에 놓인 어머니까지. 보러가드는 불법 자동차 경주에 나가서라도 돈을 벌려고 하지만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

그런 보러가드에게 예전에 같이 일한 적이 있는 로니와 레지 형제가 찾아와 상당한 금액의 보석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고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한다. 벼랑 끝에 몰린 보러가드는 다시 한번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마지막 단 한 번이라고 생각하며 보러가드는 보석가게 강도 계획에 참여하기로 한다. 사상자가 생기면서 처음부터 삐꺽거렸던 그들의 범죄행각은 보러가드의 기지와 능력으로 성공하지만, 보석가게 강도 사건은 보러가드에게 큰 시련을 안겨 줄 악몽의 시작이 된다.

검은 황무지 줄거리 (출판사 제공)

제가 읽었던 그 어느 소설보다 차 레이싱에 대한 진심이 느껴지는 책입니다. 이토록 모래, 흙먼지가 날리는 묘사까지 생생하게 이루어졌던 소설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이 미국에서 데뷔했을 당시 스티븐 킹, 마이클 코넬리, 데니스 루헤인 등 최고의 거장들이 앞다투어 이 책을 추천했는데요, 장점으로 미뤄볼 때, 여러 장르소설 대가들의 칭찬은 진심이라고 생각들더군요.

과격한 액션신, 다이내믹한 구성을 선호하는 독자라면, 또는 피카레스크 장르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책을 반드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반면 휴먼 코미디를 선호하는 독자거나, 편안한 독서활동을 원하고, 민병대 소설에 알레르기가 있는 독자들이라면 절대 읽지 않는 것이 좋겠죠.

문장 자체가 좋았을 거라고 생각 들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번역은 평균적인 수준입니다. 소설이 주는 즐거움을 방해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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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채에 미쳐서
아사이 마카테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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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야채에 미쳐서 (북스피어,2020년) / 원제, すかたん (2012)

1년 정도, '책하고 놀자'라는 라디오를 들었습니다. 그중 가장 애청했던 프로그램은, 토요일 코너인 '책 만드는 김홍민의 어둠의 책방'이었습니다. 이 책 또한 김홍민 님이 소개했던 책입니다. 여러 소설을 감칠맛 나게 추천해 주던 프로그램이었는데, 2022년 4월 16일을 마지막으로 호스트가 변경되었습니다. 물론 라디오 다시 듣기가 가능합니다.

작가의 이력이 특이한데요. 1959년 오사카에서 태어났으며, 전업주부로 소설가의 꿈을 키우다가 50세의 나이에 <実さえ花さえ、この葉さえ>로 소설현대장편 (小説現代長編) 신인상을 받으며 데뷔하였고, 2013년에 발표한 <恋歌(연가)>로 나오키상을 수상하며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지만, 가파르게 출세를 시작한 거죠. 이 소설은 2012년 발표된 소설입니다. 주인공 남녀의 로맨스가 열정적으로 묘사되기보다는, 오랜 시간 은근히 달여 완성된 탕약 같은 느낌을 주더군요. 이는 적지 않은 나이에 등단한 작가의 배경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혹은 작가의 성격이 차분하고, 조곤조곤 말하는 성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로맨스 소설 마니아가 아닌지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빠르게 읽을 수 있고 재미있는 소설이더군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이 소설 자체가 가지고 있는 로맨스의 색깔이 희미하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로맨스에 치우쳐 있기는 하지만 '뼈대만을 평가하자면, 경제 소설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부분들에서 비 로맨스 장르의 느낌을 물씬 주는 소설입니다. 남자 주인공인 '세이타로'는 가난한 농부들의 직접 판매 루트 확보를 위해 다양한 위협을 무릅씁니다. 번번이 주인공을 가로막는 기득권들을 설득하는 작업이 여러 단계에 걸쳐 중요하게 이야기됩니다. 이런 주인공의 시력 극복은 마치 경제 소설의 그것과 같은 재미를 우려냅니다. 사건이 점차 해결되면서 처음에는 단점이 부각되던 남자 주인공의 성격은 점차 호감으로 바뀌어 갑니다. 그렇게, 여자 주인공의 마음도 자연스럽게 변화하는데, 독자로서 납득이 가는 과정으로 여겨지더군요.

역사물을 자주 쓰는 작가답게 일본의 역사를 현대식으로 가져왔음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더군요. 마치 시끌시끌한 시골 분위기처럼 이야기를 잘 어루만져, 결과적으로 따뜻한 목가 소설로 만드는 재주가 출중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자 주인공이 기존 소설의 주인공과 같이 수동적이지 않은 점도 장점이었습니다. 여자 주인공인 '지사토'는 극의 전개에 중요한 전설의 야채 복원에 주요한 힌트를 제공하고, 협상을 위한 담판에서 전 남편의 인맥을 적절히 활용합니다. 또 채소를 키우면서 유발하는 소소한 즐거움이나 여러 야채의 맛을 시각화하는 재미를 주는 것도 여자 주인공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물론 당시의 역사에 비추어, 무사 집 과부와 청과상 큰 아들의 로맨스가 얼마나 현실 고증이 된 건지는 모르겠더군요. 소설 내에서는 이들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인 분위기 전혀 없었지만, 만약 조선시대라면 누구라도 반대했을 커플이라는 생각은 들더군요. 뭐, 제가 에도시대 풍속 전문가는 아니지만요.

전국의 쌀과 야채가 모이는 ‘천하의 주방’ 오사카. 이곳의 야채 유통을 독점하던 상인회는 먹고살기 위해 직접 재배한 야채를 팔려는 농부들을 탄압한다. 가난한 농부들의 목소리를 듣고 불합리한 구조를 타파하여 야채시장을 개혁하고자 나타난 남자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세이타로, 공교롭게도 상인회 대표의 큰아들이다.

오사카에 부임한 남편을 따라 내려온 에도 토박이 지사토는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떠나자 근근이 생활하다가 상인회 대표의 마나님을 시중드는 하녀로 일하게 된다. 힘든 일과 중에도 유일한 낙이라면 오사카의 맛있는 음식을 삼시 세끼 맛보는 것뿐이다. 그러던 중 뭘 하든 제멋대로인 큰아들 세이타로에게 휘말린다.

처음에는 경계하던 지사토는, 얼간이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야채에 미쳤다’는 평을 듣는 세이타로에게 어느샌가 끌리게 된다. 세이타로의 말처럼 막부의 보호를 받는 상인회의 독점을 타파하고, 야채시장의 유통구조를 바꿀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지금은 사라진 전설의 야채를 되살려낼 수 있을까?

야채에 미쳐서 줄거리 (출판사 제공)


일본 에도시대라는 #다소희귀한배경의 로맨스소설 에 호기심이 동하는 분이라면 좋아할 만한 소설입니다. #끈적거리지않는저수위로맨스소설마니아 들에게도 좋은 소설 일 수 있겠군요. 또,<한자와 나오키>같은 경제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던 독자들에게 의외로 통하는 선택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면 야채, 가드닝에 관한 팁은 평이하거나 주요 소재로는 다루어지지는 않으니, 식물이나 야채에 관련된 상식을 추구하는 독자라면 비추하겠습니다. (실제로 그런 의도로 이 책을 구입했던 독자들이 실망스럽다는 리뷰를 쓰기도 했더군요.) 소설 속 이야기는 역사에서 있었던 사건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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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아말 엘-모흐타르.맥스 글래드스턴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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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황금가지,2021년)

맥스 글래드스톤 과 아말엘모흐타르의 SF 소설입니다. 책의 정보를 이것저것 찾아보던 중 흥미로운 이슈를 발견했습니다. 이 책이 발간 3년 후에 갑작스러운 역주행을 통해 주목받게 된 책이라는 거죠. <Trigun (트라이건)> 이라는 일본 만화가 있는데요. 특이하게도 일본에서는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북중미에서 상업적으로 대 성공을 거둔 만화입니다. 이 만화의 팬인 bigolas dickolas wolfwood라는 사람이, 트라이건 팬계정에 2019년 출시된 이 책을 즉시 구매할 것을 암시하는 트위터를 올렸고, 실제로 많은 독자들이 즉시 구입을 진행함으로써 역주행 열풍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 소설은 화제를 모으며, 2023년 아마존 베스트셀러에 오르기까지 했다더군요.

이 책은 서간체 소설의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편지를 여러장 모아 만든 소설입니다. 일반적인 독자 대부분이 편지글의 형식을 지닌 소설을 몇 편 읽어보지 못한게 사실이죠.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베르터의 슬픔>이나 '미나토 나가에'의 <왕복서간> 같은 책들이 있지만 보편적인 형식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서간체 소설의 매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담은 책이라면 <젊은 베르터의 슬픔>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화자의 자기 고백적 문장들은 그 나이대의 풍부하고 무모한 감정을 극대화 시킴으로서. 독자에게 따뜻함과 좌절을 오가는 양가적인 감정을 잘 전달합니다. 그럼으로써 사랑에서 죽음으로 이르는 극단적 과정을 효과적으로 납득시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서간체 소설들이 쉬이 잊히거나, 기억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설속 독특한 이야기 방식을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거나, 효과적인 전달체계보다는, 작가의 우월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주요 원인이라고 늘 생각해 왔습니다. (주관적인 생각일 따름이지만) 서간체 소설 같은 독특한 형식의 글을 읽을 때면 '오~ 내가 어떻게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한 권의 소설로 발전시켰을까.' 같은 닭살 돋는 생각을 하는 작가의 모습이 떠오르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 소설 또한 기존 서간체 소설의 단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느낌을 주더군요. 이 소설은 조금씩 고조되는 감정들의 미묘한 변화며, 돌변하는 시점 등을 동시에 다루어야 하는 연애 소설이면서, 배경에 대한 여백이 많은 상태로 등장하는 SF 소설입니다. 그런데 작가들은 진행에 시적 표현이나 난해한 문장의 활용을 아끼지 않습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모든 상황이 이해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만 작용하더군요.

따라서 이 소설이 어렵다거나 , 지루하다거나, 재미가 없다면 그건 독자의 잘못이 아닙니다. 작가가 의도한 것에 가깝죠. 제 입장에서는 장점이 별로 없는 소설이었습니다. 다만 번역이 엉망이라고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적잖은 공을 들였을 것 같은 번역이 이 책의 거의 유일한 장점일지도 모르겠네요. 문학적으로 가치 있는 서간체 소설이라면 <젊은 베르터의 슬픔>을 한 번 더 읽는 게 좋을 것 같고, 진정한 재미를 주는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이라면 존 스칼지의 <노인의 전쟁>을 한 번 더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소설은 위의 두 소설의 장점을 합쳤다기보다는, 위의 두 소설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단점이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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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핏 쇼 워싱턴 포
M. W. 크레이븐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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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핏 쇼 (위즈덤하우스, 2023년)

#연쇄살인자의살인은정당한것이고중범죄자들은불태워서죽여도좋습니다?

한때, NCIS라는 미국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았었는데 캐릭터 간의 궁합이 뛰어난 드라마였습니다. NCIS에서도 주인공 '깁슨(마크 하몬역)'과 법의학자 '애비슈토(폴리 페럿 역)'의 연기 호흡은 백미였습니다. 실행력과 직감이 뛰어나며 카리스마 있는 깁슨과 그가 총애하는 천재 법의학자(그리고 고스족) 애비슈토와의 관계는 마치 사이좋은 부녀관계처럼 비추어지곤 했었죠.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 서로를 성장시키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관계였던 둘의 관계는 긴 시리즈 내내 구성원 간의 끈끈함을 설명해 주는 상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이 <퍼핏 쇼>라는 소설은 깁슨과 애비만 따로 떼어내 진행되는 형사 소설 같은 느낌을 주더군요.

Puppet 은 꼭두각시를 의미하는 단어로, 원제인 <puppetshow> 란 인형극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소설을 읽기 전, 제목과 줄거리에서 예상되는 이 글의 스타일은 고어한 범죄물이었습니다. <꼭두각시 살인사건>, <법의관>시리즈처럼 살인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질식할 것 같은 압박에, 공포 소설의 아우라를 뿜어내는 그런 소설 말이죠. 실제로 이 소설 속 살인 또한 끔찍하면서도, 기괴한 방식으로 발생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의 분위기가 무겁지는 않습니다. 특정한 순간을 제외하고 이 소설은 적당히 무거운 수사물 같은 느낌을 주더군요. 여기에는 사회 부적응자인 틸리가 자신을 지지해 주는 사람들을 만나 성장하는 이야기에서 우러나는 따뜻함이나, 포의 시니컬함에 자연스럽게 깃들어 있는 유머러스한 대사 같은 부분들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영국 컴브리아 지역의 선사 유물 ‘환상열석’에서 불에 타 죽은 시신이 연달아 발견된다. 두 번째 시신이 발견된 이후 중범죄 분석 섹션이 수사에 참여하고, 곧이어 발견된 세 번째 시신을 조사하던 중 충격적인 자료를 획득한다. 시신의 몸에 정직된 경관 ‘워싱턴 포’의 이름이 새겨져 있던 것. 중범죄 분석 섹션의 경위 ‘스테퍼니 플린’ 은 포가 다음 희생자가 될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포의 업무 복귀를 결정한다. 한편 환상열석에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에 태워 죽이는 잔혹한 수법 때문에 이 연쇄살인범은 이른바 ‘이멀레이션 맨’으로 불린다.

포는 이멀레이션 맨 검거를 위해 업무에 복귀하고, 시신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한 천재 데이터 분석가 ‘틸리 브래드쇼’를 만난다. 뛰어난 두뇌를 지녔지만 경악스러울 정도로 사회성이 부족한 틸리는 부서에서 따돌림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뛰어난 능력에 주목한 포는 틸리를 자신의 수사팀으로 끌어들인다. 이렇게 워싱턴 포와 틸리 브래드쇼, 스테퍼니 플린과 또 다른 경관 킬리언 리드까지, 이멀레이션 맨을 잡기 위한 수사팀이 꾸려졌다. 수사팀이 서서히 합을 맞춰가는 와중에 네 번째 희생자의 시체가 발견되고, 전대미문의 연쇄살인은 끝없이 미궁에 빠져든다. 네 명의 피해자들, 그리고 다섯 번째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포와의 연결 고리를 찾으려는 가운데 수상한 우편물 하나가 포에게 도착한다. 평범한 갈색 봉투 안에 든 것은 흔한 엽서 한 장. 엽서에 적힌 짧은 메시지는 사건을 다시 원점으로 돌린다.

사건의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감당하기 힘든 이멀레이션 맨의 정체가 드러나고, 포는 사건의 어둠보다 더욱 어두운 자신의 과거에 다가선다.

퍼핏 쇼 줄거리 (출판사 제공)


한 명은 직관이 뛰어나지만 과도한 행동력을 가진 돌 아이 형사, 또 다른 한 명은 뛰어난 천재 법의학자지만 사회생활 부적응자, 이렇게 두 명의 주인공이 나란히 극을 이어가는 추리소설입니다. 어쩌면 새로운 방식이라고 할 수는 없겠죠. 이미 여러 소설이나 티브이쇼에서 이런 조합이 효과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퍼핏 쇼>는 정석에서 크게 벗어남 없이 순탄하게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포는 틸리의 재능을 통해 자신의 직관력을 뒷받침해 주는 단서를 확보하고, 사회 부적응자였던 틸리는 정의로운 포를 통해 인간적인 성장을 거듭합니다. 이렇게 캐릭터가 쌓이는 과정과 기만 없는 반전은 이 소설의 장점입니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이 소설의 메시지가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퍼핏 쇼>에서 연쇄 살인은 '살인에 대한 욕구'보다는 복수심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제목인 <퍼핏 쇼>가 의미하는 인형극은, 소설을 다 읽은 시점에서 다시 보았을 때 주인공으로 느끼고 이입했던 인물들이 사실상 살인사건의 배경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 소설 속 살인범의 사연은 끔찍하고 동정받을 만합니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단 한 건의 살인사건도 막지 못했는데다가, 심지어 이야기가 끝나는 그 순간에도 살인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에 불과하죠. 주인공의 기지나 추리에 의해 살인사건이 멈춰진다거나 늦춰지지 않고, 주인공의 행동은 범인에게 실마리를 주게 되거나, 복수와 관계없는 타인을 위험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과장된 주장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소설은 살인범을 찾아가는 추리만큼이나, 성공적인 복수에 대한 이야기에 중점을 두고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이는 마치 '연쇄 살인자의 살인은 정당한 것이고, 중범죄자들은 불태워서 죽여도 좋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대변하는 이야기꾼을 만난 것 같은 느낌입니다. 어쩌면 누군가한테는 그것도 괜찮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추리 소설이란, 권선징악이 기본이고, 심지어 악당이 민병대(혹은 자경단)일 때에도 마찬가지로 법의 심판은 피할 수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꼰대 독자 쪽입니다.

살인범은 심각하게 불우한 과거를 지니고 있고, 피해자들은 살인범의 과거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살인범에게 동정의 여지가 많고 피해자들 모두를 죽일 각오였다면, 이 소설은 자경단 (혹은 민병대) 소설로 서술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 소설은 경찰 주인공 캐릭터의 성장이나 살인사건의 해결에 초점을 맞추고 진행됩니다. 따라서 결말부에 이르른 독자의 입장에서, 경찰에 이입하기도 살인범에 이입하기도 혼란한 결말이라고 느껴지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 점이 이 소설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추리 소설적 측면에서 봤을 때 결론이 독자를 기만하는 타입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기만적 >> 후보군에 없던 범인이 갑자기 나타남) 다만,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충격적인 참신함 또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저로서는 비호감에 가까웠지만, 이 소설의 호불호는 개인의 취향이 개입될 여지가 높겠네요. (이야기에 녹아있는 진한 사연과, 거듭되는 반전, 독특한 캐릭터가), 이야기의 구성이나 메시지보다 우선시 되는 독자라면 더 쉽게 만족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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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세상에서 커글린 가문 3부작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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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커클린가문 3부작 중 3편에 해당하는 소설입니다. 2편에 해당하는 '리브바이 나이트: 밤에 살다' 는 커클린 가문의 막내인 조 커클린의 성장기로, 그가 어떻게 암흑가 대부가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이 소설은 리브바이 나이트와 이어지며, 못다 한 조 커클린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소설이었습니다. 어둑어둑한 누아르 분위기 속에서도 무협지 영웅 같은 환한 면모를 뿜어내던 조 커클린은 3편에서는 침침한 느낌을 뿜어내는 인물로 변해갑니다.

2. 이 소설은 충격적인 반전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리브바이 나이트의 마지막에 슬쩍 언급됐던 에필로그 자체를 뒤집는 결론이었는데요, 독자가 소설 속 세계관에 대해 나름 쌓아올렸던 이야기를 통째로 무너뜨리는 충격적인 결론이었습니다. 이토록 잔인한 작가에 대한 증오심도 생겼지만, 타협의 순간이 지나가고 나면, 결국 비운의 영웅을 위한 묵념을 취하게 됩니다. 선행 독자로서 이 소설은 '리브바이 나이트: 밤에 살다'에 이어 두 번째에 읽어야 할 책임을 강조하고 싶네요. 그렇게 읽어야 더 큰 임팩트가 있습니다.

3. 성장, 의리, 조강지처 같은 비교적 보수적인 가치의 승리를 추구했던 전편에 비하여, 이 소설은 마약, 배신, 불륜 같은 순도 높은 악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습니다. 전편과 다르게 (도덕적 가치에 위배되는) 마약이나 폭력적 사건이 부각되는 건 사회 전체적인 변화와 연관 지어 생각하게 되더군요. (금주법 시대에서) 새로운 가치로 성공신화를 이룬 조 커클링의 몰락은 단순한 마피아의 이야기보다는, 미국 사회에 대한 풍자로 보는 편이 맞겠네요.

4. 데니스 루헤인은 데니스 루헤인이라는 생각이 드는 소설이었습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재미있었고, 마지막 반전과 이 글이 품고 있는 가치가 일반 소설 이상이라는 생각도 절로 들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이 책을 추천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반드시 리브바이 나이트에 이어 두 번째에 읽어야 할 책입니다) 이제 책장에 쌓여있는 '운명의 날'만 읽으면 커클린 가문 연대기도 끝이군요. 시간이 조금 필요한 일이지만 의미가 있는 일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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