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소설 마니아가 아닌지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빠르게 읽을 수 있고 재미있는 소설이더군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이 소설 자체가 가지고 있는 로맨스의 색깔이 희미하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로맨스에 치우쳐 있기는 하지만 '뼈대만을 평가하자면, 경제 소설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부분들에서 비 로맨스 장르의 느낌을 물씬 주는 소설입니다. 남자 주인공인 '세이타로'는 가난한 농부들의 직접 판매 루트 확보를 위해 다양한 위협을 무릅씁니다. 번번이 주인공을 가로막는 기득권들을 설득하는 작업이 여러 단계에 걸쳐 중요하게 이야기됩니다. 이런 주인공의 시력 극복은 마치 경제 소설의 그것과 같은 재미를 우려냅니다. 사건이 점차 해결되면서 처음에는 단점이 부각되던 남자 주인공의 성격은 점차 호감으로 바뀌어 갑니다. 그렇게, 여자 주인공의 마음도 자연스럽게 변화하는데, 독자로서 납득이 가는 과정으로 여겨지더군요.
역사물을 자주 쓰는 작가답게 일본의 역사를 현대식으로 가져왔음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더군요. 마치 시끌시끌한 시골 분위기처럼 이야기를 잘 어루만져, 결과적으로 따뜻한 목가 소설로 만드는 재주가 출중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자 주인공이 기존 소설의 주인공과 같이 수동적이지 않은 점도 장점이었습니다. 여자 주인공인 '지사토'는 극의 전개에 중요한 전설의 야채 복원에 주요한 힌트를 제공하고, 협상을 위한 담판에서 전 남편의 인맥을 적절히 활용합니다. 또 채소를 키우면서 유발하는 소소한 즐거움이나 여러 야채의 맛을 시각화하는 재미를 주는 것도 여자 주인공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물론 당시의 역사에 비추어, 무사 집 과부와 청과상 큰 아들의 로맨스가 얼마나 현실 고증이 된 건지는 모르겠더군요. 소설 내에서는 이들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인 분위기 전혀 없었지만, 만약 조선시대라면 누구라도 반대했을 커플이라는 생각은 들더군요. 뭐, 제가 에도시대 풍속 전문가는 아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