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채에 미쳐서
아사이 마카테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야채에 미쳐서 (북스피어,2020년) / 원제, すかたん (2012)

1년 정도, '책하고 놀자'라는 라디오를 들었습니다. 그중 가장 애청했던 프로그램은, 토요일 코너인 '책 만드는 김홍민의 어둠의 책방'이었습니다. 이 책 또한 김홍민 님이 소개했던 책입니다. 여러 소설을 감칠맛 나게 추천해 주던 프로그램이었는데, 2022년 4월 16일을 마지막으로 호스트가 변경되었습니다. 물론 라디오 다시 듣기가 가능합니다.

작가의 이력이 특이한데요. 1959년 오사카에서 태어났으며, 전업주부로 소설가의 꿈을 키우다가 50세의 나이에 <実さえ花さえ、この葉さえ>로 소설현대장편 (小説現代長編) 신인상을 받으며 데뷔하였고, 2013년에 발표한 <恋歌(연가)>로 나오키상을 수상하며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지만, 가파르게 출세를 시작한 거죠. 이 소설은 2012년 발표된 소설입니다. 주인공 남녀의 로맨스가 열정적으로 묘사되기보다는, 오랜 시간 은근히 달여 완성된 탕약 같은 느낌을 주더군요. 이는 적지 않은 나이에 등단한 작가의 배경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혹은 작가의 성격이 차분하고, 조곤조곤 말하는 성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로맨스 소설 마니아가 아닌지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빠르게 읽을 수 있고 재미있는 소설이더군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이 소설 자체가 가지고 있는 로맨스의 색깔이 희미하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로맨스에 치우쳐 있기는 하지만 '뼈대만을 평가하자면, 경제 소설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부분들에서 비 로맨스 장르의 느낌을 물씬 주는 소설입니다. 남자 주인공인 '세이타로'는 가난한 농부들의 직접 판매 루트 확보를 위해 다양한 위협을 무릅씁니다. 번번이 주인공을 가로막는 기득권들을 설득하는 작업이 여러 단계에 걸쳐 중요하게 이야기됩니다. 이런 주인공의 시력 극복은 마치 경제 소설의 그것과 같은 재미를 우려냅니다. 사건이 점차 해결되면서 처음에는 단점이 부각되던 남자 주인공의 성격은 점차 호감으로 바뀌어 갑니다. 그렇게, 여자 주인공의 마음도 자연스럽게 변화하는데, 독자로서 납득이 가는 과정으로 여겨지더군요.

역사물을 자주 쓰는 작가답게 일본의 역사를 현대식으로 가져왔음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더군요. 마치 시끌시끌한 시골 분위기처럼 이야기를 잘 어루만져, 결과적으로 따뜻한 목가 소설로 만드는 재주가 출중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자 주인공이 기존 소설의 주인공과 같이 수동적이지 않은 점도 장점이었습니다. 여자 주인공인 '지사토'는 극의 전개에 중요한 전설의 야채 복원에 주요한 힌트를 제공하고, 협상을 위한 담판에서 전 남편의 인맥을 적절히 활용합니다. 또 채소를 키우면서 유발하는 소소한 즐거움이나 여러 야채의 맛을 시각화하는 재미를 주는 것도 여자 주인공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물론 당시의 역사에 비추어, 무사 집 과부와 청과상 큰 아들의 로맨스가 얼마나 현실 고증이 된 건지는 모르겠더군요. 소설 내에서는 이들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인 분위기 전혀 없었지만, 만약 조선시대라면 누구라도 반대했을 커플이라는 생각은 들더군요. 뭐, 제가 에도시대 풍속 전문가는 아니지만요.

전국의 쌀과 야채가 모이는 ‘천하의 주방’ 오사카. 이곳의 야채 유통을 독점하던 상인회는 먹고살기 위해 직접 재배한 야채를 팔려는 농부들을 탄압한다. 가난한 농부들의 목소리를 듣고 불합리한 구조를 타파하여 야채시장을 개혁하고자 나타난 남자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세이타로, 공교롭게도 상인회 대표의 큰아들이다.

오사카에 부임한 남편을 따라 내려온 에도 토박이 지사토는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떠나자 근근이 생활하다가 상인회 대표의 마나님을 시중드는 하녀로 일하게 된다. 힘든 일과 중에도 유일한 낙이라면 오사카의 맛있는 음식을 삼시 세끼 맛보는 것뿐이다. 그러던 중 뭘 하든 제멋대로인 큰아들 세이타로에게 휘말린다.

처음에는 경계하던 지사토는, 얼간이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야채에 미쳤다’는 평을 듣는 세이타로에게 어느샌가 끌리게 된다. 세이타로의 말처럼 막부의 보호를 받는 상인회의 독점을 타파하고, 야채시장의 유통구조를 바꿀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지금은 사라진 전설의 야채를 되살려낼 수 있을까?

야채에 미쳐서 줄거리 (출판사 제공)


일본 에도시대라는 #다소희귀한배경의 로맨스소설 에 호기심이 동하는 분이라면 좋아할 만한 소설입니다. #끈적거리지않는저수위로맨스소설마니아 들에게도 좋은 소설 일 수 있겠군요. 또,<한자와 나오키>같은 경제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던 독자들에게 의외로 통하는 선택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면 야채, 가드닝에 관한 팁은 평이하거나 주요 소재로는 다루어지지는 않으니, 식물이나 야채에 관련된 상식을 추구하는 독자라면 비추하겠습니다. (실제로 그런 의도로 이 책을 구입했던 독자들이 실망스럽다는 리뷰를 쓰기도 했더군요.) 소설 속 이야기는 역사에서 있었던 사건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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