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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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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이상해요."
"'이상해요'라니. 이런 신랄한 비평가를 보았나."
"아닙니다. 시가 이상하다는 것이 아니에요. 시를 낭송하시는 동안 제가 이상해졌다는 거에요."
"친애하는 마리오, 좀 더 명확히 말할 수 없나. 자네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침나절을 다 보낼 수는 없으니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요. 시를 낭송하셨을 때 단어들이 이리저리 움직였어요."
"바다처럼 말이지!"
"네, 그래요. 바다처럼 움직였어요."
"그게 운율이란 것일세."
"그리고 이상한 기분을 느꼈어요. 왜냐하면 너무 많이 움직여서 멀미가 났거든요."
"멀미가 났다고."
"그럼요! 제가 마치 선생님 말들 사이로 넘실거리는 배 같았어요."
시인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내 말들 사이로 넘실거리는 배."
"바로 그래요."
"네가 뭘 만들었는지 아니, 마리오?"
"무엇을 만들었죠?"
"메타포."
"하지만 소용없어요. 순전히 우연히 튀어나왔을 뿐인걸요."
"우연이 아닌 이미지는 없어."-30쪽

"저를 버리시면 안 돼요. 과부에게 이야기해서 미쳐 날뛰지 말아달라고 해주세요."
"이봐. 나는 시인일 뿐이야. 딸 가진 어머니의 오장 육부를 녹이는 재주는 없다고."
"도와주셔야 해요. 선생님이 그렇게 쓰셨잖아요."

지붕없는 집도 유리창 없는 창도 싫네.
노동 없는 낮도 꿈이 없는 밤도 싫네.
여인 없는 남자도 남자 없는 여인도 싫네.
남녀가 얽혀 그때껏 꺼져 있던
키스의 불꽃을 불태웠으면 좋겠네.
나는야 유능한 뚜쟁이 시인.

"지금 와서 이 시가 부도 수표라고는 말씀 못하시겠죠."-74쪽

시인은 막 태어난 아기를 안아주라는 듯이 마리오의 팔에 음반 재킷을 안겨주었다. 그러고는 펠리컨이 날개를 펄럭이듯 덩실거리면서, 동네 춤판을 주름잡는 장발족 청년들처럼 춤을 추기 시작했다. 수많은 이국의 여인과 시골 처녀들의 따스한 허벅지를 섭렵한 바 있고, 지상의 모든 길은 물론 자신의 시 속의 길까지 다 밟아보았던 두 다리로는 리듬을 맞추었다. 나이 탓에 힘겨워 하면서도 연륜에서 우러나는 단아한 세련됨으로 요란한 드럼까지도 감미롭게 승화시키며 춤을 추었다. 마리오는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78쪽

"시인 동무, 당신이 저를 이 소동에 빠뜨렸으니 책임지고 저를 구해 주세요. 당신이 제게 시집을 선물했고, 우표를 붙이는 데에만 쓰던 혀를 다른 데 사용하는 걸 가르쳤어요. 사랑에 빠진 건 당신 때문이에요."
"천만에! 시집 두어 권 선물했다고 내 시를 표절하라고 허락해 준 줄 알아. 게다가 자네는 내가 마틸데를 위해 쓴 시를 베아트리스에게 선사했어."
"시는 쓰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것이에요!"
"너무나 민주적인 말이라 감동하겠군. 하지만 아버지가 누군지 가족 투표로 정할 만큼 극단적인 민주주의를 행하지는 말자고."
마리오는 눈 깜짝할 사이에 가방을 열어 포도주 한 병을 꺼냈다. 네루다가 애호하는 상표의 포도주였다. 네루다는 어쩔 수 없이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는 이내 동정에 가까운 자애로운 표정으로 변했다.-85쪽

9월 4일 밤 깜짝 놀랄 뉴스가 세계를 휩쓸었다. 살바도르 아옌데가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었다. 민주적인 투표로 집권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대통령이었다.-87쪽

첫째, 이슬라 네그라 종루의 바람 소리.(바람 소리가 일분쯤 계속된다.)
둘째, 제가 이슬라 네그라 종루의 큰 종을 울리는 소리.(종소리가 일곱 번 울린다.)
셋째, 이슬라 네그라 바윗가의 파도 소리.(아마도 폭풍우가 치던 날에 녹음한 듯, 바위에 거세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편집한 것이다.)
넷째, 갈매기 울음소리.(이 분간 기묘한 스테레오 음이 난다. 녹음한 사람이, 앉아 있는 갈매기들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가서 새들을 놀래 날려 보낸 듯하다. 그래서 새 울음소리뿐만 아니라 절제미가 담긴 무수한 날갯짓 소리 역시 들을 수 있다. 중간에 사십오 초 지날 즈음에 마리오의 목소리가 들린다. "염병할, 울란 말이야."라고 소리 지른다.)
다섯째, 벌집.(거의 삼 분간 윙윙거리는 위험천만한 주음향이 들리고 배경음으로는 개 짖는 소리와 무슨 종류인지 모를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녹음되었다.)-122쪽

여섯째, 파도가 물러가는 소리.(녹음의 절정의 순간으로, 큰 파도가 요란하게 모래를 쓸어 가다가 새로운 파도와 뒤섞일 대까지의 소리를 마이크가 매우 가깝게 쫓은 듯하다. 마리오가 내리 쏟아지는 파도 옆을 달리다가 바다로 뛰어들어 파도끼리 절묘하게 섞이는 것을 녹음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일곱째, (분명히 긴박함이 깃든 격앙된 음성이었고, 침묵이 뒤를 잇는다.) 파블로 네프탈리 히메네스 곤살레스 군.(갓 태어난 아기가 쩌렁쩌렁 우는 소리가 십 분쯤 지속된다.) -123쪽


하늘의 품에 휩싸인 바다로 나 돌아가노니,
물결 사이사이의 고요가
위태로운 긴장을 자아내는구나.
새로운 파도가 이를 깨뜨리고
무한의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질 그때가지,
어허! 삶은 스러지고
피는 침잠하려니.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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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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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밀 아자르, 또는 로맹 가리.

 

  그의 많은 소설들 중에서도 이 책이 가장 좋다. 늘 복닥거리고 혼나가며 살았어도 서로 사랑한 사람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늙어가는 로자 아줌마를 보며 눈물 흘리는 모모의 상상은, 거꾸로 흘러가는 세계를 모모가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를 느끼게 한다. “말들은 뒤로 달리고, 8층에서 떨어진 사람도 살아나서 창문으로 다시 들어온다. 그것은 정말로 모든 것이 거꾸로 된 세계였다. 그리고 그것은 내 거지 같은 생애에서 본 것 중 가장 멋진 것이었다. 한순간 나는 젊고 생기 있는 로자 아줌마의 튼튼한 다리를 보았다. 그리고 로자 아줌마를 보다 뒤로 가게 하여 더욱더 예쁘게 만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눈물이 났다.”라고 말하던 모모.

 

  열네 살의 모모는 시간이 갈수록 늙어지는 로자 아줌마의 약한 모습 그대로를 진심을 품어준다. 다음 대목에서 그 진심이 표현된다. “그녀는 무척 침착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밑에 오줌을 쌌으니 닦아달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가 참 아름다웠던 것 같다.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정말로 그렇다. 모모의 순수한 사랑은 인종, 나이, 오물, 심지어 죽음까지 넘어선다. 때문에 극한의 고통에 떠는 로자 아줌마의 모습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할 수 있으며 그를 따뜻하게 품고 사랑해주기까지 한다.

 

  이 아이의 생각을 따라가는 동안, 아름다움과 가치란 무슨 관계인지, 삶과 죽음에 있어서 진정한 가치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정말이지 위대한 가치란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에서 잠잠히 드러난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세게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다. 세상과 아이에게, 사랑받지 못한 이들에게, 사랑하며 살지 않은 순간들이 미안해서 눈물이 나온다. 


  “사랑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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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지음, 정영목 옮김 / 푸른숲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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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신화를 벗겨내고 인간 카를 마르크스를 재발견할 때가 왔다."

 

  내게도 그러한 시간이 주어졌다. 

 

  이 책은 '평전은 지루하고 어려울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인간 마르크스에 부대껴보게 한다. 책의 시작부터, 마르크스의 삶과 사상의 모순된 모습이 그 자체로 마르크스였음을 알리고, 각 장마다 마르크스에 관한 분명한 인상을 심어준다. 늘 싸우고 비꼬고 위압적인 인상으로 상대방을 압도하는 마르크스의 모습은 마치 커다랗고 여기저기 모가 나 있는 고독한 바위와 같다. 특히 마르크스가 사람들과 싸울 때면 놓치지 않았던, 주된 전략인 변증법 역시 흥미롭다. 프랜시스 윈조차도 그의 '사소'하고 '엄청난 정력을 쏟는' 다툼들을 기록하는 동시에, 어처구니없어 한다. 그러나 사람이란 자기만의 세계가 있기 마련이고 그 안에서 패배하면 존재의 뿌리가 뽑힌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을 고려해보면, 마르크스의 다툼들을 그 나름의 세계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한편으론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세 딸을 지극정성으로 키우고 '귀족적인 숙녀로서의 조건'들을 갖춰주려는 아버지의 모습은, 분명 모순이고 철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그저 '인간'임을 느끼게도 한다. "욥만큼 신을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욥만큼 고통은 겪고 있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렇게 깊은 고통에까지 다다른 사람이라면 '모순'이야말로 일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마르크스는 그 고통 속에서, 필요악으로 보이는 다툼들 속에서, 당대에 작은 이슈도 되지 못한 『자본』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지적인 깡패”라고 불리던 마르크스, “욥만큼 신을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욥만큼 고통은 겪고 있다”라고 말하던 마르크스. ‘행복’이란 ‘싸우는 것’이고, ‘불행’이란 ‘굴복하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적는 그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저 편안하게 하루 이틀 이 책을 읽었을 뿐인데, 다소 거칠지만 계속 연락하고 지내고 싶은 친구처럼 다가오는 칼 마르크스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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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해방 전후 - 1940-1949
유종호 지음 / 민음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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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에 보면,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덤블도어 교장이 나온다. 살아온 세월을 반영하듯 얼굴이 온통 옥수수수염 같은 흰 털로 수북이 덮여있는 그는, 때때로 머릿속의 기억들을 회오리치는 물 같은 형태로 뽑아내어 교장실의 은쟁반 안에 담아 두곤 한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해리포터를 그 기억 안으로 들어가게 해, 시뮬레이션 형태로 자신이 보고 느낀 과거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영화를 보면서, 이 은쟁반이 자전적 에세이 같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숱한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서로 남겠다고, 혹은 떠나겠다고 경쟁하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막연히 마법의 은쟁반이 있어서 다 풀어놓아버렸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일기를 쓰곤 하는데, 확실히 그렇게 글을 쓰다 보면 생각이 정리되고 기억을 그러안고 있던 부담도 내려놓아진다. 나중에 다시 글을 보면 여전히 서글플 때도 있고, 우습고 허탈할 때도 있지만, 훗날 ‘객관적 정황은 기억하지 못한 채 당시의 감정만 남아 정체 없이 마음을 허물어뜨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나의 해방 전후』를 읽으며, 가장 유익했다고 느낀 점은, 해방 전후를 살아야 했던 세대의 그 ‘정체 모를’ 정서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기록과 교환을 통해 과거의 진실을 드러내고자’(29) 했던 작가의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시절엔 누구나 다 고생했지’라는 상투적인 한 문장으로는 이해할 수 없어 답답하기도 하던, 식민지 시기의 어린이 강제 노동, 창씨개명, 학교 교육과 교사들, 학생 간의 집단적 움직임, 문학에 목마른 소년의 눈에 띄던 몇몇 문학잡지 등을 풍속화 보듯 세세히 관찰하고 나니 조금 속이 후련해진 기분도 든다. 더불어 그저 주어지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듯한 ‘일상’이, 생기롭게 다가왔다.

 

  책에서는 자기 자신보다도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데, 훗날에라도 아름답게 여겨질 법한 그리운 것들에 대한 서술이 워낙 없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당시 교사들의 야만적인 태도나 “기상천외한”(153) 내용을 가르치는 무지함에 관한 토로가 많은데, 그렇게 부정적인 인간상으로 유형화되어 있으면서도 “했는지 모른다”(147) 라거나 “별 수 없었다”(155)라는 식의 사족으로 유년의 이해에 대한 한계를 덧붙이고 있다. 한숨짓고 눈물 흘리고 욕하고 싶은 것을 참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때문에 덧붙이는 자신 없어 보이는 말들이 껄끄러웠는데, 또 한편으론 가까운 과거를 쉽게 단정함으로 누군가 피해를 입거나 스스로 경망스럽지 않고자 노력한 것인가 싶다. 그래도 좀 더 자기 기억 속으로 단호하게 들어가 자유롭게 자기 이야기를 썼더라면 독자의 공감을 더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기억의 닳은 흔적에서 비롯되는 변형이나 왜곡은 이미 머리말을 통해 독자가 감안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요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역시 작가의 말마따나 “유년기 활동사진의 최고 서정시”(50)로 언급하고 있는 증평국민학교 저학년 시절 오기하라 선생의 “검정 외투 차림으로 함박눈 속에 서 있던”(50) 모습은 마음에 깊은 공감을 일으킨다. 아름다운 것이라곤 느끼기 힘든 시절이었기 때문에 더 아름답고, 추운 겨울의 기억이라 더 따뜻하게 기억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 서정시 때문에 나는 많은 것을 불문에 부칠 수 있었다”(50)는 작가의 고백은, 세상을 살아갈 힘이 되어준 고마운 기억들을 돌이켜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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