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니 - 나의 삶 나의 문학 시리즈
이청준 지음 / 문학과의식사 / 1999년 4월
품절


돌아다보면 지난 33년 동안 내가 소설을 써 온 일도 그와 비슷한 노릇이 아니었나 싶어진다. 우리의 삶도 혼자 어두운 밤 눈길을 걸어가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점에서. 앞을 잘 알 수 없는 밤눈길처럼 이런저런 장애와 위험이 많은 삶의 길에서 누구나 마음의 위안을 얻고 의지를 삼아 갈 만한 동행자를 찾게 마련이라는 점에서. 앞서간 선행자의 발자국을 찾지 못해 그의 위로나 지혜를 얻을 수 없는 경우에도 혼자서 이리저리 그것을 꾸며 좇는 가운데에 우리 삶은 중단 없이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그 허구 속의 선행자뿐 끝끝내 동행자의 부재 속에 종착지에 이르러서도 우리는 그 허구를 허황하고 어리석은 희망으로 허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재의 선행자(그래서 동행자가 되는)를 만날 수 있다면 그보다 다행스런 일이 없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소설의 몫이기보다 현실의 몫에 더 가까우리라는 점에서 그 밤길의 허구는 실재의 선행자(혹은 동행자)보다 훨씬 소설의 영역에 근접해 있고, 그 유용성도 더 소설적인 터이므로.

<작가의 말_밤길의 선행자 좇기> 中-18쪽

한양대는 86년까지, 2년 가까이 있었죠. 그 과정은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고 내가 할 수가 없어서. 너무 늦게 시작했다는 것도 있지만 창작하는 입장에서 강의란 나한테 방해가 되더라구요. 나는 책을 읽어도 메모를 안 해요. 잊어버려야 돼요. 잊어버려야 되는 얘기들을 번호 붙여서 메모하고 판서하고...... 어떤 면에서는 체험들이 모두 녹아 없어져야 되는데, 뭘 쓰려고 하면 아는 체하는 잡지식들이 자꾸 나오니까.

<대담_이청준의 생애연표를 통해서 본 인문주의적 사유와 새로운 교육문화를 위한 이야기들> 中-146-147쪽

그 당사자들이야 우리들하고는 해석이 아주 다르죠. 7~80년대 오면서부터는 의식 자체가 집단화되잖아요. 저쪽이 워낙 집단적인 힘이 강하니까......, 그래서 양면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힘의 비밀에 대한 변화상이 있을 수 있겠고......, 상호 자존심, 존엄성이랄까 원초적인 존엄성이라고 부를 그런 인격을 모두 깔아뭉개 놓고 잘 살게 해 줬으니 되지 않았느냐고 큰 소리들을 쳤지요. 그 뒤 80년대 후반으로 가면 민주화를 해도 될 것 같았는데 잘 안 돼서...... 아까 정 선생이 말한 IMF 이야기는 그런 허세 속에서 싹튼 거겠지요.

<대담_이청준의 생애연표를 통해서 본 인문주의적 사유와 새로운 교육문화를 위한 이야기들> 中-152쪽

소설의 힘과 생명은 무엇보다 쉼없이 살아 움직이는 눈앞의 생생한 삶의 현실 가운데서 얻어지는 게 일반적 상식이다. 현실 부정과 관념 지향의 측면이 강한 추상적 본질 세계에의 탐구는 그 나름의 덕목을 부인해서도 안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철학적 영역의 소설 이전 단계이지 총체성과 구체성을 함께 요구하는 소설 미학의 표현 단계에는 이르기 어려운 때문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생각을 다시 해 볼 수밖에 없었다. 내게 소설을 쓰게 한 보다 크고 결정적인 동인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생각을 더듬어 찾아낸 것이 내가 어린 시절을 농촌 마을에서 보낸 시골내기라는 점이었다.

<문학 자서전_나는 왜, 어떻게 소설을 써 왔나> 中-190쪽

대량 정보의 고속 유통 현상은 우리의 삶과 말에 더할 수 없는 정확성과 공리성[+확정성]을 확보해 준 듯싶어 보인다[공리적 언어]. 그러나 이면을 살펴보면 그것은 그럴 법해 보이는 것뿐 실제로는 갖가지 폭력과 소외를 낳고 있다. 한 예로, 세상 읽기 공부삼아 전자통신망으로 잠시 정보의 양과 속도의 싸움터라 할 수 있는 주식시장엘 들어가 갖가지 정보와 주가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그것들이 얼마나 예측불허로 불합리하고 부도덕하게 움직이는가를 알 수 있다. 대량 고속 정보의 정확성과 공리성은 은행이나 대기업 투자기관들에게 일방적으로 선점, 좌지우지 되어 가게 마련이고, 개미군단이라는 대다수 개인들은 허겁지겁 그 기관들의 움직임을 살피는 하위 정보에나 매달리다 종당엔 자기 주가의 무참한 학살을 겪게 된다. 그 보이지 않는 정보조직(정보언어)의 폭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고 만 개인들(개인언어)의 광범하고 무기력한 소외현상, 그리고 그 소외된 말들.

<문학 자서전_나는 왜, 어떻게 소설을 써 왔나> 中-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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