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늘빵 > [말들의 풍경] <20> 한자 단상(고종석)

2006. 7. 19 한국일보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607/h2006071817372785150.htm

[말들의 풍경] <20> 한자 단상
인류 최고의 시각 기호… 인터넷시대 아이콘 잠재력
한글전용 승리는 이론 아닌 시장의 논리
한자어가 우리말 절반 넘어 '분리' 불가
동아시아 밖 확산 전망… 조기 교육 필요


루쉰은 “한자가 망하지 않으면 중국이 망한다”며 이 네모난 글자의 궁극적 퇴출을 전망하고 모색했지만, 한자는 약점이 많은 만큼이나 매력적인 문자체계다. 그것은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시각 기호다.

한국어 텍스트에서 한자를 보는 일이 점점 드물어지고 있다. 극소수 학술 서적을 빼면, 한국어는 오로지 한글로만 적히고 있다. 1945년 해방 뒤 오래도록 국어학계를 갈라놓았던 한글 전용론과 한자 혼용론 사이의 드잡이에서 한글 전용론이 결국 이긴 것이다. 한글 전용론의 승리는 이론이나 논리의 승리가 아니다.

이론적으로는, 한국어를 한글로만 적어야 한다는 주장의 논거 못지않게 한자를 섞어 써야 한다는 주장의 논거도 튼실하다. 더 나아가, 같은 수준의 논리적 타당성으로 한국어를 로마 문자로만 써야 한다는 주장도 내세우자면 내세울 수 있다.

한글 전용론의 승리는 또 법규범의 승리도 아니다.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10월 9일 법률 제 6호로 공포된 ‘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은 “대한민국의 공문서는 한글로 쓴다. 다만, 얼마 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고 이미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얼마 동안 필요한 때’가 한없이 늘어지면서 이 법률은 죽은 거나 진배없이 돼 버렸다.

이 법의 폐지와 함께 지난해 제정된 국어기본법이 그 14조 1항에서 “공공 기관의 공문서는 어문 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 다만, 대통령령이 정하는 경우에는 괄호 안에 한자 또는 다른 외국 문자를 쓸 수 있다”고 규정한 것은 한글 전용론의 승리를 뒤늦게 확인한 것일 뿐 거기 어떤 운동량을 준 것은 아니다.

한글 전용론의 승리는 민주주의라는 가치의 승리이자 어찌 보면 시장의 승리다. 다시 말해 한국어 텍스트의 소비자인 한국 민중이 한글 전용을 바랐기 때문에 한글 전용이 이긴 것이다. 한자 혼용론의 실천적 성채였던 일간 신문이 하나 둘 한글 전용으로 돌아선 것도 새 세대 독자들의 문자 감수성을 마냥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일 테다.

가장 어기차게 한자 혼용을 고집했던 법학 교과서조차, 이제 한글만을 쓰되 필요한 경우엔 한자를 괄호 안에 가두어 덧대는 식으로 표기 체계를 바꾸고 있다. 한글 전용의 확산은 가로쓰기의 확산과 궤를 같이 했다. 한 세대 이전에는 흔히 볼 수 있었던, 세로쓰기 조판에 한자 투성이 한국어 텍스트를 요즘 젊은 세대는 쉽사리 읽어낼 수 없을 것이다.

사실, 한 자연 언어를 한 문자 체계로만 적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 텍스트나 한 문장 안에 이질적 문자 체계를 뒤섞는 관습은 일본어나 한국어 바깥에서는 쉬이 찾아볼 수 없다. 옛 유고슬라비아 지역의 제1 공용어인 세르보크로아티아어는 키릴 문자로도 적고 로마 문자로도 적지만, 이 언어의 경우에도 한 텍스트 전체를 키릴 문자로 쓰거나 로마 문자로 쓸 뿐 한 텍스트 안에, 심지어 한 문장 안에 서로 다른 문자 체계를 섞어 쓰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이미 한국어 형태 음운론에 바짝 달라붙어 있던 한글 한 가지로 한국어를 적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렇더라도, 한국어 화자가 한자에서 온전히 독립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대 이래 지난 세기 말까지 한국인이 쌓아온 문화 자산이 대부분 고전 중국어, 곧 한문 안에 담겨 있다는 사정 때문만은 아니다.

넓은 의미의 중국어(19세기 말 이래 한국어로 쏟아져 들어온 일본제 한자어를 포함한)는 지난 2,000년 이상 주로 문자 통로를 거쳐 한국어에 깊숙이 파고들었고, 이제 중국계 한국어 곧 한자어는 한국어 어휘의 반을 훨씬 넘게 되었다. 이 한자어들의 적잖은 수는 한자에 대한 지식 없이 쉬이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가 한글로만 쓴 한국어 문장을 쉬이 이해할 수 있는 것도 한자 지식이 어슴푸레하게나마 그 밑바탕에 있기 때문이다.

설령 한자어를 이해하는 데 한자 지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한자 지식이 한자어 이해를 돕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어 문장을 한글로만 적는 관습을 확립하는 것과 나란히, 초중등학교에서부터 한자를 가르쳐야 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

한자 교육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이들은 한자 교육 얘기만 나오면 “그 수만에 이르는 글자를?”이라며 과장하지만, 한국어 감각을 키우고 유지하는 덴 2,000 자 안팎이면 넉넉하다. 한 통계에 따르면 심지어 중국어에서도 출판물의 90%를 차지하는 것은 950자에 지나지 않고, 99%는 2,400자로 채워진다.

루쉰(魯迅)이나 궈모뤄(郭沫若) 같은 20세기 중국 지식인들은 “한자가 망하지 않으면 중국이 망한다”(漢字不亡, 中國必亡)며 이 네모난 글자(方塊字: 한글도 음절 단위로 네모나게 모아쓴다는 점에서 ‘방괴자’의 일종이다)의 궁극적 퇴출을 전망하고 모색했지만, 결국 한자도 중국도 망하지 않았다.

사실, 익히기 어렵다는 점을 잠시 잊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피면, 한자만큼 매력적인 문자 체계도 없다. 한자는 지금 살아있는 문자 가운데 가장 긴 역사를 지닌 체계다. 갑골 문자가 사용되던 기원전 1300년께부터 3천 수백년 동안 바탕을 흩뜨리지 않으며 이어진 그 문자사의 연면성은, 거기 담긴 중국 문화의 찬란함과 더불어, 인류 전체의 자부심을 큰 부분 떠받치고 있다.

상(商) 왕실의 점복(占卜) 기록인 갑골문에서 시작해 주대(周代)의 금문(金文), 춘추전국시대의 대전(大篆)과 고문(古文), 진(秦)의 소전(小篆)을 거쳐, 한대(漢代) 이후의 예서(隸書) 해서(楷書) 초서(草書) 행서(行書)에 이르는 그 필체의 변전도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한다. 한자는 ‘글’쓰기가 아닌 ‘글자’쓰기를 하나의 버젓한 예술 갈래로 만든 거의 유일한 문자 체계다. 이른바 인쇄체와 구별되는 필기체를 고안해낸 문자 체계들도 글자 쓰기를 깊이 있는 예술로 만들어내진 못했다.

게다가 상형(象形) 지사(指事) 회의(會意) 형성(形聲)의 네 조자법(造字法)과 전주(轉注) 가차(假借)의 두 용자법(用字法) 등 이른바 육서(六書)를 통한 기호와 현실의 율동적인 짝짓기도 눈 호사를 베풀기에 넉넉할 만큼 현란하다. 다른 모든 문자 체계처럼 한자 역시 음성언어의 그림자일 뿐이지만, 한자의 이 별난 진화과정은 한자 하나하나가 실물이라는 환상을 때로 불러일으킨다.

형태가 소리만이 아니라 뜻에 대응하는, 그래서 한 음절로 발음하는 한 글자가 그대로 한 형태소가 되는 표의성(表意性)은, 육서를 통한 그 독특한 발달 자취와 함께, 한자 물신주의을 부추긴다. 그것은 위험한 유혹이지만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기도 하다. 한자는 그 하나 하나가 의미 단위다.

다시 말해 형태소다. 또 한자는 그 하나 하나가 음절단위다. 다시 말해 부분적으로는 소리 글자이기도 하다. 한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형성자는 ‘소리 글자로서의 한자’라는 만화경 속에서 아름답고 진기하게 펼쳐지는 의미의 풍경들이다.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이런저런 속자(俗字)들, 국민당 정권의 간체자(簡體字)와 공산당 정권의 간화자(簡化字), 일본식 약자(略字) 등 수많은 이체자(異體字)의 존재도 호사가들의 눈길을 끈다. 이런 이체자들은 로마 문자 I와 J가 한 뿌리에서 나왔다거나 V와 U가 본디 한 글자였다는 것과는 급이 다른 문자의 화사한 곡예다. 이런 매력들 대부분은 자주 한자의 약점으로 거론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기나긴 세월 한 문자 체계가 겪은 모험과 장정의 위대한 흔적이다.

이 한자의 모험에 주동적으로 참가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중국인’이라 부르는 대륙 사람들이지만, 한반도와 일본열도와 (한 때의) 베트남 지식인들도 그 모험의 동반자들이었다. 그래서, 비록 베트남어 표기에서는 가뭇없이 사라졌고 한국어 표기에서도 점차 사라지고 있지만, 한자는 동아시아 공통 문자라고도 할 수 있다.

일본인 커뮤니케이션 이론가 니시가키 도루(西垣通)도 지적했듯, 한자란 무릇 중국어의 음성 표기라기보다 동아시아의 다양한 음성 언어를 연결하는 일종의 ‘번역’으로 기능해 왔다.

니시가키는 한 논문에서 인터넷이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의 문자(시각 기호)’라는 가능성을 새롭게 연 미디어라는 점을 지적한 뒤, 기본적으로 ‘시각 언어’인 한자가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새 생태 환경의 적자(適者)가 될 수도 있다고 전망한 바 있다. 추상 개념을 표현하는 아이콘으로 한자보다 더 나아간 시각 기호는 없기 때문이다(‘언어제국주의란 무엇인가’, 미우라 노부타카 외 엮음, 이연숙 외 옮김, 2005, 돌베개).

니시가키의 전망이 들어맞든 그렇지 않든, 한자 지식은 지금보다 훨씬 빨리 동아시아 바깥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중국어와 일본어를, 그리고 한국어를 외국어로 배우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 한국 한자음의 특성
고유어와 다른 음운체계 '쾌' 왜엔 'ㅋ' 발음 全無
지식인 규범어… 방언 없어

한국 한자음은 한국어 음운 체계의 변화에 한편으로 순응하고 다른 한편으로 저항하며 제 나름의 체계를 이뤘다. 그래서 한자음 체계는 고유어 소리 체계와 꽤 다르다. 중세 후기와 근대를 거치며 고유어 음운 체계에서 반치음과 아래아가 사라지는 것과 나란히 한자음도 반치음과 아래아를 구축해 버린 것은 순응의 예다. 그러나 한자음은 그 시기 고유어에 매우 흔하게 된 /ㅋ/ 소리는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ㅋ/을 포함하는 한자음은 ‘쾌’ 음절 하나밖에 없다. 또 내과(內科), 불소(弗素), 활달(豁達), 격정(激情)의 둘째 음절에서처럼 한자음이 환경에 따라 된소리로 실현될 수는 있지만, 낱낱의 한자음에선 고유어에서와 달리 된소리가 체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드물게, 끽(喫), 쌍(雙), 씨(氏) 따위가 있을 따름이다.

한자음은 /ㄷ/ /ㅅ/ /ㅈ/ /ㅊ/ /ㅋ/ /ㅌ/ /ㅍ/ /ㅎ/ 따위를 마지막 음소로, 다시 말해 받침으로 취하지 않는다. 고유어에서라면 ‘믿다’, ‘웃다’, ‘멎다’, ‘낯’, ‘부엌’, ‘밭’, ‘뒤엎다’, ‘좋다’에서처럼 이런 음소들이 한 음절의 종성으로도 가능하다. 또 고유어에는 ‘넓다’, ‘굵다’에서처럼 겹받침이 존재하지만 한자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고유어에서 볼 수 있는 /ㅂ/ 소리와 /w/ 소리의 역사적 음운 교체 현상(예컨대 ‘덥다’ ‘춥다’ 따위가 ‘더운, 더워서’ ‘추운, 추워서’ 따위로 활용하는 것) 따위가 한자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 한자음에는 지역적 변이체 다시 말해 방언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유어는 여러 방언으로 분화돼 있고 그 방언에 따라 제 나름의 음운 체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자음은 통일된 규범에 따라 오직 하나의 체계로 존재할 뿐 방언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물론 예컨대 /ㅡ/ 소리와 /ㅓ/ 소리를 구별하지 않는 일부 영남 방언에서 금(今)과 검(檢)이 중화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한자음에 방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지식인들의 보편적 규범어로 기능했다는 사정과 관련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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