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일 오전 ‘몽양 여운형 선생 추모 사업회’가 마련한 ‘역사 탐방-몽양의 자취를 찾아서’에 참여한 시민들이 칼국수집으로 변한 서울 종로구 계동 몽양의 옛집 앞에서 강준식(맨 왼쪽 목도리 두른 이) 추모사업회 사무총장의 설명을 듣고 있다.


<한겨레 2004.11.29>


여운형 선생 사후 첫 역사탐방



몽양 여운형(1886~1947)의 옛 비서 이기형(87)옹은 서울 종로구 계동 몽양의 옛집 앞에서 “66년 전(1938년)에 이곳에서 선생을 처음 만났다”고 회고했다. 이제 칼국수 가게(‘안동 손칼국수’)로 변한 초라한 건물 앞에서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옹은 “몽양 선생에게 몸을 의탁하러 이곳을 처음 찾은 게 바로 엇그제 같다”며 “그때는 세상 무서울 게 없는 21살의 젊음이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늙어 죽을 날을 기다린다”고 백발을 휘날리며 쓸쓸히 웃었다.

27일 오전 10시, ‘몽양 여운형 선생 추모 사업회’(mongyang.org)가 마련한 ‘역사 탐방-몽양의 자취를 찾아서’에 참여한 시민 50여명은 이옹이 내딛는 걸음 걸음을 숨을 죽인 채 뒤따르고 있었다. 몽양은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취임한 1933년부터 서울 종로구 헤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당한 1947년 7월19일까지 이 건물에서 생활했다.



계동 옛집, 앞뒤 잘린채 식당으로
옛 비서 이기형씨 등 50여명 참여



강준식 추모 사업회 사무총장은 “이번 모임은 몽양 사후 57년만에 처음 이뤄지는 역사 탐방”이라며 “내년부터 3년 동안은 해외로 시각을 넓혀 중국 난징·상하이, 일본 도쿄, 만주와 이르쿠츠크 등을 다녀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국가보훈처는 몽양이 해방 이후 ‘근로인민당’ 당수로 활동하는 등 좌익활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반세기 가까이 거부(<한겨레> 8월14일치 1면)해 왔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8월 “좌우 대립의 비극적 역사 때문에 독립운동사 한쪽은 일부러 묻힌 측면이 있다”고 의견을 밝히면서, 서훈은 급물살을 타게 됐다. 사업회가 꿈꿔온 여러 숙원 사업도 현실화될 것으로 보인다.

추모 사업회는 그동안 서울시 등에 계동 옛집을 문화재로 지정해 보호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몽양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지 않아 지원 근거가 없다”는 답변에 만족해야 했다. 그 와중에 방 4개를 가진 56평짜리 번듯한 한옥집은 앞뒤가 잘려나가 한옥도 양옥도 아닌 28평짜리 정체불명의 집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친일 부역행위가 잘 알려진 시인 서정주, 문인 이광수, 음악가 홍난파,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의 옛집 등을 사들여 기념관으로 꾸미거나, 문화재로 지정한 것과 비교하면 지나친 홀대가 아닐 수 없다. 몽양의 생가가 있던 경기도 양평군은 서훈이 이뤄지면 생가를 당장 복원하겠다고 추모 사업회 쪽과 약속한 상태다.

추모 사업회 쪽에서는 몽양의 동지였던 유정 조동호(1982~1954),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사법부장과 사료편찬위원을 지낸 김한(1887~1931) 등 다른 좌파 계열 독립운동가들도 내년에 서훈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다음 목표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어 서류 접수 조차 못하는 진보당 당수 죽산 조봉암(1898~1959)의 서훈이다.

조영건 ‘죽산 조봉암 명예회복 범민족 추진 위원회’ 공동위원장은 “죽산의 서훈을 위해서는 먼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을 당한 부분에 대한 사면·복권이 필요하다”며 “몽양 서훈이 이뤄지면 죽산과 박정희의 쿠데타로 ‘사법 살인’을 당한 <민족일보> 조용수 등에 대한 재심을 청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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