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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 인간에 대한 모욕


완전히 광적이다 싶을 정도의 탐욕이 활개를 치는 세상에서 인간다운 가치를 수호하려는 노력에 마주치는 것만큼 소중하고 감동적인 경험은 없다.  나는 최근 우연히 소문을 읽다가 그러한 경험을 갖게 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국내 신문에도 조그맣게 보도된 사건 자체는 비교적 단순한 것이었다.

일본의 도쿄에서 지난 3월 초 수송중이던 우편물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때 잃어버린 우편물에는 제일교포 작가 이희성 씨가 출판사로 보내는 소설 원고가 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이회성 씨라면 그의 작품의 일부가 『 다듬이질하는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일찍이 우리 나라에도 번역 소개된 적이 있는, 일본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바가 있는 중견작가이다.

저명한 작가들을 존경하는 일본 사회 특유의 분위기도 작용하였음인지 이 도난 사건은 상당히 크게 머릿기사로 보도되었다고 한다.  다른 물건도 아니고 소설의 원고가 분실되었다는 점에 일반의 흥미를 더 끄는 대목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이 사건을 처리하는 데 우정성 당국은 이회성 씨에게 백만 엔의 보상금을 지불하기로 제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 우편관계 법령에는 이런 경우 보상금의 한도액은 일만 엔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회성 씨는 일반 규칙의 테두리를 훨씬 넘는 보상금을 탈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러나 작가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당국의 제의를 거부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모욕이다.  이런 경우 보편적 규정에 따르는 것이 원칙이며 특별대우는 안된다."라고.

따지고 보면 특혜라는 것은 차별대우의 또다른 형태일 뿐이다.  이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면서 보통 우리가 얼마나 자주 잊어버리고 있는 일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가해지는 차별이나 학대에 대하여 분노하고 저항하기는 쉽지만, 자기에게 주어지는 특혜에 대하여는 그것이 실상 차별과 다름없는 부당한 대우라는 것을 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모든 차별에 대하여 반대하려면 우선 자기에게 주어지는 특혜도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  적어도 이것이 상식이 될 때 비로소 사회적 이성이 살아 있는 인간공동체가 가능할 것이 아닌가?

이회성 씨의 경우를 보면서 오늘날 우리 사회의 상황에 생각이 미치면 거의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치유하기 불가능한 단계에 도달한 이른바 기성권력 주변의 정신적 타락과 부패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지만, 이른바 지배권력에 맞서는 민주주의적 진보적 가치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형태에서도 흔히 이기심에 오염된 흔적이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의 약점을 철저히 이용하면서 자기의 약점은 온갖 논리로 변호하는 데 익숙해 있는 사람들의 마음으로는 이회성 씨가 백만 엔을 말없이 받았다 해도 그것은 아무런 흉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러한 사회적 통념을 받아들이기를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진리를 옹호하고자 했다.  몰룬 그가 제일 한국인으로서 일본 사회에서의 민족적 차별에 늘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환경적 요인이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고 말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어떻든 그의 발언에서, 인간사회를 추하고 짐승스럽게 만들 뿐만 아니라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이끌어 가고 있는 이기적 탐욕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를 열망하는 성숙한 인격이 살아 숨쉬고 있음을 우리는 느끼는 것이다.
작가 이회성 씨는 인용된 발언 가운데 "이것은 인간에 대한 모욕이다"라는 구절은 특히 인상적이다.  금전적 보상이라면 모든 것의 해결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 -- 그것은 바로 이 시대의 핵심적 비극과 비인간화로 연결되는 사고체계이다.  자동차사고를 내고 생명에 훼손을 끼치고도 보험이라는 편리한 장치 뒤로 숨어 버릴 수 있는 구조 속에서 비인간화가 면연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모든 것을 물질주의의 기준에 따라 측정하고 인간 영혼의 가장 내밀한 가치조차도 상품으로서밖에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산업사회, 사람의 에너지의 거의 전부를 야비한 소득과 경쟁 속에 쏟아붓도록 강요하는 이 가공할 만한 체제 속에서 걷잡을 수 없어 창궐하는 것은 지극히 단세포적인 어리석은 욕망일 뿐이다.
오늘의 교육, 언론, 대중문화, 광고, 심지어 가정에서조차 인간은 단지 일회적으로 쓰고 버리는 휴지조각 이상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그러나 작가 이회성 씨가 '인간에 대한 모욕'을 운위했을 때 그것은 아무리 비참한 상황, 아무리 무거운 압력 밑에서도 결코 굴할 수 없는 고귀한 인간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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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이자 편집인.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가>,<간다의 물레>, <녹생평론선집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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