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인 : 선생님의 개인사의 역정도 그렇습니다만, 이를테면 맑시즘이라든지 근대주의적 발상에 한동안 묶여 있다가, 근래에는 일종의 탈근대적 상상력이 필요하게 되었는데요. 우리가 갖혀 있는 근대로부터의 이탈이라고 할까요, 그 바깥에서 사유해야된다는 필요도 제기되고 있는데, 선생님은 젊은 시절에 - 경제학이라는 것 자체가 그렇습니다만 - 근대적 사유의 세례를 받으셨다가 그것 때문에 고생도 하셨고, 최근에는 동양 고전을 많이 읽으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동양고전이 얼마나 탈근대적인가는 또 따로 얘기해야 되겠습니다만, 일단 두루두루 동서양의 전반적인 큰 사유들을 접하시면서 도대체 21세기에 산다는 게 무엇인가에 대한 선생님이 가진 지혜를 나누어 받고 싶은 욕심이 있는데요. 우리가 얼마 전까지 근대성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계속 논의를 해왔습니다. 즉, 근대라는 게 뭔가, 지금은 근대를 벗어났는가, 포스트 근대인가 아니면 포스트 근대로 가는 과정인가, 만약 근대 이후라고 한다면 지금의 세계사는 무엇인가, 이런 것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듣고 싶고요, 그리고 거기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정체성은 앞으로 어떤 식으로 변화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이런 얘기를 좀 편하게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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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 소위 말하는 21세기 담론, 새천년 담론이 무성했던 게 벌써 엊그제잖습니까? 그러한 담론들을 접하면서 저는 과거와 미래에 대한 우리들의 일반적인 관념이 잘못돼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대부분의 새천년 담론에는 시간을 강물의 형상으로 이해하는 그런 의식구조가 있었어요. 예를 들면 과거로부터 시간이라는 강물이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간다. 아니면 최근에는 시간의 강물이 미래로부터 흘러온다는 의식구조를 보여주고 있지요. 새로운 미래란 하이테크의 급속한 발전과 관련된 그런 전망이거나 세계화와 관련된 것인데, 시간의 강물이 미래로부터 다가와서 현재를 거쳐서 과거로 흘러간다. 이런 구조를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근대란 도대체 뭐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점의 역사적인 의미가 뭐냐고 얘기할 때 아주 혼란스럽거든요. 최근에 미래로부터 온다, 새로운 지구촌, 새로운 제3의 물결이 지금 밀려오고 있다, 우리는 그걸 맞이할 준비를 해야 된다 등등의 담론들은 결국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걸 모두 무장해제 해야된다는 결론으로 떨어지는 것이지요 지극히 위험한 의식구조가 아닐 수 없어요. 이러한 의식구조는 권력은 식민모국에 있고 모든 변화는 식민모국으로부터 온다는 피식민지의 보편적인 의식형태이긴 합니다만 현단계에서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의식구조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의 세계화와는 정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지요. 새삼스런 논의를 다시 거론하는 까닭은 새천년의 담론이 숨기고 있는 이러한 도착된 의식구조의 본질을 놓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주류담론의 본질은 완고한 보수적 구조를 은폐하고 급속한 변화의 이미지를 의식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최근에 나온 『더불어 숲』이라는 책이 세계기행에 관한 책이거든요. 제가 세계기행을 시작하면서 제일 첫 기행지로 선정한 곳이 스페인의 이베리아 반도 제일 끝에 있는 우엘바라는 항구였어요. 왜 이름도 없는 항구를 찾아갔는가 하면 거기가 콜럼버스가 1492년에 출항했던 항구였기 때문이었고 코럼버스의 출항이 바로 근대의 시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물론 자본주의는 그 이후에 산업혁명을 거쳐서 아주 지배적인 사회체제, 경제체제가 되지만, 저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 - 발견이 아니라 도착이죠 - 한 것을 근대의 시작이라고 봐요. 제가 나중에 잉카 마야의 현지를 찾아가서 참혹한 역사를 다시 목격하게 됩니다. 피사로와 코르테스를 필두로 하는 식민주의자들이 천육백 만 명의 원주민들을 학살했어요.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에서도 그만한 숫자, 천육백 만의 흑인들을 그야말로 사냥해서 노예로 끌고 갔던 그런 비극의 역사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됐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를 찾아갔거든요. 그래서 저는 15세기의 우엘바에서 21세기의 바그다드에 이르기까지의 세계 역사를 아울러 근대라고 규정할 수 있다고 보고, 비록 근대성이라는 것의 여러 가지 현상․형태는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 별로 변화가 없다고 봐요. 그래서 저는 그 근대성을 청산하는 일이 - 그것이 방금 말했던 한반도발이든 중국발이든 -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보고, 그 마지막이 바로 미국 패권주의와 운명을 같이 하지 않을까 하는 전망, 전망이라기 보다 오히려 소망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근대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이고 자본주의라는 것은 저는 철학적 개념으로 표현한다면 존재론(存在論)적인 패러다임이라고 봐요. 세계는 무수한 존재로서 구성되어 있고, 각 개별적 존재는 자기 존재를 배타적으로 강화하는 운동을 한다. 그 존재가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배타적 존재이다. 배타적으로 자기를 강화하려는 존재성들 간의 충돌을 사회계약이라는 제3의 국가권력에 위임해서 최소화 해내는 것이 근대 국가의 형식이고, 서구의 기본적인 패러다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강철의 논리가 외부로 표현되는 경우 그게 식민주의로 나타나고 제국주의로 나타나고, 또는 초국적 금융자본으로 나타나기도 하지요. 이러한 존재론을 자기의 운동원리로 하는 근대사회의 전개 과정에서 과연 인류가 공적(公敵)으로 삼았던 소위 BIG 5, 빈곤, 질병, 무지, 부패, 오염, 이 다섯 가지의 공적을 과연 해결했는가? 저는 해결하지 못했다고 보거든요. 하나 하나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만 근대사는 수많은 강국(强國)들을 만들어내었지만 사회의 본질인 인간관계 그 자체는 여지없이 황폐화하였습니다. 인류의 공적을 해결하기는커녕 수많은 전쟁과 살육과 인간성의 파괴를 동반한 근대사는 비극의 역사였습니다. 근대를 넘어선 새로운 패러다임을 지향한다는 것은 역사적 필연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해방 후 세대이기 때문에 주로 서양적인 사고로 교육된 그런 맨탈리티를 가지고 있거든요. 우리신화는 모른 체 그리스 신화부터 읽은 세대이니까요. 또 한글 세대이기도 하고요. 교도소에 들어가서 비로소 내가 갖고 있는 그런 맨탈리티의 식민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동양고전을 읽어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다행히 또 좋은 선생님도 함께 생활할 수 있었던 행운도 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전을 읽는 과정에서 서구적인 그런 존재론과는 다른 패러다임이 동양학 속에 풍부하게 내장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그게 제 개념 표현으로는 관계론적 패러다임(Relation-centered Paradigm)입니다. 근대사외의 존재론적 패러다임(Substance-centered Paradigm)과는 전혀 다른 원리입니다. 세계는 배타적인 존재의 집합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 자리에서 자세하게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물질이든 생명이든 궁극적 존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원자물리학의 표준모델에서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쿼크는 혼자서 존재를 못 해요. 존재는 존재 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확률로서 존재하는 형식이거든요. 예를 들면 불이 자기 혼자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지요.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배타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생명의 단위인 세포는 철저하게 외부로 열린 시스템이거든요. 외부의 에너지나 물질과의 대사가 없으면 그게 생명으로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환경은 물론이고, 다른 개체를 향하여 열려있는 관계의 총체가 생명이고 물질이라는 것이 동양학의 핵심입니다.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이 이를테면 그러한 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지요. 그래서 국가간이든, 개인간이든 이런 관계론 적인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 근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도라는 것이지요. 사실 존재론적 논리가 우리들의 삶 깊숙이 침투해 있어요. 자녀교육도 그런 존재론적 논리로 행해집니다. 다른 애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강철의 논리로 교육하고 있는 것이지요. 개인이든 회사든 국가든 예외가 아닙니다. 심지어는 사회운동단체들도 외부로부터 집단 이기주의라고 비판받을 정도로 배타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운동을 하는 것이 사실이지요. 우리 학교의 사회교육원 노동대학과정에 있는 노조 간부들에게 연대(連帶)만이 희망이라고 이야기하지요. 관계론의 실천적 개념이 바로 연대라고 생각합니다. 연대와 관련하여 꼭 한 가지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연대는 반드시 하방(下方)연대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연대의 가장 상징적인 가시물(可視物)이 물입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물이 가장 큰 바다가 될 수 있는 원리가 바로 하방연대에 있는 것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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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아래로 흐르면 큰 바다가 될 수 있다는. |
신영복 :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노동조합의 경우 연대는 여성, 비정규직, 해고자, 빈민, 농민들과의 연대여야 하는 것이지요. 하방연대가 연대의 기본입니다. 왜냐하면 연대는 약한 자의 전략전술이기 때문입니다. 상방(上方)연대는 흡수와 추종이기 십상이지요. 연대는 관계론의 실천적 개념이면서 현실적으로는 근대구조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연대는 우리시대의 실천론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존과 평화의 원리라는 점에서 통일의 원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연대문제는 이러한 실천의 중심을 이룰 주체 역량을 조직해 내는 기본적인 철학이라고 생각을 하죠. 근대성과 관련하여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근대청산의 과제가 그만큼 어려운 것이라는 반증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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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근대가 이제 단자론적 사고 방식, 어떤 고립된 개별자들의 세계라는 기본적인 세계상에 근거해 있는데, 저는 근대의 이성의 발전이라는 게 한 편으로는 공포로부터 사람이 벗어나는 과정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데 아마 충분히 벗어난 것 같지 않고요. 개인과 개인 사이에 서로 잘 모른다는 무지에서 공포가 오니까요. 저 사람이 어떻게 할지 모른다 라는 그런 공포의 적대가 발생하는데, 그런 면에서 본다면 선생님이 말씀하신 연대의 패러다임은 그 공포를 넘어선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무서운 존재가 아니고 저 사람은 나하고 소통할 수 있는 존재라는 기본적인 인식. 하여튼 저는 근대인을 지배하는 사유의 근저에 공포감이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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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 사회적 공포는 인간관계가 파괴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인간관계가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질서가 바로 사회라고 보거든요. 그래서 이 인간관계 자체가 없다는 것, 특히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삶의 구조인 도시는 사실 인간관계의 황무지입니다. 공간공동체, 마을이 갖고 있는 공간공동체는 완벽하게 해체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바로 이웃에 있는, 같은 공간 내에 있는 이웃끼리도 관계가 없습니다. 낯선 사람을 경계심을 가지고 만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열악하고 조악한 근대의 모습을 우리는 매일 직면하고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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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적대성과 공포를 재생산하는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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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과학의 발전이라는 것도 공포의 생산이지요. 소위 상품으로서의 과학은 상품사회 고유의 자본축적과정을 충실히 따릅니다. 인간의 복지를 만들어내기 보다 공포를 양산하는 구조로 발전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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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그런데 이제 이를테면 막시즘을 보면, 막시즘도 최종단계에서의 유토피아적인 상상력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선의, 이해, 관계, 이런 것들이 살아있는 사회라고 생각하는데, 이게 거기에 도달하는 과정에서는 적대성에 기대고 있거든요. 그게 근대적 사회의 특징이기도 하구요. 그런데 선생님의 말씀하신 관계의 패러다임, 이것은 현존하는 유토피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근대 속에 모든 게 다 파동치고 다 들어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는 어떤 과정이나 프로세스는 있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프로세스 속에서 그런 관계론적 패러다임 자체가 어떤 식의 동력을 가지고 적대성이라든가 단자화 된 근대적 사유라든지 근대적인 존재론을 극복해 갈 수 있을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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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 그래서 제가 스페인의 바스크 지역에 있는 몬드라곤이라고 하는 소위 생산자협동조합(Workkers Cooperation)을 방문을 했었어요. 사실 가서 보고는 상당히 실망했지만, 또 몬드라곤이 직면했던 여러 가지의 난관을 이해할 수도 있었어요. 자본주의라고 하는 거대한 바다 속에 고립된 협동체, 아주 작은 조각배와도 같은 그런 협동체가 어떻게 존속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매우 어려운 숙제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방금 얘기했던 근대성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과제와 맞물려 있는 문제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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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오래 된 미래’라 불렸던 라다크도 지금 그렇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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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 네 그렇습니다. 라다크도 그렇습니다. 라다크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보다는 그것의 소멸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것은 일국 사회주의의 문제와도 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귀농, 생태마을, 유기농 등 여러형태의 대안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매우 의미 있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것이 던지는 선언적 의미는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곡된 삶의 구조를 드러내고 지금까지 이야기한 근대성을 성찰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실천적 과제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사회의 실천적 전형을 담아내기에는 보편성이 미흡하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대중성과 보편성은 운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이상주의적 목표로부터 우리의 관점을 현실의 구체적 실천과정으로 끌어 내리게 하는 것이지요. 선구자적 결단을 모든 사람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우리들이 현실적으로 몸담고 있는 구조,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상 - 예를 들면 기업이든 또는 학교든 - 에서부터 시작해야된다고 생각해요. 자본주의적 구조를 청산한다는 것은 결국 크게 두 가지라고 봐요. 하나는 결정권입니다. 무엇을, 얼마만큼, 몇 시간 노동으로 생산할 것이냐에 관한 결정권을 누가 행사하느냐에 따라서 사회구조가 달라진다고 봐요. 그 다음에 그렇게 생산된 물건을 상품 형식으로 할 거냐 말 거냐, 이 두 가지거든요. 이것만 바뀌면 저는 사회가 바뀐다고 봐요. 물론 이해관계가 적대적이기 때문에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의식 속에 들어와 있는 잘못된 이데올로기를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변혁운동에 흔히 ‘혁명’이란 이름을 붙입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교묘한 정치적 조어(造語)라고 보지요. 물론 프랑스 혁명과 같이 기요틴이라는 공포의 역사도 없지 않았습니다만 그것을 현재에 그대로 이식하는 것은 분명 정치적 이데올로기라고 해야 합니다. 혁명은 굉장히 위험한 것, 무자비한 파괴와 살육을 동반하는 거대한 무질서라는 이미지를 이 조어는 담고 있는 것이지요. 통일이라는 단어에 담아 놓은 이미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은 굉장한 위험과 부담이 따르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아 놓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어의 목적은 그 자체를 터부시하고 접근자체를 아예 차단하기 위한 것이지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포위 속에 우리가 있는 것이지요. 우리의 실천적 지반이 그만큼 열악하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일상적 삶의 문제에서부터 문제삼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적 문제이기 때문에 몬드라곤이나 라다크의 경우와 같은 수세국면의 장기적 고립상태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생활의 곳곳에 진지(陣地)를 만들어내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진지는 헤게머니를 장악할 수 없는 수세국면에서는 역량을 지키는 보루(堡壘)가 되고 객관적 조건이 성숙했을 때는 공격 거점(據點)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어느 경우든 생활상의 민주주의를 충실히 견지하여야 함은 물론입니다.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재론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만 민주주의의 본질은 '정치목적의 공유'입니다. 민주주의를 절차와 형식의 문제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만 이것은 민주주의가 우민화(愚民化)의 도구로 전락한 것이라 해야 합니다. 진지와 생활상의 민주주의를 토대로 해서 주체적 역량을 키워가야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역량이 바축되어 있을 때 객관적 조건을 주동적으로 장악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근대를 넘어서는 노력이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현실적으로 몸담고 있는 구조,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을 실천의 장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최근의 몇가지 상황만 하더라도 우리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차례 기회를 잃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 자립(自立)과 정치적 주체(主體) 그리고 정신적 자존(自尊)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계기가 여러 차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곤이지지(困而知之)해야 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구조를 보정(補整)하는 일에 급급하였습니다. 문민정부가 출범할 때도 그렇고 IMF사태 때도 그랬습니다. 결국 외국자본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해결이 아니라 오히려 구조를 허약하게 한 것이지요. 길게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기어를 오프(off)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갔어야 했지요. 결과적으로 외국자본이 우리나라의 중요한 경제부문을 장악하게 방조한 셈이지요. 세계화의 충실한 시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많은 활동가들이 힘들다는 하소연을 해요.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래도 우리 때보다는 어렵지 않다고 얘기해요. 왜냐하면 사회의 역량이란 객관적인 조건과 주체적인 역량으로 나누어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만 객관적 조건은 많이 언급한 것으로 하구요. 주체적 역량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주체적인 역량을 보는 관점은 양적인 측면과 질적인 측면이 있어요. 대체로 역량을 양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그건 잘못된 사고입니다. 1987년의 상황을 기억하고 그리워해요. 그러나 주체적 역량이란 그런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 기억에 연연하면 안됩니다. 문제는 질적인 것이거든요. 역량의 질적 측면은 첫째로 각 부문의 역량들이 조직적 형태를 띠고 있는가 비조직적인 우연적 형태로 있는가가 중요해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 사회의 부문 역량들은 조직적 형태를 띠고 있어요. 노동, 농민, 교사, 환경, 빈민, 등 조직적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두 번 째는 각 부문운동 역량들의 관계형식입니다. 부문 운동역량이 느슨한 연합형식으로 관계하는가, 아니면 조금 발전된 연맹인가, 더 나아가서 전선(前線)인가, 파티(party)로서의 중앙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조직 수준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점에 있어서 매우 낮은 단계에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입니다. 각 운동부문들이 아까 얘기한 그런 존재론적인 의식을 탈피하지 못하고 확실한 중앙의 구심이 없어요. 그래서 저는 하방연대에 의해서 존재론적인 집단이기주의를 탈피하고, 부문 역량들을 조금 더 높은 형태로 조직화 해낸다면, 앞에 말했던 역사적인 계기를 창조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주체 역량이 생긴다고 보고 있죠. 물론 그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겁니다. 러시아나 중국의 경험에서도 그러한 분립(分立)과 정파중심의 시기가 상당 기간 지속하였었지요. 그리고 한 가지 반드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긴 호흡입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전민항쟁 형식의 실천모델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요. 바로 그 점과 관련된 것입니다만 목표의 달성보다는 과정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걸로 만들어내야 돼요. 목표달성이라는 효율성에 의해서 평가하려는 ‘도로’의 속성보다는, 그 목표에 이르는 과정자체가 의미 있어야 한다는 ‘길’의 문화나 정서를 운동가들이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는 한 소위 불가역적(不可逆的) 변화를 이끌어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사람과 제도가 함께 가는 구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구조자체가 다시는 뒤집어지지 않는 불가역적 구조로 굳혀나가는 실천방식이 필요한 것이지요. 생활의 운동화보다는 운동의 생활화를 주문해야 되지요. 긴 호흡을 가져야 되지요. 우리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여러 가지 오류라와 타성들을 반성하는 게 필요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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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1960년대부터 70년대, 80년대까지 보면 대중적 기반이 없는 지나치게 빠르게 구심화, 전위화가 돼 가지고 첨예하게 기존 지배권력하고 충돌하는 방식의 운동방식이었다면, 지금 90년대 이후에는 원심화 경향이 굉장히 강한 것 같습니다. 네트워크 이론과 연결돼 가지고 분산․원심 상태가 가장 좋은 상태처럼 돼 있는데요. 선생님의 말씀을 잘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원심성과 구심성이 적절하게 연결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강령화되고 교조화된, 어떤 목적 아래 빠른 시간 내에 조직돼서 결론을 보고자 하는 방식이 아니고 장구한 시간을 갖되, 원심성을 충분히 확보하면서 동시에 원심성이 개별 분산성으로 흩어지지 않고 다시 구심화되는 수렴구조가 이루어지는 불가학적인 어떤 형태의 운동조직이랄까요. 특정한 정치노선이 아니라 어떤 넓은 의미의 큰 틀에서의 네트워크랄까요. 그런 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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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 그렇습니다. 사회를 바꾸어내는 그런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는 게 필요하죠. 우리의 삶이 바로 네트워크지요. 그런 점에서 네트워크의 과제는 삶 그 자체의 문제라고 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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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그와 관련해서 해야될 이야기들이 참 많고, 또 선생님께 가르침 받고 싶은 이야기도 많지만, 그것은 다음 기회를 기대해야겠습니다. 오늘 말씀만으로도 너무 배운 게 많았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