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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사진
페터 슈테판 지음, 이영아 옮김 / 예담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이었다. 표지에 실려있는 아폴로11호의 달착륙 사진은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사진은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 기대도 그렇게 크게 하지 않았다. 별 생각없이 넘겨가던 나는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진과 레닌의 유명한 연설 사진에서 눈길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1차대전 이후에 터키는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했는데, 거의 100만명 가까운 대량학살이었다고 한다. 20세기 대량학살의 원조처럼 이야기되는 사건이다. 역사책에서 가끔씩 언급하는 이야기들을 들었는데 사진으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200명 가까운 아르메니아인들이 뼈와 가죽이 상접한 채로 죽어있는 장면은 지옥 그 자체다. 어쩌면 우리는 한국현대사를 통해서 이런 종류의 사진에 익숙한 사람들인데도 그 죽음의 장면은 처참하다. 담요에 덮여있거나 알몸으로 죽어있는 사람들의 군상은 어린아이에서부터 젊은이, 늙은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공동체를 이루고 살던 한 마을 사람들이 모조리 죽임을 당한 느낌이 든다. 이 한 장의 사진이 있어서 우리는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대해서 바로 알게 된다. 과연 영상은 글보다 직접적이다. 글로 쓴 기록들은 우리에게 상상을 요청한다. 그러나 사진은 상상의 여지를 줄여준다. 인식은 직접적이다. 그만큼 사진의 충격파는 크다.
이 책 속에는 85장의 사진이 들어있다. 20세기를 기록한 가장 유명한 사진들이다. 한번씩은 신문이나 책, 방송들에서 보아왔던 사진들이다. 사진으로 보는 20세기라고 책 제목을 달아서 무방할 듯하다. 이 책을 편집한 사람은 독일의 사진작가인데, 사진을 보는 시각이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 미디어를 보는 시각도 비판적이다. 현대에 들어와서 거대방송사와 신문사들이 보여주는 사진은 아무래도 사회적인 진실을 순화시킨 것들이 많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그런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른 사진들이다보니 극단의 시대이자 폭력의 세기라는 20세기의 본질적인 사건들을 포착한 사진들이 많다. 러시아혁명, 1차세계대전, 스페인내전, 2차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캄보디아학살, 냉전, 냉전의해체, 걸프전쟁. 대부분 전쟁에 관한 사진이 압도적으로 많다. 21세기의 상징이 된 9.11테러와 이라크전쟁에 관한 사진은 없다. 이 책의 원본이 나오던 2000년의 시점에 가장 비극적인 상징은 걸프전쟁과 보스니아 내전, 팔레스타인 분쟁 같은 것들이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21세기는 20세기보다 더한 극단이 시대가 될 지도 모른다는 우려 같은 것들도 들게 한다.
한국에 관한 사진은 딱 한장 나온다. 미국의 폭격기 여러 대에서 눈내리는것처럼 폭탄을 퍼붓고 있는 장면이다. 처음 사진을 볼 때는 늘 보던 사진이라서 별 생각없이 보았는데, 해설하는 사람의 해설이 정신을 번쩍들게 하는 말을 했다. 대강 이렇게 기억이 된다. 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의 산하는 지극히 평화롭다. 그 자연 속에는 특별한 군사적인 목표물이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미군은 엄청난 폭탄을 쏟아붓고 있다. 그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가 그 자리에 있던 피난민이거나 인민군이었다면 어땠을까하고 상상해보니 정말 끔찍했다. 그야말로 어떤 지역을 융단깔듯이 폭탄을 퍼붓는 한국전쟁의 시기는 '폭격의 시대'라고 할 만하다. 제공권을 장학했던 미군이 한반도에 쏟아부었던 폭탄의 양은 태평양전쟁시기에 일본에 대항해서 투하했던 것보다 더 많다고 한다. 폭탄은 군인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우선 폭탄으로 땅에 보이는 모든 움직이는 목표물과 무기로 쓰일 수 있는 것, 엄폐물로 이용될 수 있는 건물은 모두 부수어버린다. 물론 미군은 한반도를 공산주의의 위협에서 구원해준 십자군이었지만, 그 댓가로 한반도는 셀 수 없는 파괴와 죽음의 시기를 건너왔다. 미군이 한반도에서 퍼부었던 폭탄 중에는 네이팜탄이 많았다. 숲이나 마을을 통째로 태워버리는 폭탄이 네이팜탄이다. 베트남 전쟁 중에 네이팜탄을 맞은 마을을 피해서 아이들이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치는 유명한 사진이 있다. 막 10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가 불에 붙은 옷을 벗어버리고 울부짖으면서 도망치다가 미군을 만나는 장면인데, 나는 그 장면이 꼭 20여년 전에 한반도에서 벌어진 장면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단지 사진으로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만 다를 뿐이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사진을 들라고 하면 마릴린 먼로가 하얀 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다가 바람에 날려올라간 치마를 누르는 장면이다. 간디가 물레를 돌리고 있는 사진이나 아인슈타인의 사진, 레닌의 연설 장면 같은 사진도 마음에 들지만 웬지 먼로의 사진에 마음이 갔다. 보통 방송이나 신문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각도에서 찍은 사진인데 먼로의 풍부한 얼굴표정이 드러나있어서 마음이 가는 사진이었다. 그 표정과 눈빛 속에 들어있는 무엇인가가 섹스심벌이라는 기존의 먼로의 이미지와는 다른 느낌을 주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