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제국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재미있게 읽었다. 일요일 아침부터 읽었더니 점심 때 쯤 되니 끝난다. 이야기의 흐름이 빨라서 책이 술술 잘 넘어간다. 그렇지만 300쪽을 넘기니 잘 안 넘어간다. 후반부터는 좀 이야기가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가 51장면 정도로 분할되어 있는 것이 마치 영화를 쓰기 위해서 준비한 시나리오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문제는 그 시나리오가 좀 상투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지. 너무 냉소적으로도 보이고. 사이사이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에피소드는 실감이 났다. 기영의 북쪽생활 이야기에 나오는 그의 어머니의 죽음이나 정희라는 또래 여자아이 이야기도 감흥이 있었다. 또 마리의 아버지인 주류판매상 이야기도 좋았다. 박철수라는 국정원 정보원의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그런데 이런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가득한 데도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어떤 감흥, 혹은 문제의식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광고에 나왔던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라는 발레리의 시구는 사람을 끌어당겼다. 과연 이 소설 속에는 이 시대에 대한 어떤 생각이 담겨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보았던 것인데. '빛의 제국'이라는 제목과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어떤 내밀한 의미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는데, 결국 주인공인 김기영이 뭐하러 저렇게 헤매다녔나 하는 허탈감을 자아내게 했다. 후반부로 가서 기영의 아내 마리가 스무살 대학생 둘과 벌이는 난잡한 정사 이야기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읽는 내내 김혜수가 등장했던 <바람피기 좋은 날>이라는 영화를 떠올렸다. 뭐하러 저 따위 영화를 만드는가 싶게 한개의 소비품에 불과한 영화라고 보았는데, 기영의 아내 마리가 벌이는 정사도 이 소설의 문제의식과 꼭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이른바 386세대의 붕괴한 도덕의식이나 희망의 상실을 조롱하려고 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글쎄, 내가 소설을 그냥 이야기로 읽지 못해서 그런지 모르겠다.

기영이라는 인물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면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소설의 설정부터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10년 동안이나 상부선이 떨어진 남파공작원이라. 어쩌면 지은이는 이런 과도한 상황설정으로 우리 시대의 한 단면을 다루려고 한 것은 아닐까. 40대의  남자와 여자의 삶, 그들의 아이가 중등학교에서 겪는 삶. 어떤 면으로보든 속시원하지가 않다. 차라리 남파간첩이라는 설정을 빼버리고, 학생운동을 했던 부부의 삶과 도덕의식의 붕괴, 가정의 해체 현상 같은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렇게 메스를 들이댔다면 차라리 이해하기가 쉬웠을 텐데. 난데 없이 80년대 중반에 학생운동권에 침투했다가 10년 전에 상부선을 잃어버린 고정간첩이라니. <광장>에서 이명준이 월북하는 그런 동기나 이회성의 <금단의 땅>에서 다루어지던 남파공작원이나 자생적 사회주의자의 그런 고뇌가 없다. 한마디로 설정은 기막힌데 이야기는 상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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