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글샘 > [펌]최장집 교수의 위기 진단

[진보개혁의 위기] 최장집 교수 “민주주의 실천이 진보 출발점”
입력: 2006년 12월 21일 18:31:48
 
최장집 고려대 교수는 ‘진보세력의 과제’를 묻는 경향신문의 설문에 최근 자신의 ‘민주주의론’ 강의에서 한 학생의 이메일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작성했던 글로 답변을 대신했다. ▲민주노동당에 기대를 걸 수 있는가 ▲북핵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민주화 이후 ‘운동’은 어디로 갔는가 등의 주제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최교수의 글을 요약한다.

▶최장집 교수의 ‘위기 진단’ 인터뷰 전문


◇ 민주노동당, 기대할 수 있나요

“ “난 민노당을 생각하면, 딜레마 같은 걸 느끼네. 민노당이 한국정치와 사회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선, 오늘의 당 구조와 성격 갖고는 어렵지. 지금 당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제도적 실천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경제·사회적 삶에 심각하게 충격을 받은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는 정당으로 발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네. 그게 어렵다면, 민노당 밖에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야겠지.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둘 다 어렵다는 게 민노당에 대한 기대를 어둡게 하지. 당을 이끄는 사람들이 변화하는 것은, 민주화운동 시기에 가졌던 추상적 이념을 벗어 던지고 정당으로서 투표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고, 선거경쟁에서 표를 많이 획득할 수 있는 인물, 당의 이념과 강령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지.

민노당 지도부가 보통사람들의 삶과 직접 관련된 정치경제적 이슈는 미뤄둔 채,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묘소를 참배한다든가, 통일문제의 사명을 갖고 무비판적으로 북 지도부와 회담하는 모습을 볼 때, 민노당은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동떨어져 스스로 자기정당화를 위한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네. 민주주의의 제도적 실천이란 어떻게 일반 대중들에게 어필하고, 이를 통해 표를 동원할 수 있는가 하는 것, 투표자들이 당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지, 당 지도부가 그들 이념에 부합하는 행위를 하면서 자족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다고 민노당이 아닌 다른 그룹, 또는 그룹의 형성으로부터 새로운 당을 만든다는 것은 스스로 변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지 모르지. 오늘날 진보, 개혁, 민중적인 것에 대한 환멸의 시대에 그들 아닌 누가 보통사람들을 대변할 정당을 만드는 일에 뛰어들려 할 것인가. 현실적으로 민노당이 발전하는 문제는, 곧 현재 당을 이끌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변하는 것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을 것 같네.

FTA를 반대하는 것, 그것이 노무현 정부의 의도대로 관철되느냐 아니냐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 이를 반대하는 힘이 정치세력화되고 대안을 조직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네. FTA는 단순히 미국과 협정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라기보다 기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연장선상에서 나타나는 정책적 표현이라는 점이 중요하네. 이 거대한 힘을 운동만의 힘으로 막아낼 수 있을까? 또 막아낼 수 있다고 할 때 어떻게? 막았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은? 온 사회의 가치관, 비전이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는데 어떻게? 지금은 운동이 문제를 제기하고 힘으로 맞서고 있지만, 정치적으로 조직된 다수를 갖지 않을 때 결국 국가의 힘, 여론의 힘, 정책의 힘은 다른 형태로 관철될 것이기 때문이지.”

◇ 북핵문제 어떻게 풀어야 하나요

“한국현대사는 양분법적으로 이해돼 왔다. 한편에선 ‘김일성은 국제공산주의 세력 앞잡이이므로 남한만 정당성을 갖는다’(가)고 하고 다른 한편에선 ‘남한은 친일지주와 식민지 부르주아의 보수적 민족주의 체제이고 북한은 민족자주의 구현’(나)으로 이해하지. 이 양자택일의 역사관을 화해불능으로 만드는 게 바로 민족주의네. 그런데 한국의 많은 식자들은, (가)를 말할 때 무언가 떳떳치 못한 느낌을 갖는 경우가 많고 (나)에 대해 말할 때 현실과 동떨어진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일세. 보수파 인사들 사이에 이런 심리적인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아니면 보수적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부정하고, 발전주의로 대체하는 것이 역사 재해석의 방법으로 시도되고 있음을 최근 들어 자주 보게 되지. 또 혹자는 민족주의를 재강조하거나, 탈근대 이론을 들고 나오거나, 동아시아 공동체론을 들고 나와 이러한 분열의 역사를 봉합하고 무언가 합리성을 부여하려고 시도하는 것 같네.

여기서 이상한 건 아무도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현대사를 분석하려 시도하지 않는다는 거지. 민족주의가 민주주의를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일까. 내가 이해하는 민족주의는 일정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념이고 운동이지만, 지금은 이념으로나 가치로나 유효하다고 보지 않네. 오히려 한국사회 민중들의 사회경제적 삶의 현실을 민주주의의 제도적 실천을 통해 해결하는데 장애로 기능하고 있네.

이 점에서 대안은 분명해지네. ‘민족주의-통일’을 다시 추구할 게 아니라, ‘민주주의-공존’으로 가야 한다고 믿고 있네. 여기서 강조할 점은 평화공존이 통일의 중간단계라고 설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네. 평화공존은 평화공존 그 자체가 목표요 가치일 뿐. 남북한 각각이 독립된 주권국가로서 발전하게 될 때 한반도 평화의 제도화, 안정적 유지가 가능하다고 믿네. 평화공존의 이념적 기초 위에 북한 핵문제도 다룰 수 있을 것일세.

북한이 핵무장을 포기토록 하는 것이 대북정책과 대외정책의 최우선 과제가 돼야 하네. 북한 인권문제 역시 외부로부터의 개입이 북한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한 어떤 틈새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조건에서, 그리고 그것이 북한주민들의 기본권을 지원하는 데 효과가 있기를 기대할 수 있다면 정당하다고 생각하네. 나는 한국사회가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로 양분되고 힘을 가진 집단들이 모두 제어할 수 없는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과거보다 더 많이 허용되는 이 불안정한 민주주의 사회, 극단적 갈등과 이익 충돌을 제어하고 이를 민주적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체제가 어떻게 전혀 다른 사회를 민족의 이름으로 통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솔직히 이해할 수 없네.”

◇ 민주화운동은 어디로 갔습니까

“나는 민주화의 궤적을 들여다 보며 민주화 이후 민중주의적 요소가 왜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사라져 버렸는가 하는 문제에 큰 관심을 갖네. 온 사회를 혁명에 가깝게 뒤흔들어 놓은 그 운동은 어디로 사라졌나. 그 요란함, 그 영웅주의, 그 많은 민중주의적 담론들, 그 많은 변혁을 향한 외침들은 다 어디로 갔나.

참여적이고 개혁적이고 자주적이라며 큰소리 쳤던 민주정부가 왜 그 외침과는 정반대로 노동자·농민 같은 생산자 집단을 소외시키고, 삶의 희망을 상실한 사회저변층이 살인·자살·가정해체 등을 겪도록 허용하는지, 왜 권위주의 시절보다 더 재벌중심-노동배제를 축으로 하는 성장일변도 정책을 추구하는지 설명돼야 한다고 보네. 이 시점에서 운동이 만들어낸 민주주의의 결과를 되돌아 보자는 걸세.

운동이 어떤 비전이나 가치를 구체화해 헤게모니에 대항하고, 시민사회에서 상당히 큰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취약한 게 입증된 셈이지. 민주화 이후 시민운동은 헤게모니의 한 주변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정부에 참여한 그룹,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에서 새로운 엘리트로 등장한 민주화세대의 역할은 때론 헤게모니에 충실하고, 때론 어설픈 전달자가 되고, 때론 개혁의 이름으로 더 빨리 더 유능하게 헤게모니를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네.

한가지 예를 들 수 있네. 서구의 ‘68혁명’에서 추구된 목표는 ‘개인자유’와 ‘사회정의’였네. 이 두 가치는 지양되면서 하나로 통일되기보다 긴장과 함께 좌파운동의 결과를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이끌었네. 좌파운동은 두 가치가 내장하는 긴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면하는데 실패했어. 파리, 버클리, 베를린 등에서 학생들이 추구했던 운동의 가치는 가족·기업·국가 등의 권위로부터의 더 많은 개인자유와 동시에 사회정의를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았지. 그러나 자유와 정의는 언제나 공존 가능하진 않다는 데 문제가 있지. 68혁명 때 불안정하게나마 결합된 두 가치는 이후 운동의 과정에서 해체됐지. 그 중 개인자유는 신자유주의 레토릭과 교묘하게 결합했고. 반권력, 시장자유, 정체성의 정치, 다문화주의, 나르시즘적 소비주의 등의 요소를 국가권력의 획득을 통해 사회정의를 추구하고자 하는 사회세력으로부터 분리해내는 효과를 발휘했지.

서구 사례가 한국 경험과 꼭 같진 않지만,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이후 시민운동들이 도시의 교육 받은 중산층 중심 운동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중산층적 비전과 가치가 그들의 경험세계와 동떨어진 노동문제, 사회저변층, 소외계층의 삶의 문제를 절박하게 인식하고, 그에 정치적으로 대처하고자 하는 관심과 의지를 강하게 하는데 얼마나 기여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오늘날 운동이 가진 성격이나 문제점이 쉽게 이해될 것이라 보네.”

〈정리|손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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