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공 붕괴
해도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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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공 붕괴』는 표지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빛이 쏟아지는 사진에 연한색으로 유광 처리가 된 제목은 은근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블로그에 올릴 서평을 위한 사진을 찍을 때, 책의 내용과 주제, 그리고 표지와 어우러지는 배경을 선정하며 나름 신경써서 촬영한다. 이 책의 표지는 환상적이면서도 밝은 빛의 모습이 잘 드러나면서도 제목이 보이기 위해선 강렬한 태양빛 아래에서 찍어야 했다. 의문의 길바닥 뷰가 되었지만 제목도 표지 이미지도 잘 드러나 이 사진을 표지 사진으로 고르게 되었다.


  뒤표지에는 SF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정보라 작가의 추천사가 있다. 저자인 해도연은 잘 모르더라도 추천사를 어떤 사람이 어떻게 썼느냐에 따라 책을 향한 기대감은 달라지기 마련인데, 정보라 작가의 추천사를 먼저 읽으니 '정교하고 장엄'한 해도연의 작품 세계가 매우 기대되었다.


  첫 번째 소설 「검은 절벽」은 필립 K.딕 상을 받은 『데드 스페이스』가 생각이 났다. 광활하고 새카만 우주를 배경으로 인공지능과 이러쿵저러쿵하는 내용은 여러 매체를 가리지 않고 등장하지만, 해도연 소설은 그 안에서도 사랑을 뒤섞어 두었다. 그리고 단편 소설답게 내용에 공백을 두어 읽는 사람이 상상할 여지를 충분히 준다. 이 소설 역시 SF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읽으면 훨씬 몰입이 잘 된다.


  "지구라는 유한한 땅 밖으로 거침없이 뻗어 나가는 살인, 사랑, 광기가 뒤엉킨 압도적 서사"


  뒤표지에 쓰인 마케팅 문구처럼 전반적으로 인간미가 넘치면서 서늘한 기분이 느껴지는 소설집이었는데, 그 중 가장 마음이 아팠던 소설은 「콜러스 신드롬」이었다. 웹툰 「똑 닮은 딸」의 명소민이 생각나는 초반 전개에 의아하기도 했고, 재호가 영화 〈어바웃 타임〉의 톰처럼 스윗한...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재호는 그냥 미친놈이었다. 미친놈.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도 나오지만 시간을 멋대로 오가다보면 여러 시간선이 생긴다. 이는 『유월의 복숭아』처럼 웹소설에도 등장하는 타임루프물에서 지적하는 '시간여행의 어두움'이다. 그렇게 반복하다보면 시간여행자는 알지만 바뀌어버린 당사자는 모르는 그 간격에서 서사가 생기는 게 정설이다. 이 소설은 시간여행의 객체인 유슬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분위기가 급변한다. 당찬 유슬이 윤하를 그에게서 놓아준 이후, 한 챕터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는 이기적인 남자가 파괴한 여러 생명을 생각하며 씁쓸해지는 기분이었다. 비슷한 이미지로 「마리 멜리에스」 역시 과학이 해결하지 못하며 감정만이 구원하는 이야기에 찌릿찌릿한 느낌이었다.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과학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 쓴 SF 소설은 새로운 재미였다. 설정은 채우되 서사는 비우며 상상할 여지를 많이 준 점도 좋았다. 다만,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 소설은 많이 읽다보면 얼추 패턴이 보이다보니 SF 입문자라면 나보다 훨씬 즐겁게 읽을 거라 생각한다.


* 하니포터 10기로서 한겨레출판에서 책을 제공받아 솔직한 서평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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