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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온라인 게임
김동식 지음 / 허블 / 2025년 1월
평점 :

미용실에서 볼륨매직을 하는 날이었다. 미용사가 머리를 계속 만지고 있다보니 이어폰을 사용하기도 난감하고, 화면이 뻔히 보이니 SNS도 열기 싫었다. 그럴 때면 나는 핸드폰으로 이북을 읽는 편인데, 리디 셀렉트의 메인을 둘러보다 '우주라이크소설' 카테고리가 보였다.
강렬한 서사! 오직, 리디에서만! ⟪우주라이크소설⟫ ☄️
도대체 어느 정도길래? 둘러보니 김동식 작가의 책이 있었다. 한국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김동식 작가를 모르기 쉽지 않다. 공장노동자 출신 초단편소설을 쓰는 작가. 나는 김동식 작가를 딱 이정도의 수식어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라디오 일을 하면서 작가와 직접 만나기도 했지만, 주로 에세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보니 오히려 작품 자체는 잘 몰랐다. 대중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만큼, 어느 정도의 기대감을 안고 책을 펼쳤다.
이 책은 세 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김동식 작가의 첫 단편집이다. 처음 쓴 단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읽었는데 전혀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힘이 대단했다.
첫 번째 단편이자 표제작인 「현실 온라인 게임」은 서울이나 수도권 거주자라면 쉽게 몰입할 수 있는 배경이다. 여러 지하철역을 거점으로 퀘스트를 해결하는데, 이런 점에서는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의 초반부가 생각나기도 한다. 소설의 주 무대를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다는 건 독자가 깊게 몰입해 상상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이어진다. 소설을 읽으며 '나도 저런 퀘스트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라는 희망이 피어나는 건 당연하다.
〈현실 온라인〉을 하고 있으면 내가 특별하게 느껴지거든.
한때 게임에서 농사를 지으면 실물 농산물을 받을 수 있던 '레알팜'처럼 이 소설 속 <현실 온라인>은 즉각 입금&배송되는 퀘스트 보상과 유럽 중세풍의 스토리로 주인공에게 엄청난 효능감을 준다. 그런데 그 퀘스트의 내용이 점점 수상해지면서 주인공에게 큰 고민거리를 안겨준다.
이 소설의 내용은 어딘가 낯설지 않다. '고수익 아르바이트'라는 이름으로 나도 모르게 보이스피싱, 대포통장, 마약 운반(지게꾼) 등의 범죄에 연루된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기 때문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소설 속 〈현실 온라인〉은 알바가 아닌 '게임'이라는 점이다. 퀘스트를 수행하고 보상을 받고, 레벨업을 해서 스킬을 사용하는 게임 말이다.
지시를 내리는 '최 팀장'과는 텔레그램으로만 소통했는데 첫 지시는 피시방에 뒀다는 서류봉투를 가져오란 거였습니다.
KBS 뉴스 / [단독] “고수익 알바에 속았다”…대포통장 부르는게 값
넥슨 UX 분석실에서 분석한 '게임에서 이탈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성취와 몰입의 나비효과가 있다. 소설 속 김남우와 홍혜화도 〈현실 온라인〉을 플레이하며 즐거움과 쾌락을 느껴 몰입도가 올라간 상태다. '하룻밤에만 보상으로 10만 원 넘게 벌'며 게임을 통한 성공 경험이 계속 플레이하고 싶은 동기 부여가 되었고, 결국 무언가 잘못된 걸 알면서도 끊을 수 없이 몰입하는 결말로 흘러간 것이다.
위와 같은 글에서, 달성하지 못한 목표일수록 계속 아른거리고 생각나는 심리현상, 자이가르닉 효과 때문에 게임에서 이탈하지 못한다고 한다. 김남우도 고급 퀘스트 두 개를 실패하고, 어떤 보상이 있을지 계속 생각이 나고 홍혜화를 통해 퀘스트를 수행하려는 짓까지 벌이게 된다.
이 소설은 굉장히 몰입도 높은 게임 시스템으로 사람을 어떻게 조종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마지막 반전까지 술술 읽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이 단편집의 표제작으로서 '레벨업'을 향한 열망을 가장 잘 표현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제일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작품은 마지막 단편인 「내일을 부르는 키스」였다. 타임루프는 영화 〈사랑의 블랙홀〉, 〈엣지 오브 투모로우〉, 웹소설 『리셋팅 레이디』, 『유월의 복숭아』 등 정말 많은 콘텐츠에서 사용하는 소재인데, 이 소설에서는 '키스'라는 장치를 통해 타임루프를 통제할 수 있게끔 해두었다.
중반까지 전개는 매우 빠르게 흘러가 주인공 부부가 미친듯이 많은 부를 쌓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모습을 몰아치듯 보여준다. 석상의 저주를 생각할 틈도 없이 폭풍 같은 이야기가 지난 후,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된다. 다음날로 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오싹하면서도 처참한 마음이 든다.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급박한 전개에 숨도 못 쉬고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마지막 홍혜화의 선택까지 예측 불가한 이야기가 정말 흥미진진했다.
단편집 전체에 깔려있는 '레벨업'을 향한 욕망은 노골적이고 원초적이다. 그리고 대가가 필요하다. 어쩌면 추하거나 무거운 소재가 될 수 있던 이야기를 저자는 아주 재치있게 풀어낸다. 술술 읽히는 필력만으로도 이 소설은 5점짜리인데, 통찰력 있는 결말까지 빼놓을 게 없다.
이 소설을 끝까지 읽으며 저자의 다른 책이 몹시도 궁금해졌다. 초단편소설은 어떤 매력이 있을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