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나갈 하이바맨의, 바로 앞 이야기입니다. (만화는 입학식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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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왜 기계과 학생회장이 남의 집행부 걱정까지 하는지 모르겠지만.

집행부도 아니고 그냥 내켜서 따라가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먹을 입만 갖고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여기는 공과대학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집행부가 완전 남탕이라 고민하고 있던 연의 입장에서, 말 잘 통하는 가까운 후배인 월미가 따라가도 되느냐고 묻는데 말릴 이유가 없다.

“당연하지!”

그런고로 호박꽃도 꽃이고 멸치도 생선이라. 여자치고는 그다지 같잖지만 그래도 여자애잖아. 그런 희한한 이유를 들어 전산과 학생회는 만장일치로 월미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먹을 입만 갖고’ 따라오는 것을 환영하였다. 뭐, 이유가 별 게 있겠나. 신입생 여자애들도, 선배라고 온 사람들이 모조리 남자면 좀 긴장할 것 아니겠냐고요.

“애들 뭐 특이한 거 있어?”

“아아뇨.”

그래서 뭐, 공짜 여행이라고 생각하고 따라간 새터였지만.

새내기 새로배움터라고 굵은 글씨로 적힌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였다. 월미는 눈 쌓인 응달에서 얼어 뭉친 눈을 발로 툭툭 치며, 아래로 멀리 펼쳐진 산과 비탈과 숲과, 그리고 그 사이 선명한 줄을 내고 있는 도로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데서 죽으면, 뼈도 못 추리겠네. 입고 있던, 새빨간 바람막이 점퍼의 지퍼를 목까지 올렸다. 점퍼 뒤에 붙은 후드가 바람 부는 대로 펄럭이며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철이 오빠가 얼마나 한심해 하면서 신입생들을 고르고 있었는지 상상이 가는데요.”

“그래도 너야 처음부터 튀었잖아.”

연은 옆에 다가와 함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늘 신경써서 닦아놓는지, 그의 귀에 걸린 외짝 귀걸이는 흐린 하늘 아래에서도 반짝였다.

“너도 그렇고, 태우도 그렇고. 그래, 태우 그 녀석. 그 다리를 하고도 굳이 새터 따라와서, 전자과에서 그렇게 골치 썩었잖냐.”

“그건 전자과가 나쁜 거죠. 다리가 그렇다고 새터도 못 따라온다고 지레 생각하는게.”

“산은 불편하잖아.”

“못 걷는 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래도 올해는, 태우도 굳이 따라오지는 않았다. 전자과 집행부도 아니고, 그렇다고 월미처럼 희소가치 만땅인 여자도 아니고. 월미는, 작년과 굳이 같은 곳으로 오고 있는 학교의 게으름을 속으로 비웃으면서도, 이곳에서 작년에 일어난 일들을 하나씩 추억하는 듯 보였다. 연은 쭈그려 앉은 채 멀리, 안개에 젖은 산줄기를 바라보았다. 아침 공기는 차가웠다.

“작년에 기억나요?”

“뭐가.”

“굳이 병장휴가까지 받아서 왔잖아요. 두 사람.”

“……잊어버려.”

“그때 애들이 뭐랬는지 기억나요? 연이 오빠랑 관석이 오빠, 사랑하는 사이 같다고.”

“으으, 대체 사내새끼들이 왜 그딴 소리를 하는 거야? 훠이!”

“그 귀걸이.”

월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시원했지만, 산 공기는 순간순간 살을 에일 듯 차가웠다. 손등이 따끔거리고 옷을 스칠 때마다 따가운 아픔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월미는 여전히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깊이 산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땐 없었어.”

“제대하자마자 하고 왔잖아요.”

“……그랬지.”

연은 쓰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면서 자꾸, 놀리는 거 아냐.”

“오해받기 싫으면 이제 슬슬 마음 정리하지 그래요.”

“마음이 물건이냐, 정리를 하게.”

멀리, 산 너머로 이제는 붉은 기가 빠진 아침 해가 삐죽, 모습을 드러내었다.

“밥 때네.”

“그렇네요.”

“오늘 밤에 술 있는 거 알지? 새내기들 작작 죽여.”

“어머, 난 여자애들은 안 괴롭히는 거 아시잖아요. 주량껏 먹고 숙소 돌아가게 제가 책임지고 도와줄 테니까.”

“남자애들.”

“……”

“야, 월미도.”

“……솔직히 마음에 드는 놈들이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월미도, 어깨를 떨며 연과 함께 숙소 쪽으로 걸어올라가기 시작했다. 일찍 일어나는 벌레가 새에게 잡아먹힌다고, 숙소 근처에서는 벌써 일어나서 돌아다니는 새내기 몇 마리가 자기들끼리 오글오글 모여서 놀고 있었다.

“흥미 없어요. 점수 맞춰 온 붕어빵.”

“너희도 그랬어.”

“난 나름대로 생각이라는 걸 했다고요.”

“그랬지. 하지만 떼로 모여 있으면 다 똑같아 보이지. 그래, 건질만한 게 하나도 없어?”

“……이상석인가, 안경쓰고 그 성격 까칠한 애하고.”

“난 걔랑 다니던 녀석들이 더 신경 쓰이던데.”

“……머리 사방으로 삐죽삐죽한 양아치 말이에요?”

“걔 말고. 너무 평범해서 보이지도 않는 애 있잖아.”

“김경민?”

“어.”

“그야말로 친구 따라 강남 온 것 같던데?”

“왜, 능력을 보여줘 봐, 서월미.”

현관 쪽으로 걸어가는데 그 까칠한 놈과 양아치와 평범남이 구석에서 덜덜덜 떨다가 꾸벅 인사를 했다. 부실한 것들. 해병대 출신인 연은 속으로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그 나이의 사내새끼들이란 말이야. 야심을 부추기면 산도 옮길 수 있을 걸? 부추겨 봐. 1년 후 그 녀석들이 어떻게 될 지 궁금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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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하잖아.”

기계과 학생회장, 이제 3학년 올라갈 예정인 박관석은 대놓고 입을 댓 발은 내민 채 끊임없이 투덜거리기만 했다. 두어 걸음 앞장서서 올라가던 키가 작은 여학생은 뿔테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며 관석을 돌아보았다.

“대체 그러니까 뭐가요?”

“뭐라니. 오늘이 무슨 날인지 생각 좀 해 봐.”

“2009년 2월 14일 토요일이죠. 덧붙여 오늘 아침 8시 31분 30초에 유닉스 타임으로 1234567890초가 지나갔어요. 나름대로 우리 컴과에는 역사적인 날인데, 왜요?”

“……난 기계과잖아.”

관석은 여학생의 머리에 손을 텁 하고 얹으며 앞으로 추월해 나아갔다. 작기는 작네. 이녀석은 키도 안 자라나. 이러니 대학생 나이에 중딩 취급이나 받고 말이야.

“야, 월미도.”

“왜요.”

“왜요는 왜놈의 이부자리가 왜요라고. 아니, 넌 여자애가 2월 14일 하면 뭐 떠오르는 것도 없어?”

“3월 14일은 파이 데이인데 2월 14일은 뭐 있어요?”

“얌마……”

아니, 그래도 평범한 여중딩은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지. 너무너무 잘 알겠지. 이런 녀석과는 달리. 관석은 대체 뭘 믿고 이렇게 한심한지 알 수 없는, 전산과 2학년 서월미 학생을 붙들고 한숨을 푹푹푹 쉬기 시작했다.

“발렌타인 데이잖아, 발렌타인 데이! 이런 날은 역시, 사귀고 좋아하고 그런 사이 아니더라도 나하고 너처럼 이렇게 서로서로 사이좋게 상부상조하며 잘 지내는 선배와 후배라면, 뭐랄까, 그냥 가나 초콜릿 한 토막이라도 갖다주면서.”

“……의리초코?”

“그렇쥐.”

“관석이 오빠.”

“응?”

“그러니까 얼마나 일본 야겜을 많이 하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기는 한국이라니까.”

“야, 일본 야겜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에서도 친구한테도 초콜릿은 주더라!”

“아, 이런 거 말이죠?”

월미는 등에 메고 있던 큼직한 책가방을 한 팔에 걸치고, 지퍼를 열었다. 가방 속에는 고디바 한 상자에, 틀림없이 손으로 만든 것 같은 초콜릿에, 이것저것 초콜릿이 종류별로 들어 있었다. 관석은 반색했다.

“그래, 바로 이런 것!”

“이런 것 말이죠오……”

공학관을 벗어나 공대 계단을 내려갔다. 월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학관 꼭대기 탑까지 올라가야 하니까 뭐, 이대로 계속 걸어도 되겠지만. 월미는 가방 가득 들어있는 초콜릿을 보여만 주고 그냥 말 없이 걷기만 했다.

“야, 월미도.”

“……”

“서월미.”

“……”

“얌마.”

“가서 먹어요, 가서.”

하다가 월미는 가방을 벗어 내밀며

“아니면 가방이라도 들어주든가.”

하고 퉁을 놓았다. 관석은 가방을 받아들었다. 어쨌거나, 초콜릿 한 조각 얻어먹기도 더럽게 힘든 세상이다. 각박하기도 하지. 백화점 이마트 홈플러스까지 갈 것도 없다. 바로 교문 건너 거스름돈 수퍼마켓만 가도 발렌타인데이라고 커다란 바구니에 리본을 달고 중국산이건 인도산이건 초콜릿을 가득가득 쌓아놓았는데.

어째서 공대는, 그 흔한 가나 초콜릿 한 조각 못 얻어먹어서 말이야.

“아, 너…… OT 갈 거냐?”

“……제가 왜요?”

“전산과 집행부가 순 사내놈들밖에 없잖아. 너라도 가 줘야, 새내기 여자애들도 좀 안심을 하고 그러지. 여자애들만의 뭐야, 좀 민감한 문제들도 있고 그렇잖아. 너네 집행부랑 사이 나쁜 것도 아니고. 연이도 있으니까 뭐.”

“그러니까 전산과 집행부에 여자가 없는 것을 왜 기계과 학생회장님이 걱정하시는데요.”

“……”

“그러니까 제 블로그.”

“……됐다.”

뭐,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월미의 블로그 이야기가 나오면 관석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또.

하여간 이 한심한 선후배는 이학관 5층까지 올라가서, 다시 10층까지 이어진 계단으로 올라가 맨 꼭대기에 있는 대수경실 문을 열고 들어갔으니.

“어, 왔어?”

화공과 대학원생 황철 선배에다가, 전산과 학생회장 이연 선배, 그리고 월미의 동기이기도 한 전자과 윤태우가 사이좋게 모여 월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월미는 가방을 열고, 노트북 컴퓨터와 프랭클린 플래너만 먼저 빼 놓고는 나머지 내용물을 그대로 책상 위에 탈탈탈 털어놓았다. 책상 위는 그새 초콜릿으로 수북하게 뒤덮였다.

“올해는 비싼 게 많네?”

태우는 얼른 고디바를 집어들었다가 연이의 시선을 느끼고는 얼른 책상에 그대로 내려놓았다. 다리가 불편한 태우 대신 연이 일어나 물을 끓이고, 지난번 진 교수님이 가져다 주신 홍차를 넉넉하게 우려내었다.

“응, 오빠가 좀 고생했거든.”

“오빠?”

그나마 월미가 초콜릿을 가져올 것이라는 이야기 정도는 들은 연과 달리, 관석은 오빠와 초콜릿이 무슨 상관이 있나 싶어 눈을 깜빡거렸다. 월미는 꽃장식과 비닐에 꽁꽁 싸인 초콜릿을 풀어놓으며 대답했다. 테이블 구석에는 어느새 쓸모없는 꽃장식과 레이스 장식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큰오빠요. 우리 큰오빠. 샘승 SDS 다니는.”

“근데?”

“……큰오빠가 매년 초콜릿을 이만큼씩 받아와서. 작년에도 불우 공대생이나 돕게 내놓으라고 하니까 이만큼 줬거든요. 그때야 연이 오빠하고 관석이 오빠는 군대 있었으니까 못 얻어먹었지만.”

월미야 뭐 매년 보는 풍경이니 태연히 말했지만.

“근데 우리 오빠도, 정작 여자 사귀는 것은 영 서투르다 보니 사귀면 뭐 제대로 되어 가는 게 없는데, 그래도 발렌타인마다 이만큼씩 걷어들이는 것 보면 구르는 재주는 있단 말이에요. 음? 관석 오빠 뭐 해요?”

평생 소원이 여자친구 사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꽃도 부끄러워할 스물 네 살 청춘에 여자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한 기계과 학생회장 박관석은 그대로 바닥을 파헤치고 9층 8층 7층으로 내려가 그대로 지하실까지 뚫어버리고 싶었다. 인생. 공대 나왔으면 공대 나온 인생답게 여자와 인연없이 살란 말이다. 무슨 공대 출신의 샘승 SDS가 발렌타인마다 초콜릿은 초콜릿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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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야말로 대한민국의 승리라 할 수 있겠지.”

교수실 문 앞에 가득 붙어있는 초콜릿과 장미꽃을 떼어내며, 진시형 교수는 중얼거렸다. 진 교수의 제자인 김치국 조교는 라면박스에 초콜릿을 정리해 담으며,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혀 시들지 않은 미모를 자랑하는 저 대단한 교수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대한민국의 승리요?”

“그렇다네. 발렌타인 데이를 초콜릿 주는 날로 대대적으로 퍼뜨린 것은 일본이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설치고 다녔던 것은 다름아닌 롯데였거든.”

“……”

“자네도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 가지.”

“……괜찮습니다.”

“음? 이건 홍대 앞에 새로 생겼다는 초콜릿 샵의 상자인데. 어디. 생초콜릿이로군. 얼른 정리하고 들어오게. 차 끓여놓을 테니.”

“교수님.”

“음?”

“……발렌타인에 초콜릿 하나 못 받은 것은 서럽습니다만, 그렇다고 오늘 같은 날 교수님과 티타임을 갖는 것도.”

“무슨 문제라도?”

“……”

“……음?”

“……아닙니다. 차 끓이십시오. 얼른 정리하고 들어가지요.”

“그래.”

진 교수는 주머니에 비스듬히 손을 찔러넣은 채 미소지었다.

“저녁때는 대수경반 아이들이라도 불러야겠군. 오늘도 다들 나왔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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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과 과학은 인생에 쓸모가 많으니까.”

TV 속의 그 남자는, 요즘으로 치면 디지털 도어락이라 부르면 될, 숫자암호를 입력해야 열리는 문 앞에 서서, 연필을 깎아 만든 고운 흑연 가루를 입김으로 불어 날렸다. 지문이 묻은 네 숫자를 두고 남자는 간단하게 경우의 수를 확인하여 눌렀고, 문은 열렸다.

옆에서 멍하니 모니터를 들여다보면 오빠가 말했다. 남자라면 마땅히 저래야지.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말이 맞았다. 남자라면 마땅히 저래야 한다, 는 생각이 든 것은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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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정말.”

수강신청을 하러 간 날부터, 학교 전산실 형광등이 나가는 꼴을 보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막 합격한 국가직 공무원이 부처배정 받으러 청계천 옆 인사위원회 건물로 걸어가다가 행운을 기원하며 던진 동전을 청계천이 퉤 하고 뱉는 것 같은 형국이랄까. 1학년 서월미는, 혀를 차며 전산실 구석을 돌아보았다.

오호 통재라, 이 세상에 사내다운 사내는 다 죽은지 오래로구나.

구석에 스페어 형광등이 몇 개 있기는 했다. 형광등이 있네. 남자애들이 중얼거렸다. 말만 하면 뭘 하자는 거야. 책상만 밟고 올라가도 키가 닿을 것들이, 저러고 어리버리 서 있으면 뭐 하자는 거야. 이건 백치미도 아니고. 기가 막혔다. 저 답답한 것들이 이제부터 4년을 함께 할 동기생들이라니. 월미는 혀를 찼다. 책상을 끌어다 놓고, 키보드를 옆으로 밀고 그 위에 의자를 턱 올려놓고, 형광등을 빼앗아들고 그 의자 위로 올라가는 데는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냥은 손이 뜨거우니까, 주머니에 들어있는 장갑으로 형광등을 감싸 돌려 빼고 새 형광등을 꽂았다. 그리고.

“이거 좀 받아봐.”

아래에서 올려다보던 남학생 아무에게나 형광등을 내밀었다. 자, 이제 내려가기만 하면 되는데.

“어…..!”

어제 새로 맞춘 안경 때문인지, 발 밑이 허황했다. 휘청 하고 몸이 기울어지려는 것을, 누군가가 받아주지 않았다면 크게 다칠 뻔 했다. 누군지 돌아보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빰빰빰빰 빰- 빰빠빰-

어디선가 맥가이버의 주제가가 터져나왔다. 남자의 휴대폰이었다.

“아, 여보세요.”

월미를 받아준 남자는, 머리가 짧고 키가 큰, 뿔테안경을 쓴 남자였다. 여기서 조금만 더 관찰력이 있다면, 그가 말년휴가를 나온 공군 병장이라는 사실도 쉽게 알 수 있을 터였다. 저 색깔 군복이야 공군 것이고, 공군도 예비역은 일반 개구리복을 입으며, 그냥 일반 육군 출신으로 예비군 훈련을 다녀오는 것이라면 굳이 머리를 그렇게 짧게 다듬을 리 없으니까 말이다. 남자는 모자를 고쳐 쓰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아, 좀 가만 있어 봐. 드디어 찾았어.”

월미는 의자를 내려놓고 키보드를 제 자리로 돌려놓았다. 남자들만 가득한 전산실에 혼자 여자라니. 다른 방에는 여자애들이 더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하여간 여기 제 1전산실에 국한해서 하는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눈에 튈 텐데, 이런 소동까지 있었으니 동기들이 이름 외우는 것은 순식간이겠다. 그런데, 저 군인 아저씨가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찾던 여자가 드디어 나타났어!”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월미는 “박관석”이라는 이름과 병장 계급이 달려있는 남빛 군복을 걸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씨익 웃더니.

쿨한 남자라면 역시 리눅스지. 리눅스 안 배울래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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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둘째 오빠가 kldp 죽돌이라서 리눅스는 좀 쓰는데요.”

“어, 뭐 써요? 난 우분투 쓰는데.”

“젠투요. 근데 군대에서 리눅스를 써요?”

“아, 말년병장이라서. 그리고 공군은 원래 한달에 사나흘씩 외출 있어요. 이름 뭐예요?”

“……”

“뭐예요, 같은 리눅서끼리.”

“우리 오빠가, 군인아저씨나 예비역 아저씨는 믿지 말라고 했는데요.”

“아저…… 아저씨라니!”

그것이 저 특이한 관석이 오빠와

“3대 맥?”

맥킨토시, 맥가이버, 맥도날드. 기계과 박관석을 이루는 세 가지 요소라고 했지. 관석이 군대 가기 전 별명이 그래서 맥이었어, 맥. 삼위일체의 맥.”

“아…… 잠깐, 그럼 관석오빠는 우리 과가 아니에요?”

“아, 우리 과도 아닌데 우리 전산실에 멋대로 드나들지? 썩을.”

성실하기 그지없는 연이 오빠와의 첫 만남이었다.

“이봐, 나 전산과 복수전공이라니까.”

“시끄러, 됐어.”

그리고 맥가이버같은 남자라고 해서 반드시 사내다운 사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은, 아마 그 무렵에 깨닫게 된 이야기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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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시한 프리퀄은 월미가 대학에 입학하던 2008년 2월 말의 이야기로

하이바맨의 초고로, 막장 공대녀가 양손에 기술의 컴과/힘의 기계과 학생회장을 쥐고(연과 관석) 삼각관계를 펼치는 “우리 애인은 맥가이버”(가제)라는 제목으로 끄적이던 물건입니다. 이미 이때도 월미-관석-연의 성격은 다 나와 있었고, 아직 진교수는 만들어지기 전이었죠. USB에서 지난 파일을 찾다가 발굴하고 올려놓아 봅니다. 퇴고하지 않은 물건이라 대사나 묘사가 엄청 러프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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