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대학은 지성과 학문의 전당으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지성인들이 주먹을 쥐고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며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곳인 동시에, 지구가 멸망해도 나는 오늘 실험 데이터를 모으겠다는 정신으로 목숨을 걸고 학문에 몰두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대학을 두고, 사람들은 상아탑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높이 여겼다.

그러나.

"으아, 으아, 으아악!!!!!"

물론 입학식도 치르기 전에 공대 계단 앞에 쭈그려 앉아 이런 괴성을 질러대는 나도 문제는 문제였지만.

"젠장!!!!!!"

갓 입학한 새내기를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넣는 악덕 교수 또한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진담으로 하는 말이다. 정말로. 아니, 아닌 말로 배우지 않고서 그걸 다 알면 비싼 돈 들여 대학에 왜 오나. 적어도 첫날 첫시간부터 일부러 학생들 기 죽이고 그러는 건. 그래, 진짜 실력있는 교수 같으면 그런 심술은 안 부릴 거 아냐.

"심하긴 했지, 입학식도 하기 전인데."

"어려운 문제라고 하긴 그렇지만, 갑자기 그렇게 나와서 풀라고 하면 말야."

상석이가 아까의 미적분 50문제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래. 어려운 문제라고 하기는 또 그렇다 이거지? 나 같은 놈은 죽어야지. 나는 책가방에 머리를 쿡쿡 처박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며 선언하듯 말했다.

"대체!"

"대체 뭐?"

"미적분이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대체, 첫날 첫 시간부터, 싫건 좋건 4년간 함께 할 학우들 자기소개도 하지 않은 채!"

물론 OT 가서 자기소개 할 것 다 하고 술도 푸지게 먹고 왔다는 사실은 잠시 넘어가자. 음, 잠깐만.

"칠판에 줄 긋고 문제 풀이라니! 오호, 통재라. 학생의 우정과 인격 도야에는 흥미없다 이건가?"

"첫날부터 쪽 당했다고 삐지기는."

상석은 빙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뭔가 슬쩍 낯이 붉어지긴했지만, 그래도 싸나이 김경민, 한번 꺼낸 말인데 결론은 내야 할 것 아닌가. 대가리만 몸통만 있는 것은 생선도 아니지, 암.

"오리엔테이션이나 그런 것도 없는 거냐? 대학은 단순히 지식전달의 장일 뿐인거냐? 각성하라!"

"그래그래, 김경민을 국회로."

아니, 뭐. 꼭 내가 또 그 문제 못 푼 것 때문에 이러는 것은 또 아니다. 그건 아닌데.

그건 아닌데 말이다......

-후...... 큰일이군요.

누나가 대학 가기 전에 공부하라고 못이 박히게 떠들긴 했지만 사실 토익책이나 좀 봤을까. 수능 끝나자마자 엿바꿔먹은 수학책을 생각하며 나는 칠판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래, 뭐. 고등학교 3년 통박 굴린 것 생각하면 이게 문제가 풀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게 아니라는 사실은 알겠다. 그런데.

-이것 풀 수 있는 사람?

뭐, 상석이를 포함해서 한두 명 손을 슬쩍 들었다가 슬그머니 내리긴 했지만. 어쨌건 교수님은 뭐랄까, 정말 한심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한 미묘한 표정으로 교실을 빙 둘러보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들어가요.

그런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일반수학 교수님은 정말로 젊고 화려해 보이는 잘 생긴 남자였다. 같은 남자인데도 순간 눈을 떼지 못할 만큼.

-정말 큰일이군요.

색소가 살짝 엷게 느껴지는 밤색 머리카락에, 교수님 정도 되는 연배에 어울리지 않게 깨끗한 피부. 검정은 아니고 어둡지만 따뜻한 빛깔의 수트와, 그 수트에 대조적인 새햐얀 셔츠의 소맷부리와 칼라. 쩔은 담배냄새 같은 것도 없었다. 독한 아저씨 스킨 냄새와도 달랐다. 그저 산뜻한 비누향, 희미한 샴푸향만이 느껴졌다. 내가 이렇게 미남 교수에 대한 묘사만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으면 이미 뇌가 썩어 문드러질 우리 누나가 무슨 헛소리를 해댈 지 모르지만, 하여간 그랬다. 그 사람은.

-수학은 이제부터 배울 모든 공학의 베이스입니다. 물론 여러분 중에는 당연히 알아야 할 것 조차 선택과목이라고 안 배운 사람도 있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그 동안에야 당연했겠죠, 그게.

그러나 이제부터는 필요합니다. 단호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살짝 차가운 듯한 느낌도 들었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누나가 좋다고 환장을 하는 그 100분 토론의 손석희 씨 같은 목소리 있잖아.

-미적분, 통계, 수학적이고 공학적인 마인드. 따라오는 건 스스로 선택할 몫입니다. 강요하지는 않아요. 여러분도 다들 그렇게 알고 왔지요? 부모님들이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대학 가면 불행 끝 행복 시작, 자유로운 인생 화려한 청춘. 뭐, 좋은 말이지요.

그 좋은 목소리로 세상에.

-하지만 미리 말해두지요.

대놓고 협박을 하고 있는 거다. 온갖 가오는 다 잡아 가면서.

-자율.

그런데다가 대체 교수 잘 생긴 거 어디다 써먹는다고, 당장 배경에 화사하게 꽃이라도 피어 날릴 것 같은 여유있는 미소까지 지어 보이면서 말이다.

-그 자율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여러분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무시무시한 소리를 눈 하나 깜짝 하고 말이지!

어쨌거나 얼굴로 교수가 된 건지 뭐 그 실력까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이런 공대에서 시커먼 남자애들만 보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아찔한 미남인 그 교수님은, 그 나누어 준 미적분 50문제를 다음 시간까지 과제로 해 오라는 말씀만 남기고 강의실을 떠나셨다. 떠나신 것은 좋은데,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대략 40분. 대체 어디서 이렇게 시간을 깎아먹은 거야.

"네가 오래 서 있었잖아, 칠판 앞에."

"시끄러."

하여간 뭐, 교수 잘 생긴 거 뭐에다 쓰냐고요.

어쨌거나 중고등학교 때 과제물도 다 워드로 쳐서 갔다낸 우리들을 뭘로 보는 건지, 이 교수님은 과제를 레포트 용지에 손으로 써서 내라고 강조하셨다. 그런고로, 일단은 레포트 용지부터 사야 한다는 게 문제다.

"레포트 용지 주세요."

수다스럽게 생긴 문구점 아줌마는 우리를 돌아보며 깜짝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벌써 숙제야? 무슨 과목인데?"

"몰라요, 우린 아직 입학식도 안 했는데."

"아씨, 웬 변태같은 교수님이 첫날부터 숙제잖아요."

"혹시 진교수님 수학이야?"

잠깐, 우리 고등학교 때 학교 앞 문방구 주인들이 학교 선생님들 얼굴 다 외우고 있었나?

"교수님을 아세요?"

"알다마다, 학교 최고의 훈남 아이돌인데!"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 이 아줌마 아무리 봐도 우리 엄마랑 비슷한 또래일텐데. 설마 엄마도 집에서 TV 틀어놓고 훈남이니 미남이니 아이돌이니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이 잘 생긴 아들을 두고?! 나는 갑자기 훈남이라는 단어의 정의가 궁금해졌지만, 그 의문을 풀어주시려는 듯 아줌마가 알아서 그 교수님의 우월성을 설명해 주셨으니.

"자상하고 신사적인 태도, 완벽한 옷걸이, 그런데다 아직 마흔 살도 안 된 젊은 교수님인데, 학교에서는 천재교수로 통하시잖아. 논문도 엄청 많이 쓰시고. 그런데다가 학교 제일의 미남이라서, 문과대 여자애들은 물론이고 저기, 교대생 여자애들도 와서 훔쳐보고 가고 그런다더라. 아유, 정말 그런 남자랑 결혼한 여자는 누굴지, 복도 많지."

완벽한 남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알겠는데 얼굴 붉히고 말하지 말라고요! 보는 내가 다 부끄럽네.

그러니까 교수가 잘생긴 게 뭐 대수라고!

"아, 쩐다, 쩔어."

"아줌마는 왜 그래? 변태야?"

"미남이긴 했잖아, 교수가. 경민이 너도 아까 옆에서 넋 빼고 쳐다봤으면서."

"쳇, 교생 잘 생기고 선생 잘 생긴 거 어따가 쓰냐."

"하긴, 같은 논리로 교수 잘 생긴 것도 쓸 데는 없지."

상석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상석이는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내며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환영회 있나보더라구, 오늘 5시에. 그리고 시간 되었으니 교과서나 받으러 가자."

"환영회?"

"폰 고장났어? 아까 문자 왔잖아, 8시에."

"문자? 무슨 문자?"

그러니까 나하고 연태하고, 셋 중 둘이 못 봤으면 이건 우겨도 되는 상황이긴 한데, 어째서인지 폰에는 상석이가 말한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이거다.

1교시수업필참♣
11시이후대학본부
지층에서교재수령
할것5시에과사집
합--컴퓨터공학과

"그러니까 왜 너만!!"

"시끄럽고, 교과서 받으러 가자니까."

상석이는 다이어리에서 그, 학비 영수증을 꺼내어 달랑달랑 흔들어 보였다. 뭔가 할 말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게, 엄마가 첫날이니 잊어버리지 말라고 영수증부터 뭐부터 싹 파일에 넣어주셨으니 망정이지. 엄마 잔소리 또 시작이라고 짜증냈었는데, 엄마가 이 꼴을 아시면 뭐라고 웃으실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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