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과 과학은 인생에 쓸모가 많으니까.”

TV 속의 그 남자는, 요즘으로 치면 디지털 도어락이라 부르면 될, 숫자암호를 입력해야 열리는 문 앞에 서서, 연필을 깎아 만든 고운 흑연 가루를 입김으로 불어 날렸다. 지문이 묻은 네 숫자를 두고 남자는 간단하게 경우의 수를 확인하여 눌렀고, 문은 열렸다.

옆에서 멍하니 모니터를 들여다보면 오빠가 말했다. 남자라면 마땅히 저래야지.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말이 맞았다. 남자라면 마땅히 저래야 한다, 는 생각이 든 것은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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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정말.”

수강신청을 하러 간 날부터, 학교 전산실 형광등이 나가는 꼴을 보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막 합격한 국가직 공무원이 부처배정 받으러 청계천 옆 인사위원회 건물로 걸어가다가 행운을 기원하며 던진 동전을 청계천이 퉤 하고 뱉는 것 같은 형국이랄까. 1학년 서월미는, 혀를 차며 전산실 구석을 돌아보았다.

오호 통재라, 이 세상에 사내다운 사내는 다 죽은지 오래로구나.

구석에 스페어 형광등이 몇 개 있기는 했다. 형광등이 있네. 남자애들이 중얼거렸다. 말만 하면 뭘 하자는 거야. 책상만 밟고 올라가도 키가 닿을 것들이, 저러고 어리버리 서 있으면 뭐 하자는 거야. 이건 백치미도 아니고. 기가 막혔다. 저 답답한 것들이 이제부터 4년을 함께 할 동기생들이라니. 월미는 혀를 찼다. 책상을 끌어다 놓고, 키보드를 옆으로 밀고 그 위에 의자를 턱 올려놓고, 형광등을 빼앗아들고 그 의자 위로 올라가는 데는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냥은 손이 뜨거우니까, 주머니에 들어있는 장갑으로 형광등을 감싸 돌려 빼고 새 형광등을 꽂았다. 그리고.

“이거 좀 받아봐.”

아래에서 올려다보던 남학생 아무에게나 형광등을 내밀었다. 자, 이제 내려가기만 하면 되는데.

“어…..!”

어제 새로 맞춘 안경 때문인지, 발 밑이 허황했다. 휘청 하고 몸이 기울어지려는 것을, 누군가가 받아주지 않았다면 크게 다칠 뻔 했다. 누군지 돌아보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빰빰빰빰 빰- 빰빠빰-

어디선가 맥가이버의 주제가가 터져나왔다. 남자의 휴대폰이었다.

“아, 여보세요.”

월미를 받아준 남자는, 머리가 짧고 키가 큰, 뿔테안경을 쓴 남자였다. 여기서 조금만 더 관찰력이 있다면, 그가 말년휴가를 나온 공군 병장이라는 사실도 쉽게 알 수 있을 터였다. 저 색깔 군복이야 공군 것이고, 공군도 예비역은 일반 개구리복을 입으며, 그냥 일반 육군 출신으로 예비군 훈련을 다녀오는 것이라면 굳이 머리를 그렇게 짧게 다듬을 리 없으니까 말이다. 남자는 모자를 고쳐 쓰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아, 좀 가만 있어 봐. 드디어 찾았어.”

월미는 의자를 내려놓고 키보드를 제 자리로 돌려놓았다. 남자들만 가득한 전산실에 혼자 여자라니. 다른 방에는 여자애들이 더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하여간 여기 제 1전산실에 국한해서 하는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눈에 튈 텐데, 이런 소동까지 있었으니 동기들이 이름 외우는 것은 순식간이겠다. 그런데, 저 군인 아저씨가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찾던 여자가 드디어 나타났어!”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월미는 “박관석”이라는 이름과 병장 계급이 달려있는 남빛 군복을 걸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씨익 웃더니.

쿨한 남자라면 역시 리눅스지. 리눅스 안 배울래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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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둘째 오빠가 kldp 죽돌이라서 리눅스는 좀 쓰는데요.”

“어, 뭐 써요? 난 우분투 쓰는데.”

“젠투요. 근데 군대에서 리눅스를 써요?”

“아, 말년병장이라서. 그리고 공군은 원래 한달에 사나흘씩 외출 있어요. 이름 뭐예요?”

“……”

“뭐예요, 같은 리눅서끼리.”

“우리 오빠가, 군인아저씨나 예비역 아저씨는 믿지 말라고 했는데요.”

“아저…… 아저씨라니!”

그것이 저 특이한 관석이 오빠와

“3대 맥?”

맥킨토시, 맥가이버, 맥도날드. 기계과 박관석을 이루는 세 가지 요소라고 했지. 관석이 군대 가기 전 별명이 그래서 맥이었어, 맥. 삼위일체의 맥.”

“아…… 잠깐, 그럼 관석오빠는 우리 과가 아니에요?”

“아, 우리 과도 아닌데 우리 전산실에 멋대로 드나들지? 썩을.”

성실하기 그지없는 연이 오빠와의 첫 만남이었다.

“이봐, 나 전산과 복수전공이라니까.”

“시끄러, 됐어.”

그리고 맥가이버같은 남자라고 해서 반드시 사내다운 사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은, 아마 그 무렵에 깨닫게 된 이야기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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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시한 프리퀄은 월미가 대학에 입학하던 2008년 2월 말의 이야기로

하이바맨의 초고로, 막장 공대녀가 양손에 기술의 컴과/힘의 기계과 학생회장을 쥐고(연과 관석) 삼각관계를 펼치는 “우리 애인은 맥가이버”(가제)라는 제목으로 끄적이던 물건입니다. 이미 이때도 월미-관석-연의 성격은 다 나와 있었고, 아직 진교수는 만들어지기 전이었죠. USB에서 지난 파일을 찾다가 발굴하고 올려놓아 봅니다. 퇴고하지 않은 물건이라 대사나 묘사가 엄청 러프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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