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뭐. 흔히들 그러잖아. 그래, 믿는 애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산타클로스를 믿는 것 보다는 많은 수가 믿고 있는 이야기인데. 엄마랑 아빠랑 고3 담탱이 입을 모아 말하는 거 있잖아. 대학 가면 여친도 생기고, 자유롭게 살고 있고, 대학의 낭만 속에서 하여간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고.  

아니, 지금 나보고 바보라고 말하려는 것 다 알아. 알겠는데, 그래도 그런 생각이라도 안 하면 어떻게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12년을 그러고 살아. 나도 상식이라는 게 있는 인간인데, 그런 이야기가 어느정도 뻥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여친에 대학의 낭만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유롭긴 하겠지, 그런 생각 정도는 하지. 아무리 현실적이라도 말이다. 그런데.  

"1교시 한다는데?" 

물론 대학에 뭘 그렇게 바란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등록금에다가 입학금이라고 뭐 더 붙이기까지 해서 그만큼 돈을 냈으면, 그래도 신입생인데 뭔가 챙겨주는 것 정도는 있을 줄 알았단 말이다.  그런데.  

"농담이겠지?" 

"아냐, 과사 가서 물어 본 거야." 

적어도 국민의례나 총장의 환영사나 그런 것이 풀패키지로 포함된 입학식까지는 아니더라도, 입학 축하한다고 말 한마디 해주는 사람 없고. 입학식도 안 하는 주제에 1교시부터 수업 한다는 이야기는 뭔가 대단히 당연하다는 듯, 과사 가서 확인이나 해 봐야 알 노릇인 것 같고. 그런데다가 멀리 보이는 저 화려하고 아름답고 엘레강스한 건물은 문과대라는데, 공대 건물은 무슨 1960년대에 지어놓은 양(사실이 그랬다) 낡고 거미줄 끼고 구리구리한 것이.  

근데다가 공대 쪽이 학비가 100만원 더 비싸더라는 게 포인트. 아니, 환경이 이렇게 꾸진데 깎아주는 맛이라도 있어야지 이게 뭐야. 내 경우는 우리 누나도 이 학교에 다니는 바람에, 엄마가 이미 싹 꿰고 계신다. 문대는 학비가 얼마인지, 장학금은 얼마를 주는지. 그래서 바로 얼마 전까지 내게 대학만 가면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고 외치시던 우리 마덜께서 멀쩡한 입학식날 아침부터 사랑하는 아들을 붙들고 가로시되, 공대는 과별 정원이 더 많으니 장학금 인원도 더 많으니까 반드시 반액 장학금 이상 받아오라고 짤짤 흔드셨다 이거다.

오오 갓뎀 왓더 헬. 

"뭐하자고 수업 한다는 거야? 교과서도 없으면서." 

"그러게, 미친 거 아냐?" 

구시렁거리는데 연태가 옆에서 거들었다. 상석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건 상석이 아니었으면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나 하면서, 첫날 첫시간부터 수업 날려먹을 뻔 했다.  이래서 친구를 잘 둬야 한다니까.

하긴 했는데. 

"......완전 남탕이네, 남탕이야." 

아니, 난 OT때는, 공대니까 남자애들만 많으니까 여자애들이 OT를 안 왔을 거라고 믿고 싶었어. 정말이야. 대학생활에 딱히 환상을 품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같은 교실 안에 여자애가 한 명은 있을 줄 알았어. 근데 정말로, 여자가 없는 거다. 밖을 내다보면 가끔 한 명은 지나가는 것 같기도 한데, 특히 우리 분반은 정말 한 명도 없어. 아, 진짜. 이 구질구질 낡은 건물에 남학생만 그득그득하고. 이래서야 교복만 안 입었지 며칠 전까지 구르고 다니던 남자고등학교보다 나을 게 없다.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사방에서 홀아비 냄새가 풍기는 것 같았다. 

"첫날부터 빡세네......" 

어쩌면 몇 안되는 여자애들도, 1교시 한다는 소식을 못 듣고 어디서 헤매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따로 알려주지도 않은 것에 비하면 꽤 많은 수가 교실로 모여들었다. 몰라서 안 온다면 몰라도 소식 들은 이상, 첫날 첫시간부터 수업을 내뺄 만큼 담대한 새내기가 어디 흔하겠어. 그렇게 생각하니 아주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설마 수업 하겠어. 안 그러냐, 상석아?" 

"글쎄. 첫날이니까 인사라도 하겠지."  

"그치? 그래야지말야."

그래, 뭐. 고등학교 때 까지 들은 대학 이야기는 다 뻥이라고 치자.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첫날부터 수업이야 하겠어.  

......하고 생각하다가 첫날부터 큰 코 다치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강의실 앞에 걸려 있는 시계가 정확히 여덟 시 오십 구 분 사십 팔 초를 가리키는 것돠 동시에 강의실 앞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가 그, 일반수학 교수님이라는 것 까지는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겠지만. 

"이거 유인물 돌리고."

아니, 환상이 아주 없었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누나 하는 것 봐서 대충 안다고는 생각했다. 대학에 가도 또 취업, 학점, 토익, 어학연수. 인생 고달프기로는 고등학교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할 리 없다는 것도. 하지만. 

"세번째 줄 앞에서부터 나오세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말이다.  

첫날 첫 시간부터 고등학교 때의 아름다운 추억이 떠오르는 저 세로줄을 긋는 것은 너무하잖아!   

"야, 김경민." 

"어." 

"너잖아, 세번째 줄." 

참고로 말하자면 상석이 녀석의 지적 그대로 앞에 나가 문제를 풀어야 하는 모양이기는 한 모양인데. 세로줄 세 개를 그은 젊은 교수님은 우리 쪽을 보며 돌아서더니 뒤쪽에서는 아직도 돌리고 있는 그 시험지를 손에 들었다.  그제서야 보았다. 시험지 앞대가리에 적힌 미분 연습문제 50이라는 선명하고 굵은 볼드체 글자를. 뒤로 뒤집어보지 않아도 50문항까지 있다는 것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배려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작부터 기가 죽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세번째 줄은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나와서, 여기 미분 연습문제 1번부터 풀도록 하세요."

교수님은 분필로 칠판을 탁탁 치더니, 중요한 것을 잊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크고 시원시원한 글씨체로 이름을 적어내렸다. 

진시형 
이학관 2북501호. (803) 
William.Jean@intech.ac.kr

"일반수학을 맡은 진시형 교수입니다. 수학과고. 수업의 맥을 끊는 질문은 가급적 받지 않을 테니, 질문할 것이 있으면 쉬는 시간이나 공강시간을 이용하세요. 메일로 질문해도 됩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엉뚱한 생각이기는 한데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얼굴이다. 교수님이면 아무리 젊어도 마흔 살은 되었을 텐데. 아무리 보아도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얼굴, 그런데다 꽤나 잘생기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누나한테 들어본 적도 있긴 있는데. 학교에 엄청난 미남 교수가 있다고. 어쩌면 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빨리빨리 나오세요. 거기, 안경 옆에."

분명히 예전에 다 배운 내용일텐데도 손에 쥔 유인물에서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 거의 도살장에 끌려나가는 기분으로 칠판 앞으로 걸어나가며 생각했다. 여자애들이면 몰라도 교수 잘생긴 것 어디다 쓰냐!


댓글(1)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K 2009-07-21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순회 한번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