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더5. 구경(2)
“어?”
헤일로가 미애를 보자마자 반응을 한다. 설마 아는 사이인가?
“누구..? 혹시 날 아니?”
휴, 다행이다. 모르는 사이네. 하지만 아는 사이도 아닌데 미애는 왜 헤일로를 찾아온 걸까? 의심 된다.
“.. 저기 미안. 너 있잖아. 선우와 계약한 사이니?”
..... 아직 미애 몸에 루어가 있다면 헤일로가 위험하다. 안 되겠다. 나는 나무를 뛰쳐나가려고 발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 순간 오른 쪽 손목을 누군가 강하게 잡는 감촉이 느껴져서 뒤를 돌아보니 보이더가 안경에서 빠져나와서는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
“왜? 이 상황이면 헤일로가 위험할 지도 몰라?”
“아니, 그 녀석에게서 네이비의 기척이 나지를 않아. 지금은 이렇게, 만일에 대비해서 지켜보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 알았어.”
나는 보이더의 말을 듣고 나무에서 계속 기다리기로 했다. 그래. 지금 상황에서 단정 짓는 것은 조금 빠르겠지. 나는 갑자기 미애를 만나서 몸을 떨고 있는 듯한 헤일로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응. 그런데? 근데, 그건 어떻게..”
“.... 이 세상에서 그렇게 예쁜 진분홍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은 없어. 그래서 찾았지. 그리고 내 안에서 그 나쁜 사람이 빠져나가고 난 다음에(루어다! 루어 퀸비다.) 나도 네 정채를 어렴풋이 알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말이야.”
“하하.. 그래?”
헤일로는 어색하게 웃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있잖아. 부탁이 있어.”
“응? 무슨 부탁?”
“선우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데..”
“응응.”
“그 애한테 미안.... 하다고 전해주면 안될까?”
흠칫했다. 나, 나에게 사과하고 싶다고?
“내가 나쁜 녀석에게 조종당했다고 너에게 말했었지? 난 그 조종 당했을 때가 지옥이었다니까. 누군가에게 폐만 끼치는 시간이었으니까, 그게 정말로 무서웠어. 두려웠어. 이 시간이 이어진다는 것이.”
“그랬구나...”
“지금은 이렇게 풀려났지만... 선우하고 보이더라고 했나? 그 전에 선우하고 계약했던 사람. 그 애들에게 정말, 정말, 너무 폐 끼친 것 같아서....”
“....”
.... 생각해보면 미애도 많이 힘들었겠지. 자기는 원하지 않는데 조종당해버리고, 온갖 비난은 자기가 다 받고. 정말로... 힘들었겠지.
“.. 줄곧 사과하고 싶었어. 이제 걔에게 조종당하지도 않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많이 폐를 끼친 사람들인데 바로 얼굴을 맞대는 것은 좀, 아닌 것 같아서... 너에게 이렇게 부탁하는 거야. 그 애들에게는 나중에 정식으로 사과할 테니까...”
“그러면 안 돼.”
헤일로에 목에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힘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미애의 눈이 동그래졌다.
“... 에?”
“너, 선우랑 보이더와 만나서 사과하고 싶다고 줄곧 생각해 왔지?”
“아, 응..”
“그러면 바로 만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나 같은 것에게 부탁하지 말고.”
“...... 그렇게 하기에는, 좀..”
“두려운 거지?”
미애의 눈이 한 번 더 커졌다.
“너, 걔들에게 사과 받지 못하는 것이 두려운 거지?”
“....”
“괜찮아. 걔들은 상냥한 애들이야. 네가 사정을 말하면 아마 이해해 줄 거야.”
“그, 그걸, 어떻게 알아..?”
헤일로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야, 선우와 보이더는 날 받아준 아이니까.”
그 말을 들은 나는 동공이 흔들리고 얼굴은 물론 귀까지 불이 번져가지곤 안절부절 거렸다. 왜! 그렇게 두근거릴 말도 아니잖아? 그렇게 얼굴 붉어질 말도 아니잖아? 근데 왜! 왜....
“어머, 어머. 이제는 몸이 먼저 반응을 해버리네?”
“아이 씨, 시끄러워. 그러다 들켜.”
보이더는 나를 보고는 어쩔 수 없구나란 웃음을 지었다. 하여튼 장난기는 많아가지고.
미애는 헤일로의 말에 뭔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미소를 옅게 짓고는 말했다.
“알았어. 나 선우에게 직접 물어볼게.”
“응! 그게 좋을 거야.”
“아, 저, 고마워. 네 덕분에 조금 용기가 생긴 것 같아.”
“그건 다행이네.”
“근데, 저기. 이름 한번 물어봐도 될까?”
“헤일로라고 해.”
“아. 헤일로. 이름 예쁘다. 나는 차미애라고 해. 기억해줘! 오늘은 정말 널 만나서 다행이야. 고마워!”
미애는 헤일로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반대편으로 되돌아갔다. 헤일로는 그걸 지켜본 다음에 미애가 시야에 안 보일 쯤에 바로 학교로 돌아갔다. 학교로 돌아가는 헤일로의 옆모습은 미소 짓고 있었다.
ㅡ 헤일로 녀석. 알고 보면 멋진 사람이잖아.
- 그렇네. 말도 잘하고.
우리도 헤일로가 가고 난 다음에 나무를 빠져나와서는ㅡ보이더는 안경으로 되돌아갔다ㅡ기숙동으로 걸어갔다. 살랑살랑, 가을바람이 기분이 좋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헤일로를 향한 빠알간 마음이 점점 짙어져만 갔다. 그의 행동을 보면 볼수록 마음속에서 짙은 붉은색의 마음이 퍼져나간다. 이제는 그에게서 헤어 나올 수 없다. 오늘 그 나무 뒤에서 슬며시 본 그의 행동에 나는 확인사살 당했다.
그리고 미애. 나는 미애를 빨리 만나고 싶다. 그 애를 보면 내가 세피아에 빠져있었던 게 생각난다. 내가 어렸던, 너무 어렸던 그 때. 그 애를 만나서 꽉 끌어안고 싶다. 이젠 괜찮다고, 그런 고통스러운 생각 하지 않아도 된다고 귓속말로 전해주고 싶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그 애와 친구가 되고 싶다.
이런 저런 행복한 생각들이 나를 감싼다. 절망은 없다. 난 행복에 둘러싸인 인간이다. 학교 길을 걸어가면서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고 싶다고 하늘에 어리광을 부리며 난 기숙동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기숙동에 돌아가자마자 왜 이제 오냐고 헤일로에게 야단을 맞았다. 내가 그 말을 너에게 들어야 되니?)
*
말하고 싶다.
하지만 말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게 선우의 행복을 깨는 일인 걸.
그게 선우에게 절망을 가져다주는 일인 걸.
조금만 더 선우에게 행복한 꿈을 꾸게 해주고 싶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그녀에게 거짓된 행복이라도 더 주고 싶다.
이게 잘못된 생각이라도.
조금만 있으면 그녀 스스로 다 알 수 있을 테니까.
그 때까지만.
말하고 싶다.
하지만, 말할 수 없다.
-
선우도 세피아라는 마법에 걸렸으니 조종당했다고 볼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