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더4. 구경(1)

 

 

 


 난 너를 사랑해! 단지 그뿐야. 근데 이제 와서 헤어진다니 무슨 소리야? 시끄러. 넌 날 잘 모르잖아! 나랑 만나고 나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 적이 있어? 너는 네 입맛에 맞는 나를 사랑한 것뿐이잖아. 날 인정해주지 않았잖아.

 만화책 종이 냄새가 내 코끝을 맴돌다가 사라졌다. 종이 냄새 자욱을 따라서 올려다본 하늘은 너무나도 푸르러 끝까지 쳐다보지 못했다. 문득 그 속에 헤일로의 그 눈동자가 아른거린 것 같아서 다시 쳐다보니 헤일로의 눈동자가 있던 자리엔 햇빛만이 공허하게 비치고 있었다.

 

 요즘 읽는 만화책이 대체로 이런 종류다. 십대부터 이십대 중반 남녀의 달콤한 러브 스토리. 제목도 그대라는 사람, 외톨이와 까칠이가 만나면? 나 같은 걸 사랑해 버린 왕자님 등등, 유치하지만 희망찬 이야기들이 내 삶을 가득히 채우고 남았다. 1학년부터 모아온 참고서보다도 더 많이.

 헤일로와 만나고 나서 매일 이런 책들만 산다. 밖에 나갈 일이 있을 때마다 지나치는 서점에 들러 맘에 끌리는 러브 코미디 만화만 보이면 그만 사버린다. 그런 만화들을 사서 기숙동에 들어오는 길엔 온 간판이 다 이상하게 변해있더랬다. 김씨의 사랑, 원조 사랑의 홍삼, 앨리스 웨딩숍. 눈을 비벼도 그 환영은 씻어지질 않았다.

 보이더에게 그걸 말하니까 콩깍지 제대로 씌워졌다면서, 벌써 상사병 말기라고 나에게 말했다. 난 피식거렸다. 그럼 어떡하라고, 이렇게 되어버렸는데. 그렇게 보이더도 알만큼 망상에 찌들어가지고 온갖 러브러브 만화들을 다 섭렵하면서, 정작 헤일로 본인만 보면 온몸이 다 빨개져가지고서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는 나는 확실히 상사병 말기였다.

 

 만화 보기를 그만하고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오후의 햇볕을 쬐었다. 온몸이 따끈따끈해지는 느낌이 좋다. 그냥 이대로 한 10분만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 그저 이 따뜻한 시간을 박제한 채로, 소중한 사람들과 그것을 구경하며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 ?

 뭔가 이상하다. 뭔가 자연스럽지가 않다. 한명이 빈 것 같다.

 - 보이더.

 ㅡ ?

 - 왠지 이상해.

 ㅡ 무슨 부분이?

 - 몰라. 왠지 이상해. 내 몸의 어느 부분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

 ㅡ .. 병원 가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고객님.

 - 아냐!! 그런 느낌이 든다고. 보이더, 혹시 헤일로 좀 찾아봐줄 수 있어?

 ㅡ 헤일로? 알았어.

 보이더는 대답을 하고는 워먼덱스의 여기저기를 누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머지않아서 보이더의 목소리가 들렸다.

 ㅡ 선우.

 - ?

 ㅡ , 레이더 달렸냐?

 - 아닌데?

 ㅡ 헤일로 어딘가로 나갔어. 워먼덱스 화상통화기능으로 연결해봤는데 거기에 없더라.

 ...... 이 녀석.

 나는 오후의 햇볕을 깨뜨리고 곧 나갈 채비를 한 후에 방을 박차고 나왔다. 아마 지금이면 멀리는 못 갔을 거다. 방학동안만 일하시는 행정실 오빠야가 나를 놀란 눈으로 보고 있었다. 아마 내 얼굴이 누굴 잡아먹을 듯한 얼굴이라서 그랬겠지.

 ㅡ ! 무슨 수로 걔를 찾는다고.

 - 몰라. 일단 나가보면 무슨 수가 있겠지.

 보이더에게는 대충 대답하고 곧장 달려 나가 신호등 있는 데까지 다다랐다. 초록 불을 기다리는 동안 숨을 몰아쉬고, 초록불이 되자 곧바로 튀어 나갔다. 너무 빨리 튀어나갔는지 하마터면 차와 부딪칠 뻔도 했다. 신호등 도로를 건너서 백화점을 통과하고 있으니 보이더가 말을 걸어왔다.

 ㅡ 선우.

 - .

 ㅡ 헤일로 위치 알았어. 서림 문고야.

 - 거기? 거기는 왜?

 ㅡ 몰라. 자기가 가고 싶었으니까 간 거 아닐까?

 - 그래? 근데 넌 그걸 어떻게 빨리 알았어?

 ㅡ , 그야 뭐, 워먼덱스 기능에 주인 찾기 기능도 있으니까..

 워먼덱스라는 건 뭐든지 가능한 기계인가보다. 그런 것도 알 수도 있고. 나도 하나 사고 싶어지네.

 곧바로 서림 문고 쪽으로 달려갔다. 내 생애 최고 속력을 오늘 갱신하겠다는 기세로 달려갔다. 얼마 안 가서 그렇게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건물에 도착했다. 서림 문고였다. 들어가서 헤일로라고 크게 부르고 싶었지만, 그에게 더 이상 얼굴 빨개지는 모습을 보이기가 싫어서 그냥 유리창 너머로 그를 봤다.

 헤일로는 책 읽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무슨 책을 그렇게 열심히 보는 지(되도록이면 로맨스 쪽이면 좋겠다), 그는 간이 의자에 움직이지도 않고 새하얀 책을 봤다. 서점 한 구석에 박혀있는 검은 빛의 보석은 그렇게 그 책을 유심히 보다가 30분이 지나서 서점 직원에게 인사하고는 서림 문고를 나갔다. 내가 그 밖에 있다는 것을 눈치도 못 챈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헤일로를 따라갔다.

 헤일로가 그 다음 들린 곳은 마트였다. 그것도 내가 보이더에게 우동을 만들어 주려고 갔던 그 대명 라이프 플러스였다. 헤일로는 거기서 이곳저곳을 그저 정처 없이 떠돌아 다녔다. 나는 그를 놓칠까봐 노심초사하며 헤일로를 뒤따라갔다. 헤일로를 놓치면 안 된다. 그를 따라 다녀야 한다. 이 넓은 도시에서 길 잃어버리면 다시 돌아오기도 그렇잖아.

 마트에서도 떠돌기만 한 헤일로는 또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걷기만 하던 헤일로의 발걸음이 은행 나뭇길에서 멈췄다. 순수한 노란 색만이 헤일로의 눈에 가득 담겼다. 감탄에 젖은 헤일로의 옆모습은 정말로 예뻤다. 헤일로는 은행잎을 두 눈에 담고, 나는 헤일로의 옆모습을 두 눈에 담았다. 헤일로는 그 상태로 7분을 그 상태로 있었으며 나도 그랬다. 영원 같은 7분이었다.

 

 

 헤일로는 이제야 기숙동으로 돌아가는 듯 했다. 헤일로를 뒤 따라가면서 보이더와 나는 수다를 떨었다. 나도 처음에 모니터에서 저 은행나무들을 봤을 때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어. 애초에 내 행성에서는 저런 나무들은 사진에서만 봤지, 실물을 본적은 없어서 말이야. 정말? 우리는 너무 흔해서. 씁쓸하고도 단 이야기가 내 귀를 간지럽혔다.

 그 사이 헤일로는 우리 학교 정문에 도착했다. 매일 보는 쌓아올려진 벽돌들이 오늘은 웬일인지 힘 있게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헤일로는 그 문으로 들어가려고 했고 나도 뒤따라가려고 했다. 근데 그 때에 들리는 발자국 소리. 방학 때는 별 볼일 없는 따분한 이 학교에 누가? 나는 그 얼굴을 확인하고서는 지례 겁을 먹었다. 그리고는 가까운 나무에 몸을 숨겼다.

 왜 지금 이 때에 그녀가 나타나는 거지? 왜 헤일로에게 오는 거야? 헤일로를 해치려고 나타난 거야? 아니 너는 나만 노리면 되는 거잖아. 차라리 나를 공격해. 나 갖고는 성에 안 차?

 헤일로의 앞에는 군청색의 목도리를 두른 차미애가 땅을 쳐다보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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