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더完. 우리들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루어를 쓰러뜨리고 난 뒤, 우리들은 각자의 삶을 충분히 맛보고 있는 중이야. 다들 루어가 남기고 간 상처들이 아직 다 아물지 못했지만 우리는 그 상처가 깨끗이 낫게 될 그 날을 기대하며 살아가고 있어. 


 슬비는 그 날이 지나간 며칠 동안은 몸이 허약해졌어. 일종의 컨디션 난조지. 외상은 없었지만 그때 그 마법 공간에서 얻은 극도의 스트레스와 공포감이 그녀를 짓눌렀나봐. 수업 시간에도 계속 졸리다고 그러고, 점심시간이나 저녁 시간에는 매일 잠만 잤지. 하지만 괜찮아. 내가 그때마다 그녀를 위해서 빵이나 밥 종류를 사다 줬으니까. 그녀는 그럴 때마다 정말 고맙다고 나에게 몇 번이나 말했고.
 ....... 나는 이 귀여운 리본 소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정말 적구나, 라고 그때 깨달았다니까? 


 

 솔직히 슬비가 그 버건디에 끌려간 건 나 때문이잖아. 그래서 난 그녀에게 일부러 더 말을 많이 하고 진심으로 그녀를 도와주려고 노력했어. ‘요즘 힘이 없어 보이던데 괜찮아?’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도와줄게.’ 나는 이런 말들을 그녀에게 던졌었지. 슬비는 그 말들을 듣고 정말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인 듯 웃으면서 ‘그 말이면 됐어. 그 말로도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으니까!’라고 나에게 말했어.
 이렇게 말해주는 친구가 있는 나는 최고의 행운아일 거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다행이도, 그 시간이 지나고 슬비는 차츰차츰 건강을 회복하고 평소처럼 활기차게 지내고 있어. 요즘 나에게 ‘나중에 내가 세상에서 제일가는 의류회사를 차릴 테니까! 너도 어른이 되면 내 옷 사러 와!! 넌 내 최고의 친구니까 할인 정도는 해줄 수 있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있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들어 외워버렸지. 나는 오늘도 그 소리를 들으면서 만약 그 가게에 가게 된다면 이런 스타일의 옷을 사고 싶다! 라는 것을 상상해. 그리고 그건 언젠가 현실이 될 거라는 것을 믿고 있지. 누가 뭐래도 슬비의 일이니까 말이야. 



 

 다음은 미애.
 요즘 미애하고 이야기할 시간이 많아졌어. 그때 그 시간이 지난 이후, 그러니까 네가 내 곁을 떠난 이후로 더욱 더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한 게 미애야. 이건 사족이지만 우리가 버건디를 빠져나오고 나서 우리를 찾은 것도 미애야. 참. 우리가 있던 무너진 빵집 건물을 어떻게 찾은 건지, 신기하다니까.  ‘어린 아이 3명이 우는 것을 꾹 참던 광경.’ 미애는 우리가 마법 공간을 빠져나온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설명은 정말 정확했지. 슬비도 보이더도 나도 서로 상처를 숨기고 있었으니까. 


 미애는 그런 우리들의 곁에 계속 남아서 자신의 이야기들을 풀어냈어. 자기가 좋아하는 만화라든지 옷이라든지 먹거리라든지. 우리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부어줄 양 말했지. 버건디를 빠져나온 다음 우리들이 빠르게 마음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미애 때문이야. 미애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정말, 잔뜩 눌러 앉은 이 세상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야. 난 그런 미애를 이렇게 부르고 싶어. 간호사, 뒤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간호사.



 그리고,
 보이더.


 ... 아마 내 친구들 중에서 제일로 상처를 많이 받은 녀석이 보이더일거야.
 보이더는 우리들에게 자기의 상처를 다 드러내지 않아. 평소에는 우리들을 넓으신 아량으로 감싸 안는 누님 같은 모습이야. 자기 상처보다 우리들의 상처들을 잘 보고 그 상처들을 보듬어 줘.
 하지만 난 알고 있어. 매일 매일 쌓여가는 보이더의 눈물을. 학교 수업 중에 안경으로 전해져 오는 눈물의 색을.
 그건 아마 버건디의 눈물이겠지.
 그 눈물은 내가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진할 거야. 아마도 나보다 더 많은 고민과 원망과 후회가 담겨있을 거야. 나는 그 눈물의 깊이를 죽어도 측량하지 못하겠지.
 그 떨리는 어깨에 짊어진 사랑의 무게를 난 진심으로 ‘아는 것’이 불가능할 거야. 아마 강산이 변하고 우주가 개편된다고 해도, 내가 죽는다 해도. 

  하지만 지금 보이더는 행복해. 무엇보다 지금의 보이더에게는 루어가 없어. 보이더에게 터무니없는 상처를 짊어지게 했던 루어가. 지금의 보이더에겐 우리들이 있을 뿐이지. 변함없이 겉멋만 들고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 우리들.
 그렇지만 이런 우리들이라도 보이더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어. 보이더를 계속 지켜보며 힘을 보탤 수 있어. 우리들은 보이더가 진심으로 웃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힘을 내고 있어. 요즘은 쉬는 날에 4명이서 같이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거나 예쁜 옷을 사러가는 일이 많아. 그 때의 보이더를 흘긋 보면 정말로 행복한 듯이 웃고 있어서 난 정말로 안심하곤 해.

 

 ... 야.
 보이더 곁에, 우리들 곁에, 너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 말 나온 김에 물어볼게. 넌 어떻게 지내? 넌 지금쯤 어딜 여행하고 있냐? 그 쪽의 하늘색은 어떤 색이야? 설마 벌써 지치지는 않았겠지?



 그런 건 됐고 내 얘기나 들려주라고?



 ........ 나는 잘 지내. 걱정할 필요 따윈 없어
 괜찮아.





*





 .... 그래. 루어를 쓰러뜨린 직후의 상황에 한 번 더 되돌아가볼까? 


 

 그 때 미애가 우리를 발견하고, 우리는 둘로 나눠졌어. 미애와 슬비는 편의점에서 요기가 될 만한 것을 사고 우리들은 루어를 처리해서 기숙동에서 보기로 했어.
 무너진 빵집에서 이제는 움직이지 않는 인형이 되어버린(... 하아.) 루어를 옮겨서, 사실은 너... 의 워먼덱스가 아닌 루어의 워먼덱스였던 시계에 눕혀주기로 결정했지.
 그 시계가 버려진 영화관의 분실물 센터에서 겨우 시계를 찾았지. 아, 그 영화관 여직원에게는 이 사람들은 요즘 잘 나가는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고 둘러댔어. 아아, 정말 위험했지! 하지만 여직원이 정말 순수해서 다행이었어. 



 

 워먼덱스에 루어가 빨려 들어간 후에 우리는 영화관을 나와 한동안 그 근방을 멍하니 둘러보았더랬지.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걸음이 느린 아이를 둔 엄마의 잔소리. 아직 이 지상에 있고 싶다고 발버둥 치던 해. 본연의 색을 점점 숨기고 바래져가는 나뭇잎. 저 밑에서 우리를 계속 쳐다보던 개미 몇 마리. 


 갑자기 옆에서 우는 소리가 작게, 아주 작게 들렸어. 


 돌아보니 보이더가 애써 울음을 참고 있더라고. 온갖 슬픈 감정을 꾸겨 넣어 가지고선, 그래도 내 앞이라고 참고 있더라고.
 난 말했어. 


 “왜 참고 있어?”
 “에?”
 “왜, 참고, 있냐고.”
 “....” 


 보이더는 입을 다물었어. 보이더는 눈코입을 잔뜩 찌푸린 채로 날 봤어. 왜 그렇게 날 봤을까? 내 눈에 뭐가 묻었을까? 아냐아냐. 아마 내 이마에 뭐가 묻어서 그걸 쳐다보고 있는 거겠지. 안 그러면 보이더가 그렇게 얼굴을 찡그려서 유심히 볼 리가 없잖아?




 난 그렇게 생각해.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네가 그렇게 울음을 참고 있는데, 내가 울어버리면 안 되잖아?” 


 하지만 이 초능력자에게는 안 통하네. 


 그 말이 던져지자마자 내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나는 느껴 버렸어. 그와 동시에 내 머릿속을 네가 가득 채웠지. 어쩌면 너와 함께 걸었을 지도 모르는 이 거리, 어쩌면 아직도 네가 살고 있을 지도 모르는 시계. 그 속에 숨겨진 .. 어떠한 가능성들.


 너를 구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 순간들. 



 보이더와 나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어. 우리가 놓쳐버렸던 영혼들을 위해. 우리가 구해지 못했던 영혼들을 위해 울고 또 울었어. 이미 다 끝나버린 건데, 우리는 아직도 그 과거 어딘가에 끌려가고 있는 느낌이 났어. 그 영혼의 얼굴들이 우리 앞에서 웃음 짓고 있네. 그 웃음이 보일 때 마다 우리는.. 더욱 더 소리를 높여 울부짖었지.
 그렇게 계속 울다가 우리가 학교에 안 와서 걱정이 된 슬비와 미애가 찾아와서 그들과 함께 학교로 갔었던 걸 기억해. 그때 잠시 살펴본 미애와 슬비의 얼굴에도 눈물자국이 남아있었어.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눈물 자국이. 



 

*





 이것은 우리가 헤매던 시절의 이야기야.
 우리가 과거에 머물러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  


 너도 알고 있잖아? 우리의 피와 눈물이 묻은 과거는 우리를 꽤 장시간 속박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속박은 잘 풀리지 않아.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해지는 것도 있지. 그 아픔에 못 이겨서 결국엔 시들어버리는 꽃들도 있어. 


 뭐, 이런 겉멋 잔뜩 든 소리를 하는 나도 결국은 과거의 쇠사슬에 아파하는 사람에 불과해. 난 아직도 헤매고 있어. 어떤 것이 좋은 것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것인지 잘 분별하지 못해. 그저 쇠사슬 때문에 생긴 상처에서 피를 흘리며 휘청휘청 길을 걸을 뿐이지. 네가 봤다면 정말로 꼴사납다며 비웃음 날렸을 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도 나는 앞을 보며 걷고 있어. 


 내가 이 길을 계속 걸을 수 있는 것은 내 옆에 있는 유쾌한 녀석들, 나처럼 쇠사슬에 몸이 칭칭 감기고 피를 흘리면서도 웃으면서 걸어주는 친구들과 내 등을 살짝 쿵 밀어주는 오빠, 그리고 네가 있기 때문이야.



 너에게 전하고픈 얘기가 있어.


 미안.
 난 널 구하지는 못했어.
 그렇다면 적어도, 네가 남긴 부탁을 곱씹으며 살아가야겠지?



 난 정말 괜찮아. 네가 그 말을 나에게 들려주었기에 난 지금 친구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거야. 시뻘건 피를 흘리며 휘청 휘청거려도 그 말을 붙드면서 버티고 있어.

 그러니 이렇게 자주 나에게 오지 않아도 돼. 이제는 충분히 나 혼자서 걸을 수 있어. 겨울이 겨우 지나가고 봄이 온 거야. 너도 이제는 너의 길을 가봐. 너의 세상은, 무한이 이어져 있는 걸 알잖아? 


 언젠가 네가 지쳐서 나에게 올 때쯤엔 그때는 웃으면서 그간 지낸 일들을 나누면 좋겠네.
 그럼 잘 가. 몸 조심 하고
 안녕.





-



후아, 완결!!

다음 주에 후기로 찾아올께요!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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