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더 21. 침투(2)



 

 “아, 헤일로.”
 그저 평소같이 헤일로를 대하는 나.
 아무도 없었던 호랑이 굴에 갑자기 호랑이가 출현 했지만, 정신만 굳게 붙잡으면 여길 탈출할 수 있다.
 난 그렇게 믿고 있었다.


 “여길, 네가 어떻게....”
 “저기요. 난 네 주인이거든요? 여기에 들어오는 것이 뭐 그리 신기한 일이야?”
 “아니.. 그건 신기한 일이 아냐.. 아닌데..”
 “아닌데?”
 “내가 너에게 내 워먼덱스 워프캡슐을 준 적이 없는데?”
 “아. 이거 말이야? 보이더에게 받았어.”
 겨우 찾아낸 워프캡슐 주머니를 꼭 쥐었다. 괜찮아. 난 여기서 탈출할 수 있어. 릴렉스, 릴렉스.


 “네가 너무 이곳에 안 머물러 있기에 와봤지. 넌 맨날 밖에만 떠돌아다니잖아?”
 “그... 그렇긴 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우리의 사랑스러운 헤일로다.
 “너 너무 내 생명 에너지를 안 받는 거 아니야?”
 “아니야! 생명 에너지는 너에게 잘 받고 있어. 내가 외출이 잦은 거랑 그거는 별개의 이야기야.”
 “흐응... 그래?”


 (찌릿 찌릿!)


 난 쓴 웃음을 헤일로에게 보였다. 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헤일로의 얼굴. 하지만 헤일로는 나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이내 웃음을 띠고서 나에게 말했다.
 “응! 난 전혀 문제가 없어.”
 “그렇다면 다행이야.”


 “하하... 너도 참 계약자 사랑이 끔찍하구나?”
 “뭐, 그, 그런 거지.”

 그 말에 애써 숨겨왔던 홍조가 만면에 퍼졌다. 그리고 잇달아서 나오는 욱하는 감정. 


 이놈이 지금 나랑 장난하나!
 “야! 내가 너를 걱정하는 건 당연하잖아! 너 내 마음을 알기나 해? 너 너무 호기심이 많아서 지구 이곳저곳 돌아다니잖아? 그럴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는 내 마음은 아냐고! 내 맘 조금이라도 알아주면 안 돼?”
 눈물이 찔끔 났다. 정말 추잡스런 감정이 바깥으로 나왔다. 이제 너와 나는 ‘적’일 터인데 나는 아직도 너에게 매달린다.
 “넌 정말 내 생각 요만치도 안하지? 너 나랑 데이트 할 때도 가면 쓴 모습만 보여준 게 아냐? 사실은 나를 싫어하는 거 아냐? 이 거짓말쟁이.”
 “.........”
 헤일로가 내 말을 잠자코 듣고 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기세의 오오라. 아, 실수해버린 것 같았다. 사실은 이렇게 할 것이 아니었는데.


 (찌릿 찌릿!)


 후회가 밀려온다.
 “아. 미안. 지금 내가 말한 건 잊어줄래?”
 “.........”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 이제 푹 쉬어.”
 “......”
 주머니에서 작은 워프캡슐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 바로 입속에 털어 넣으려고 했는데... 


 "그만.”

 ‘꽉!’ 



 아, 이런.
 헤일로가 내 손을 세게 쥐어서 워프 캡슐을 떨어뜨리게 했다!
 “..... 이거 뭐하는 거야? 손 좀 놔줘!”
 “........”
 “헤일로! 손 놔 주라고!”
 “.........” 


 계속 묵묵부답인 헤일로. 약간 화학 약품의 냄새가 났었지만 따뜻했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철 냄새 듬뿍 풍기는 헤일로의 차가운 눈빛이 나를 꿰뚫었다.
 마치, 예전의 헤일로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찌릿 찌릿!)


 “헤일로?”
 “..... 적을 섬멸합니다.”
 붙잡은 내 손을 잡아 당겨 워먼덱스 벽 한쪽 면에 나를 박는 헤일로. 벽에 박히는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으헉!”
 등 쪽에 지금까지 느껴본 적이 없었던 고통이 엄습해 왔다. 입을 닫아 고통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어떻게든 감춰보려고 했지만 다 가려지지는 않았다.

 “끅... 끅.. 헤일로?”
 “아직 적 안에 기밀문서가 있습니다.” 


 (찌릿! 찌릿! 찌릿!) 


 “.... 정말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나는 헤일로의 손에서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분명 사람의 손이 나를 붙잡고 있을 터인데 내 손목에 느껴지는 감촉은 차갑게 식어진 철판 같았다.


 (찌릿 찌릿! 찌릿 찌릿!)


 “적에게서 기밀문서를 탈환합니다.” “야! 스토-옵!!!!!”
 헤일로가 나를 넘어뜨리고는 그 철판 같은 손으로 내 옷 속을 만지려고 했다. 꽉 잡은 손목은 놓아주지도 않은 채.
 “야! 이거 너무한 거 아냐? 나한테 무슨 짓이야!”
 “저는 기밀문서를 탈환할 뿐입니다.”
 하긴 그 기밀문서라는 게 내 옷 속에 있으니까 그렇겠지. 


 “그래도 그렇지! 갑자기 숙녀의 옷을 확인하다니, 너무해!”
 볼을 빨갛게 물들인 채로 말을 했다.

 “저는 기밀문서를 탈환할 뿐입니다.”
 “.... 말이 안 통하네.”


 안 되겠다. 최후의 방법을 써야겠군. 여자로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이런 모습 보여주긴 싫었지만.
 .... 어쩔 수 없다.
 나는 내 손목을 꽉 잡고 있는 헤일로의 손을 이로 물었다. 꽈-악. 꽤 두터운 충격이 전해졌는지 헤일로는 뒷걸음질 치며 날 노려봤다.


 (찌릿! 찌릿! 찌릿! 찌릿!)


 억눌린 마음의 소리를 적당히 무시하고 반짝임 없는 진분홍색의 눈을 한 채 날 노려보고만 있는 헤일로의 배에 힘없는 주먹을 먹여 주었다.
 ‘퍽!!’
 헤일로가 놀랐는지 뒤로 넘어졌다. 여기서 빠져나가려면 지금 밖에 기회가 없다.
 나는 재빨리 워프캡슐이 떨어진 데로 가서 워프캡슐을 빨리 입에 털어 넣었다. 몸속에 퍼지는 하얀 빛. 헤일로가 그걸 보고는 나를 말리려고 손을 뻗었다. 여전히 반짝임 없는 진분홍색 눈.


 (찌릿! 찌릿! 찌릿! 찌릿! 찌릿! 찌릿! 찌릿! 찌릿!)


 미안.
 정말로, 미안.



 

 영화 ‘맨발의 도망자’는 진즉에 끝났다. 그 영화의 마지막은 보질 못했지만 왠지 결말이 훤히 보였다.
 진부한 이야기, 해피엔딩.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결국엔 맺어지는 러브 코미디.
 내가 보기엔 차라리 그런 이야기가 더 낫다.



 불 꺼진 영화관에서 눈을 뜨자마자 비상구를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헤일로가 들어있는 손목시계는 영화관에 남겨두고 냅다 달렸다.
 어두운 비상구에 보고 싶은 얼굴들이 그려졌다. 보랏빛 머리핀을 동생에게 강제로 빼앗긴 채 천사님들과 시시덕거리며 나를 지켜보고 있을 우리 오빠, 어딘가에서 의식을 잃은 채 내가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슬비, 지금 각자의 위치에서 마음을 졸이고 있을 보이더와 미애. 나는 지금 그들이 보고 싶었다. 만나서 얘기하고 싶었다. 있잖아,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 걸까? 왜 나에게만 이런 상황이 겹쳐 일어나는 거냐고. 안 그래? 하아.. 넘 싫다. 정말 싫다.
 하지만 지금은 계속 달려야겠지.
 비상구를 빠져 나와서 계속 달렸다. 헤일로는? 헤일로는 쫓아오고 있는 건가? 쫓아오고 있지 않다고 해도 그 애는 아마 달리기가 빠를 것이다. 몸치인 나보다도. 그러니 일단 달리고 보자! 달리고 달려서 내 기숙사 방에 숨어 들어가자!
 영화관을 빠져나가 밖으로 나왔다. 헤일로는 날 보진 않았겠지? 그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던 비상구를 기억해내고 안심을 하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척! 어깨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 두말할 것도 없이 헤일로였다.


 

 꽝! 지면에 엉덩방아 찧는 소리가 났다. 내 눈에는 무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헤일로가 가득 담기고, 내 볼은 점차점차 빨간색에서 파란색으로 창백해져만 갔다.
 “기밀문서를 탈환합니다.”
 “.. 헤일로.”
 헤일로의 손이 나에게 점점 다가왔다. 나는 무릎으로 헤일로를 피해 다녔다. 그때마다 헤일로의 손이 나를 때렸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땅바닥을 무릎으로 기어 다닌 탓인지 무릎에서 피가 나왔지만 무시했다. 난 지금 헤일로를 피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단 말이다! 몸에서 보내오는 신호를 무시한 채로 나는 피 묻은 무릎으로 땅바닥을 쓸고 다녔다.
 하지만 결국은 영화관 외벽 모퉁이에 몰려서 헤일로에게 잡히고 말았다.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하아, 하아, 하아.’
 “적을 섬멸하겠습니다.”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내게 헤일로가 고했다. 그러자 검붉은 색 빛이 헤일로의 손을 감싸고, 잠시 후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엄청나게 날카로워 보이는 단검이 있었다. 헤일로는 그것을 내 목에 대었다. 히익-!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내 눈은 그 단검을 본 순간 이미 빛을 잃어버린 듯 했다.
 이렇게 가는구나, 오빠가 있는 곳에. 아직 누구도 구하지 못했는데.
 결국 이렇게 끝나는 거야?
 
 “아.....”
 무서워. 누군가 나 좀 도와줘, 제발.
 도와주세요.


 오빠!!!!


 “안 돼!!”  “안 돼!!”
 ‘퍼억!’
 
 아.
 순간 오빠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석의 소리도 들렸다.

 천천히 쓰러지는 헤일로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헤일로가 쓰러지자 뒤에 서있던 구세주의 모습이 드러났다. 흰색의 할머니 머리. 위로 치켜 올라간 한쪽 눈꼬리. 볼 때마다 아름답게 느껴지는 분홍색의 은하수를 담은 밤하늘. 치마부분이 찢어진 잠옷. 그리고 맨발.
 흠칫했다. 


 “보.. 이더..”
 위를 치켜 올려다보니 그 곳엔 보이더의 눈이 씨익 웃고 있었다. 눈물을 가득 담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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