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더 20. 침투(1)




 서림 문고에서 헤일로는 물 만난 고기처럼 돌아다녔다. 소설 코너를 지나 전문 서적 코너, 어린이 코너, 문제집 코너. 헤일로는 서점에 진열된 색색들의 책들을 구경하며 눈을 반짝거렸다. 이것들 봐도 봐도 신기하네. 이렇게 빼곡히 적힌 글자들이라니! 우리들은 종족 특성상 시력이 퇴화되어 그림만으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왠지 너희들이 부러워지네. 헤일로는 말했다.
 “그럼 지금 보는 책들은 다 눈에 들어와?”
 “아니. 희미하게 보여. 그나마 내가 미그레시 성에서 시력이 꽤 좋은 편이였거덩.”
 “그럼 이것들은 왜 보는 건데?”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헤일로는 나를 바라보고는 내 이마를 꽁 찧고는 말했다. 야, 그래도 여기서 살 건데 이것쯤은 보는 연습을 해야 실생활에 유용할 거 아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렇겠지. 내가 가볍게 생각했어.” 나를 지나쳐서 다른 것에 관심을 쏟고 웃음을 흘리는 헤일로를 나는 그냥 지긋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대망의 영화관에 가는 길.
 “선우. 영화 뭐 볼 건데?”
 “어...... 영화관 가서 정하자. 아직 생각을 못했어.”
 “어떤 영화를 보더라도 다 재밌을 것 같아!”
 “네가 재밌게 보면 좋겠는데, 너 눈 잘 안 보인다 하지 않았어? 괜찮아?”
 “아이. 쓸데없는 걱정 말아요. 내 눈으로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귀로 다 파악 가능하니까.”
 “참, 그랬지.”

 헤일로는 여태껏 하지 못한 것을 할 생각에 엄청난 흥분 상태에 빠져있었다. 구름을 걷는 듯한 걸음, 여태껏 보지 못했던 웃는 얼굴, 그리고 평소보다 두 세배 높아진 목소리. 같이 있는 내가 다 부끄러울 정도였다.
 야야, 선우야! 그 영화라는 거 정말로 살아 움직이는 거야? 난 그런 거 보지도 못했어. 눈으로 뭔가를 즐겨본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지~ 우리들 눈 가지곤 그냥 가까이 있는 친구의 집에 찾아간다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 작전 성공.
 헤일로를 흥분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이제 내가 헤일로의 워먼덱스에 침투하더라도 당분간 눈치 채지는 못하겠지.


 영화관에 들어갔다. 헤일로가 포스터를 보자마자 눈이 돌아가서는 나 저거 볼래! 저거~라고 떼를 쓴 영화가 있어서 직원에게 영화 포스터를 보여주고 자리가 있냐고 물었더니 기적적으로 2자리가 남아 그 자리를 예약했다. 상영관은 5관 영화의 제목은 ‘맨발의 도망자’였다.
 영화 자리는 얻었지만 그 두 자리가 떨어져있어서 우리는 따로따로 영화를 보게 되었다. 헤일로는 맨 뒤의 오른 쪽 나는 맨 앞에 왼쪽. 헤일로는 서로 영화를 보지 않게 된 것을 안타까워했지만, 나는 솔직히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내 붉은 얼굴을 들키지 않아도 되는 뿐더러.. 내가 헤일로의 워먼덱스에 들어가는 것이 쉬워진다.


 영화가 시작하려 한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내 붉어진 얼굴을 헤일로가 느낄까봐 나는 영화 팜플렛으로 얼굴을 가린다. 가리자마자 주위가 밝아지며 어떤 여자의 숨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하마터면 내 귀가 떨어질 뻔 했다.

 우리의 여자 주인공이 쫓기고 있다. 여자 주인공은 범죄조직의 정보원이었다. 하지만 범죄조직에서 노리개 취급당하고 까딱하면 성희롱을 하는 상황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여자 주인공은 큰돈을 가지고, 그 범죄조직에서 탈출해 그냥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잠시 잠이 들었다. 나중에 여자 주인공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떠보니 자기보다 연약해 보이는 남자 주인공이 자기의 눈에 빗자루를 들이대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은 운명의 만남을 하게 되고 그 다음은 무한 반복되는 세상의 많은(진부한) 러브 코미디 이야기가 둘을 기다리고 있겠지.
 .... 라고 대충 쓰여 있는 유명한 영화 평론가의 블로그 포스트를 본다. 빼곡이 적혀있는 글씨가 나를 위로해 주는 것은 처음이다. 용기 내어 바로 앞을 보면 눈앞의 화면이 내 쪽으로 내려오는 느낌이 든다. 평소엔 잘만 보던 영화였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내 마음에서부터 영화를 거부하는 것 같다. 한 손엔 화면 밝기를 0으로 한 핸드폰을 들고 다른 한 손은 보이더가 준 워프캡슐이 든 주머니를 만지작대며 시간을 피해간다.

 갈수록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간다. 이 일도 클라이맥스를 향해 간다. 점점 여자 주인공의 비명이 커져간다. 점점 심장 박동 수가 빨라져 온다. 뒤를 돌아서 헤일로의 모습을 살핀다. 헤일로는 영화에 빠져 들었다.
 아직, 아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여자 주인공을 제압한 범죄 조직원이 총을 든다. 자기들을 배신한 증오스런 여자 주인공에게 총구를 겨눈다. 타앙- 총알이 총을 빠져나온다. 남자 주인공이 소리를 지른다. 슬로모션. 그 속에서 여자 주인공은 자신을 막아선 남자 주인공의 믿음직스럽지 못한 등을 본다. 헤일로를 돌아봤다. 헤일로가 그 장면을 보고 완전히 영화에 녹아들었다.
 헤일로가 자기도 모르게 ‘아!’라고 외친 순간,
 지금이다.
 바로 주머니에 들어 있던 워프캡슐을 입속에 털어 넣었다. 내 몸에서 빛이 난 것 같았다. 그 순간 내 영혼은 내 몸을 빠져나와서, 엄마가 선물해준 시계로 스며들어갔다.

 


 

 헤일로의 워먼덱스 안.
 안은 평범해서 놀랬다. 뭔가 기계 장치라던가, 호스라던가 그런 굉장히 딱딱한 것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건 침대 위 펜던트 등의 갓처럼 생긴 헬멧을 제외하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쓴 웃음을 지은 채 멍하니 방을 둘러봤다. 헤일로가 내 눈 앞에 나타나서는 ‘어서와! 내방은 처음이지? 내가 천천히 구경 시켜줄게. 그리고 같이 음악 먹자.(듣자!) 가능하면 너와 쭉 함께 하고 싶은데.. 어때?’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볼에는 아직도 붉은 기가 떠나지 않았다.

 실로 헤일로스러운 물품들.(헤드폰 컬렉션, 매일 먹는 음악들. 헤일로가 좋아라 하는 음악 쉐프의 포스터들.)을 꼼꼼히 살펴봤다. 포스터들을 들추고 헤드폰을 걸어둔 데에 뭔가 숨겨진 것이 없는 지 살펴봤다. 하지만 그쪽에는 헤일로가 루어의 스파이라는 증거가 없었다.

 안 돼겠다. 서랍이랑 침대 밑에도 찾아봐야지.
 찌릿! 찌릿! 전기가 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마법 같은 첨단 기술과는 어울리지 않는 따뜻한 원목의 서랍을 들췄다. 또 한 번 찌릿! 첫 번째 서랍에는 없다. 두 번째 서랍에도 없다. 세 번째 서랍에는 원목 서랍과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도 차가운 금속 열쇠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뭔가 있을 것 같이 생긴 침대 밑. 나는 그 밑을 심혈을 기울여 샅샅이 찾아봤다. 또 한 번 찌릿찌릿! 무시했다. 뭔가 있을 법한 침대 밑의 어둠속을 휘휘 휘저었지만.. 없었다, 아무 것도. 아아. 겨우 꼬리를 붙잡을 뻔 했는데, 그 꼬리의 주인은 멀리 도망가버린 듯 했다.
 이쯤에서 포기할까? 헤일로에게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데?


 ....... 아니다. 이 잔혹한 데이트를 여기서 끝내면 아무도 구할 수 없다. 거기다가 보이더의 초능력으로 알아낸 정보가 거짓일 리가 없잖아.

 나는 주저앉아있던 다리를 억지로 일어서게 했다. 찌릿찌릿. 다리 저림인가, 마음이 저린 건가. 뭐 그런 건 상관없다. 일단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벽을 더듬으며 다녔다. 벽에서는 이질적인 반응 없음.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심정으로 난 바닥에 온 신경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별로 특이할 것도 없는, 우리네 방바닥과 다를 바없는 촉감을 모든 신경세포의 힘을 빌려 파헤치고 파헤쳤다.


 서랍이 있는 바닥에 발을 댄 순간, 비현실적인 차가운 감촉에 순간적으로 발을 떼었다. 이쪽이구나.

 손을 대어봤다.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한 한기가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이건 루어의 마법이겠지. 마음을 고쳐먹으면 이딴 건 충분히 없애버릴 수 있다.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니 둘러진 방바닥의 시트 끝이 보인 것 같았다. 나는 시트 끝을 잡고 방바닥을 들춰냈다.


 역시 불어오는 루어의 찬바람. 찬바람이 멎은 다음에 드디어 철로 된 상자가 내 눈 앞에 있었다.

 상자를 들어올렸다. 더 이상 상자는 차갑지 않았다. 상자의 뚜겅을 열었다. 흠칫 놀랐다. 거기에 들어있는 것은 어떤 빵집 주인장의 명함과 워먼덱스에 딸려있는 전자 설명서 같은 거였다.

 나는 재빨리 그걸 꺼냈다. 그리고 생각했다. 워먼덱스에 왜 이런, 어울리지도 않는 빵집의 명함이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이 빵집의 로고 어딘가에서 본 것 같기도 한 것 같았는데... 떠오르는 기억을 잡으려고 발버둥 쳤지만 기억은 저 멀리 도망가 버렸다. 에잉.


 그리고 문제의 설명서 같은 전자책.
 나는 아이패드처럼 생긴 그 전자책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이거 어떻게 움직이는 거야? 이거 터치스크린인가? 눌러봤지만 아무것도 일어나지가 않았다. 열려! 설명서 나에게 내용을 보여줘! 워먼덱스의 물품들을 사용할 때처럼 그렇게 말해봤지만 무용지물.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설명서 조작에 애를 먹는 동안 뭔가 싸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았다. 검정색과 붉은 색의 빛이 비치는 것을 깨끗이 닦은 철제 상자가 말해주고 있었다.
 위험해. 위험해. 나는 설명서와 명함을 내 품안에 넣고는 떨고 있었다. 워프캡슐을 찾는 가련한 내 손. 하지만 워프캡슐 주머니를 입에 털어 넣기 전에 빨간 헤드폰을 낀 그가 나를 발견하는 것이 더 빨랐다.
 “선우...?”
 뒤돌아보기 싫었다. 다리가 후들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자동적으로 내 시야는 뒤쪽으로 옮겨지고 그 시선의 끝에는 우두커니 서있는 헤일로가 나를 보고 있었다.
 결국, 들켜버렸다.
 나를 보고 경악하는 헤일로를 봤다. 어지럽게 널브러진 내 마음도 함께 보였다. 나는 그를 보고 웃었다. 지금 내가 왜 웃고 있는 지도 모르는 상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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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덜너덜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약점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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