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더18. 잔혹한 데이트(2)



 

 어제는 밤늦게까지 옷을 고르다 잠을 설쳤다. 슬비를 구하려 헤일로와 데이트를 하는 거지만 그래도, 조금은, 그에게, 여자... 라고 느껴주었으면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우리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감정이다. 난 슬비를 구해야 된다. 사랑이라는 바람 같은 감정에 눈이 멀어서는 진짜 소중한 것을 내팽겨 쳐버리면 안 된다.
 그러면 안 된다.
 헤일로는 아침부터 가야하는 데가 있다며 어디 가버렸다. 또 어딜 싸돌아다니는 건지, 한숨을 내쉰다. 정말 너무한다. 여기 내 시계에 같이 있어주면 어때서. 이 나쁜 헤일로 같으니라고!

 설마, 지구에 있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나를 싫어하는 건.......

      그만하자. 이런 생각은 몸에 해롭다.

 오늘은 보이더가 살고 있는 안경을 안경집에 넣고 오랜만에 콘택트렌즈를 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헤일로의 숨겨진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보이더가 없는 것을 알면 헤일로는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할 수가 없다.
 뭐? 그 외의 이유가 있지 않냐고?
 으음... 그럴지도.

 지금 시간은 11시 반. 가볍게 아침을 먹고 난 후에 나갈 준비를 했다. 오랜만에 고데기로 머리도 구부리고 어젯밤 전전긍긍하다가 겨우 고른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고 이 때를 위해 모아둔 돈도 챙기고,(..... 중요한 워먼덱스의 워프 캡슐도 챙기고.) 헤일로의 눈 색깔과 비슷한 리본을 블라우스에 매었다. 마지막으로 슬비가 나에게 선물한 큐브 팔찌를 손목에 차고 거울을 봤다. 거울에서 슬비가 싱긋 웃는 것 같았다. “역시 너에게는 이 팔찌가 어울려!!” 슬비가 말을 걸어 주는 것 같아 눈물이 나왔다.
 기다려. 이 잔혹한 싸움을 끝마치고 곧장 너에게로 갈게.
 나는 거울에게 속삭이고 바로 기숙사 방을 나갔다.
 
 데이트 장소(전쟁터)로 향하는 길.
 오늘의 전장은 레스토랑 세라비, 서림문고, 스릴 더 시네마. 내가 정한 데이트 코스다.
 생각해보면 이게 내 인생의 첫 데이트다. 내가 예전부터 꿈꿔왔던 나의 연인과의 달콤한 데이트. 언젠가는 나에게도 찾아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데이트. 그런데 그게 이런 형태로 나에게 찾아오다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하아, 운이 없어도 너무 없다.
 ... 운이 없어도 너무 없다. 내 인생은.
 이런저런 씁쓸한 생각으로 머리를 채우며 만나기로 약속한 앨리스 네일숍 앞에 도착했다. 네일숍 앞에는 ‘연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버스 정류장 표지판이 있다. 헤일로가 오기 전까지 난 그 표지판에 기대어서 반대편에서 걸어가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역시 점심시간이라 그런가, 사람들이 많았다. 나처럼 다른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젊은 커리어 우먼. 둘이서 커플티를 입고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는 닭살 커플. 뭐가 그리 바쁜 지 입속에는 빵을 대충 넣고서 황급히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가고 있는 직장인. 택시에서 내려 어디론가 향하는 아빠, 엄마, 아들.
 어디에서 무얼 하든 그들은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들이겠지.
 어디에서 무얼 하든 그들은 나보다 더 많이 웃는 사람들이겠지. 그들을 자꾸 쳐다보고 있으면 내가 더 초라해보여서 순간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쪽에서 순간 헤일로와 눈이 마주쳤다. 볼이 또 빨개졌다. 헤일로는 언제나 입던 옷차림이 아니었다. 데님 셔츠 위에 받쳐 입은 진분홍색 스웨터, 그리고 화사한 베이지색 팬츠. 헤일로에게 딱 어울리는 옷차림이었다. 그걸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입가에 황홀한 웃음이 피었다. 아 저 멋진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 아, 저 멋진 사람이 내가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이구나.
 

 마음을 굳게 먹어야만 했다. 난 저 남자와 데이트하러 온 게 아니다. 난 저 남자와 담판을 지어야 하는 일이 있다.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슬비를 구하지 못한다. 슬비는 영영 이 지구에 돌아올 수가 없다.
 헤일로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메아리치듯이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우, 많이 기다렸어?”
 “.... 아니. 아니야. 많이 안 기다렸어.”
 “다행이네.”
 헤일로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위아래를 훓어 보고는 나에게 미소 지었다.
 “안경 벗은 모습이 훨씬 예뻐. 오늘은 옷도 여러 가지로 신경 많이 썼네?”
 “.... 너하고 데이트하는 거니까 잘 보여야 되잖아.”
 “정말 이뻐!! 너 원래 이렇게 이쁜 애였구나!”
 난 헤일로에 칭찬에 귀까지 새빨개져서는, 헤일로를 쳐다보고 있던 눈을 치웠다.
 “칭찬, 고마워.”
 헤일로는 이런 나를 보고는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헤에, 너 의외로 귀엽구나.”
 “그래. 나, 원래, 귀엽다. 뭐.”
 에잇! 박선우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저, 선우.”
 “... 왜.”
 “너 어디 갈 거야? 정했어?”
 “응. 데이트 코스는 이미 있어. 내가 다, 세워놨어.”
 “정말? 재밌겠다!”
 나는 그를 보고는 옅게 미소 지었다.
 “일단, 있잖아.... 배고프지 않아?”
 “응. 배고프네.”
 “그렇다면 우리 스테이크 먹으러 가자.”
 “스테이크? 좀 비싸지 않아?”


 “비싸지. 그렇지만 이런, 때를 대비해서 말야...... 아 내, 내가 비상금을 좀, 모아두는, 성격이거든. 그러니까 문제는 없어.”
 “... 선우는 착실한 애구나.”
 “응..! 칭찬해줘서 고마워.”
 바람이 우리 사이를 지나갔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바람.

 “그래서, 그 스테이크 집이라는 것이 어디 있는데?
 “여기 앨리스 네일숍의 샛길을 지나가면 있어.”
 “그래서 나에게 앨리스 네일숍에서 보자고 한 거구나~”
 “응. 일단 가자.”
 헤일로와 나는 일단 네일숍의 샛길을 지나갔다. 한낮인데도 어두침침한 골목길을 지나가면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헤일로가 나의 손을 잡으려고만 했다. 나는 헤일로에게 얼굴까지 빨개진 고개를 숨기고 헤일로의 손을 잡았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제어하지 못했다.
 그래서 잡은 헤일로의 손은 너무나 차가워서 내가 더 놀랬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숨기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헤일로의 손을 좀 더 감싸 쥐었다. 이것이 지금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 얼굴 새빨개진 것도 아랑 치 않고 헤일로를 봤더니 헤일로가 나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부끄러운 것일까, 내 멋대로 생각해버렸다.


 샛길을 통과하니 대명시의 숨겨진 번화가가 나타났다. 젊은이들의 성지, 보금자리. 그 이름하야 성명(成明)로. 이곳에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브랜드숍, 치킨 집, 유니크한 팬시를 취급하는 문구점이 많아서 데이트하기에 최고의 장소로 뽑히고 있다.
 우리가 지금부터 가려는 데는 그 중에서도 제일 앞쪽에 자리잡고 있는 레스토랑 세라비이다. 뭔가 할 일이 있어서 그 쪽에 들릴 때마다 항상 이곳을 쳐다보면 연인들이 메뉴들을 나눠먹고 있는 게 유리창으로 보였다. 그들의 모습은 너무 행복해 보여서, 나도 연인이 생기면 언젠간 이곳에 데이트 오자라고 결심했었는데,
 결국 이렇게 와버렸다.

 헤일로와 함께 레스토랑에 도착하니 벌써 무리지은 손님들이 많이 보였다. “두 분이세요?” 투피스를 말끔히 차려입은 레스토랑 여주인이 친절히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우리는 딱하나 남은 창가 자리를 안내 받아서 그 쪽에 앉았다.
 내가 물과 식기를 나누는 동안 헤일로는 레스토랑 메뉴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처음 여기 와본 어린 아이처럼 행동하는 그를 보고 좀 귀엽다고 생각해버렸다. 역시 전파 인간이라 그런가 고기나 면 같은 종류는 먹지 못한 듯했다.

 “저, 저기 선우!”
 “응? 왜.”
 “고기라는 거하고 면이라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였구나!”
 ..... 엥?
 “너 마트 한번 갖다오지 않았어?”
 “한 번 갔다 왔지만 그게 먹는 건지는 몰랐지..... 잠깐만, 내가 그 큰 마트 갔다 온 거 어떻게 아는 거야?”
 내가 미행한 사실 아직도 모르는구나..

 “나 네가 처음으로 지구구경한 날에 너 미행했었어.”
 정직히 말하자 헤일로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가 다시 풀어진다.
 “아, 그런 거야? 나 그런 것도 모르고 그 때 너 어디 갔다가 왔냐고 했는데...”
 “뭐, 그거 넌 몰랐으니까 그런 거 아냐. 이해해.”
 헤일로는 그런 나를 보고는 조금 걱정한 눈빛으로 나를 본다. 왜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보는 거야! 나는 가라앉았던 볼이 또 빨개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왜 고개 돌리는 거야?”
 “아무것도 아냐.”
 “나를 봐. 왜 고개 돌리는 건데?”
 헤일로가 조금 커진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그러는 너는 왜 나를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거야.”
 나는 아직도 헤일로에게 눈을 맞추지 못한 채로 말한다.
 “아, 그거? 그거는, 네가 그 때 일로 많이 화났나 싶어서.”
 “이제 와서?”
 “...... 늦은 거 알아.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 일이 좀 맘에 걸리네.”
 “그래?”


 나는 고개를 돌리고 싱긋 웃었다.(정말, 데이트할 때는 이렇게 귀여운 아인데... 이런 사람을 내가 속여야 된다니.)



 “그, 그 일은 벌써 지나갔잖아! 얼른 먹고 싶은 메뉴나 정해.”
 “알았어! 나는 음~ 이걸로 할까?”
 헤일로는 메뉴에 있는 감자튀김을 고르고는 나에게 메뉴를 넘겼다.
 “너 그거로 배가 차겠어?”
 “난 어차피 음파를 먹는 인간이잖아. 거기다가 내가 스테이크를 먹어버리면 니 돈 많이 들잖아.”
 “어머. 내 걱정도 해주는 거야? 고마워!”
 나는 헤일로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너, 솔직히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 같았는데 날 이렇게 챙겨줄 지는 몰랐어.
 ..... 역시 우리는 이렇게 만나면 안 되는 거였다.
 나는 여주인을 불러. 헤일로가 말했던 감자튀김이랑, 이 집만의 메뉴인 특대 스테이크랑 봉골레 스파게티를 시켰다. 주문을 받은 여주인은 메뉴를 가지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헤일로가 나를 보고는 “있잖아. 스파게티는 왜 시켰어?” 라고 물어봤다. 나는 그 진분홍색의 눈동자를 똑바로 보고 말했다. 볼과 귀가 빨개지는 것은 상관이 없었다. “내가 너에게 주는 선물이야.” 그러자 헤일로는 나를 보고 싱긋 웃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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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는 지금 정말로 슬플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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