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더17. 잔혹한 데이트(1)




 슬슬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른다. 헤일로는 워먼덱스를 벗어나서 밖에 나갔다. 이 녀석은 내 생명 에너지를 받아야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는데 어디에서 그렇게 탱자탱자 놀고 있는 건지, 요즘 헤일로의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한 나는 무심코 손톱을 물어뜯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교복에 보라색 목도리만을 두르고 신발을 신었다. 지금 나는 헤일로를 유혹하는 것이다. 지금 나는 헤일로를 꾀는 것이다. 헤일로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붉어진 내 두 볼을 붙잡으며 나의 목적을 다시 생각해봤다. 그리고 다시 붉어진 두 볼을 때렸다. 정신 차려! 그러나 그런 주인의 심심한 명령을 무시한 채 볼은 더 빨개졌다.

 말 안 듣는 두 볼을 목도리로 가린 채 기숙사를 나갔다. 학교를 지키는 가로등과 그들에게 뒤를 맡긴 채 산속 집으로 사라져 가는 해가 나를 바라본다. “저 녀석 바보구나.” “응. 저 녀석 바보야.” “가여운 녀석, 그 애가 널 사랑해 줄줄 알았니?” “포기해.” 쉰 목소리로 나에게 뭔가를 말한다. 귀를 막는다. 그만 해! 그렇게 남을 괴롭히는 것이 재미있냐? 그래도 내 맘속에서 그런 생각이 나는 것은 내 맘이잖아. 나를 변호하듯이 말한다. 살짝, 눈물이 또 났다.
 가로등들과 해가 지키고 있던 학교를 겨우 벗어나서 학교 앞에 있던 건널목을 건넜다. 그리고 늘 안경 속에 있는 보이더에게 말을 건넸다.

 

 - 야, 보이더.
 ㅡ 왜.
 - 혹시 헤일로 기억 중에서 뭐 읽은 거 없냐?
 ㅡ 헤일로? 몇 십 개 있긴 해.
 - 뭔데? 말해봐.
 ㅡ 음.... ‘박선우가 쫒아오는 거 아냐?’ ‘아, 그래도 역시 지구 구경은 재밌네. 우리 고향 같아.’ ‘...... 엄마.’ ‘아, 잎이 다 져버렸네? 그 땐 예뻤었는데. 아쉽다.’ ‘루어님 그냥 그 녀석 놔두고 그냥 지구에 살면 안 될까요?’ 정도?
 - ..... 그렇구나.
 ㅡ 뭐, 그 외에도 많지만 다 쓰잘떼기 없는 기억들이야.

 헤일로, 이 나쁜 놈.

 - 고마워. 헤일로 있는 곳 알 거 같아.
 ㅡ 뭘 그런 거 가지고... 일단 헤일로에게 가자.
 - 응.

 보이더의 뭔가 슬퍼 보이는 말을 들으며 나는 은행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곳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건물들에게 달려있는 지루해 보이는 간판들이 나를 보고 혀를 차는 것이 들리기도 했지만 그런 초자연적인 현상 따위는 나에게 상관없었다. 나는 지금 은행 나뭇길에서 나를 비웃고 있을 헤일로를 찾아야 된다. 그게 제일 중요했다.
 내 심장이 견딜 때까지 달리고, 한계다 싶으면 쉬고, 좀 쉬었다 싶으면 다시 달렸다. 그렇게 해서 다다른 은행 나뭇길엔 어둑어둑해진 저녁과 이미 동화된 헤일로의 뒷모습이 보였다. 만면에 웃음이 돌았지만 바로 모습을 감추고, 쓴 웃음만이 계속 걸려있었다.
 ‘목도리라도 하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저 오들오들 거리는 다리를 봐!’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헤일로에게 다가갔다. 헤일로는 지금 다가가는 사람이 나인 것을 알 텐데도 나에게 얼굴을 보여주기가 싫은 지 내가 다가갈 때마다 한걸음 더 나에게서 멀어졌다. 난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시당하기 싫어서 헤일로의 이름을 불렀다.

 “헤일로!! ... 헤일로... 헤일로... 헤일로...
 뻥 뚫린 길이지만 왠지 내 목소리가 메아리친 것 같았다. 그 때야 헤일로는 뒤를 돌아보며 나를 보고는 다시 나에게서 눈을 돌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놀랬잖아, 선우. 무슨 일인데?”
 보라색 목도리에 숨기지 못한 불이 있을까봐 나도 헤일로의 눈을 다 보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도 진분홍빛의 안광은 날 따라왔다.

 “저기, 헤일로.”
 “왜?”
 “부탁이 있는데 말이야..”
 “응. 무슨 일이야? 뭐든지 들어줄게!!”

 .......... 거짓이라도 달콤한 말이었다.

 “내일은 나랑 같이 지구 구경할래?”
 “에, 너랑?”


 “요즘 네 목소리를 못들은 것 같아서 있잖아. 응? 나하고 딱 데이트 한번만 해주라. 주인의 부탁이야.”
 “음... 응! 언제든지.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라도 괜찮아.”
 헤일로에게서 살짝 눈을 돌리고 있던 나는 다시 헤일로에게 눈을 맞췄다. 헤일로는 나에게 웃어보였다. 나도 웃었다.
 다행스럽게도 내 얼굴은 일그러지지 않았다.


 “그럼, 선우 언제가 좋아?”
 “내일 12시.”
 “내일? 내일은 학교 가야되는 날이잖아?”
 “학교 당분간은 쉴 거야.. 요즘 많이 몸이 안 좋아서.”
 “괘, 괜찮겠어? 나랑 같이 있어도?”
 “괜찮아.”


 여기까지 말하고 난 일부러 입을 닫아버렸다. 너 아직 할 말 있는 거 아니었어? 마음이 요동치지만 모른 척하고 난 지그시 마음을 눌렀다. 마음 겉으로 피가 새어나왔지만 그것도 모른 척했다.
 대신 그 추워 보이는 헤일로의 목에 내가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헤일로는 자신에게 둘러지는 이 목도리를 보고 놀란 듯이 나를 쳐다봤다. 놀란 헤일로의 눈이 내 눈과 맞닥뜨린 순간 몸이 달아올랐다. 그래서 재빨리 하늘로 눈길을 돌렸다. 하늘에서 빛나고 있던 해는 완전히 저물고 그 자리에 달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투명하고도 예쁜 달이.
 “그럼 이만 가볼게. 넌 좀 더 있다 와도 돼.”
 “응.”
 나는 뒤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었다.

 

 은행 나뭇길을 빠져나와 마트에서 학교까지 뛰어서 빠져나왔다. 심장이 헤일로를 눈에 담아서 뛰는 건지 아니면 여기까지 달려와서 뛰는 건지 나는 모른다. 학교 정문의 언덕에 무심코 앉아서 숨을 정리했다.


 

 안정을 취한 후에 올려다 본 달밤엔 헤일로와 내가 보였다. 그 달밤에 떠있는 나와 헤일로는 서로 대화를 귓속말로 나누고는 나를 보고 웃었다. 그리고 둘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빨개진 두 볼을 숨기지 않고 키스를 했다.
 쓴 웃음이 나왔다. 현실의 나와 헤일로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황홀한 상황이 달밤에 상영되고 있었다. 난 그걸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 둘은 딥키스를 한 후에 서로 손을 잡으며 어딘가로 발길을 돌려 사라져 버렸다.


 안경을 벗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에게 쌓여가는 거짓들, 나에게 쌓여가는 거짓들. 모두 모아 불을 붙여 없애버리고 당장 그의 품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우리의 꼬여버린 관계가 그걸 가만 두고 보질 않았다. 그저 이 상황에 이끌려 조종당하고 있는 느낌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나에게 있는 걸까? 어째서. 내가 이렇게 항의하고 저항해도 내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의 운명은 변하지 않는다.


 ㅡ 저기, 선우. 일부러 안경 벗지 않아도 돼. 이래도 들어오는 생각은 들어오니까.
 순간 보이더의 소리가 들어왔다.
 - 아! 그러고 보니 맞다... 미안.
 ㅡ 왜 니가 미안해하는 거야.
 - 왠지 너에게 나쁜 기억만 준 것 같아서.
 ㅡ 아~니야. 사람 안에 좋은 생각만 있는 건 아니잖아. 나쁜 생각도 있는 건 당연하잖아. 그러니 그렇게 죄책감 느낄 필요 없어. 그리고 너는 나를 소중히 여겨 주잖아? 그 안경을 벗어두는 행동만으로도 그건 충분히 느낄 수 있어.
 - 보이더..... 고마워.
 ㅡ 빨리 기숙사로 돌아가자. 너 목도리도 헤일로에게 주고 없잖아?

 “알았어. 가자. 슬슬 배도 고파오네.”

 나는 텅 빈 달밤을 보고 작게 웃음 짓고는 일어섰다. 돌바닥에 앉아있었던 엉덩이를 털고 나는 기숙사 내 방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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