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더13. 보이더(4)

 


 희미한 두통을 느끼면서 나는 깼다.

 눈물은 말랐고 깊게 구멍이 나있던 몸도 워먼덱스의 거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의료 기술로 대부분 회복되어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서 식료품 향수를 뿌리고 워먼덱스에 부착된 모니터를 봤다. 카르텔 성에서 옛날 유행하던 안경이 줄지어선 케이스가 있는 풍경으로 보아, 여기는 어느 별, 어느 나라에서 운영하고 있는 옛날 안경가게인 듯 했다.

 스크린 밑 행선지엔 붉은 글씨로 지구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대명시라는 도시에 세워진 투모로우 안경매장내의 19307심플형안경이라고 쓰여 있었다.

 왜 안경일까, 심히 궁금해지는 행선지 선택이다.


 한동안은 멍하니 옛날 안경을 쓴 푸근한 아저씨의 소리를 들었다. 그 말은 처음 들어보는 언어였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아마 워먼덱스에 있는 정보 습득헬멧이 내 뇌에 그 언어에 대한 정보를 넣었겠지. , 워먼덱스 사용법에 대한 정보도.) 그 아저씨의 말을 들어보면 이 지구에 있는 사람들은 눈이 안 좋으면 옛날 안경을 쓰고 다니거나 렌즈를 끼고 다닌다고 한다.

 아, 시력이 좋아지는 알약들이 개발되지 않았구나. 그래서...

 두통이 갑자기 심해진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와의 추억이 떠오른다. 내가 어릴 때 셋이서 시력검사를 하러 갔었던 때. 그 때, 오른쪽 눈 시력이 마이너스여서 그 때 그 맛이 없는 알약을 일주일동안 먹었었지.

 잠시 동안이나마 꿈에 잠겨본다. 행복하다. 거짓 행복이라도 좋다. 할아버지가 그 맛없는 알약을 먹은 나에게 다디단 사탕 향수를 준다. 내 머릿속이 달게 변한다. 하지만 그 느낌은 오래가지 못하고, 사탕향기는 비릿한 피 향기로 변한다.

 그 때 갑자기 워먼덱스의 압력 감지 센서가 삐삐하고 울린다. 누군가 워먼덱스를 잡은 것이다. 나는 워먼덱스를 잡은 사람의 얼굴을 보여주라고 명령했다. 눈매 더럽게 매서운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워먼덱스가 있는 안경을 훑고는 만족스러운 듯이 웃었다. 그녀는, 웃음이 서툴렀다. 내 인생에 누구 잡아 먹을듯한 웃음은 루어 이래로 처음 봤다.

 ........ 나 이 친구하고 친해질 수 있을까.

 아니다. 얼굴보고 판단하지 말자. 사실은 엄청나게 상냥한 애일수도 있다. 친구가 되는가 안 되는가는 전부 내 행동이 정하는 것이다. 분명 그녀하고 나는 단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모니터에 나타나는 그녀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 얼굴은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슬프게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나는 선우를 만났다.

 ‘투모로우 안경매장 옆 공원. 초록의 향연. 아직 다른 나무들보다 크지 못한 나무에 나는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잠옷으로 나오기는 아직도 추운 날씨였다. 위치 선정을 해도 꼭 이런 곳을 택하는지, 정말 나는 바보였다. 여기 더 있으면 난 불타 없어진 옛 기억의 자국을 더듬거리다 결국 죽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지금 상황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리본 소녀가 납치되었다. 선우와 친구들에게서 생각들이 날아왔었다. 그와 동시에 나에게 보내는 푸념도 받았다. 희망의 메시지도 한 개 있었지만.... 지금 나에겐 그딴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내 탓이다. 루어가 나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계약을 한 선우의 고등학교에 일부로 찾아온 것이다. 절망을 주기 위함이겠지. 그 누구에게도 준 적이 없는, 아주 품질 좋고 구하기 엄청 어려운 그런 절망을 나에게 주고 싶겠지. 그런 다음 나를 평생 곁에 두려고 하겠지. 루어의 상큼해 깨물어죽이고 싶은 미소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몸서리가 쳐졌다.


 

 다시는 선우를 잃고 싶지 않았다. 나를 받아준 선우에게 위험 같은 것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있으면 물론 힘들겠지만, 이렇게 습격을 당하는 것 같은 꼴은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상황은 완전히 나로 인해서 선우와 리본 소녀, 학교 친구들이 피를 뒤집어 쓴 꼴이 되어버렸다.

 그때 선우 옆에만 있었으면 적어도 리본 소녀가 납치되지는 않았을 텐데.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나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피를 묻혔다. 역시 나는 아무도 구할 수 없다. 예전에도 오늘에도, 난 무력했다.

 하얗게 머릿속이 타들어간다. 꼭 그리운 우리별의 하늘같다. 죄송해요. 무능한 나라서 죄송해요. 머릿속에 비가 내린다. 추적추적. 날씨의 요정이 왠지 오늘따라 맑은 날의 해가 보기 싫어 흰색 구름으로 그걸 감추고 비를 뿌린 것 같다.

 어디선가 선우의 생각이 나에게 날아와서는 기다리라고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그 생각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애절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