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XX. 사건(4)

 

 

 

 

 

    

 양호실에 갔다 오고 나서 선우의 상태가 이상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형태가 다른 무언가로 변해버린 것은 아니다. 언제나처럼 선우는 조용하고 까칠했다. 다만 선우의 무기력과 죄책감이 증폭된 것뿐이다. 단지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로써 선우에게 주어지는 정신적 충격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상이상일 것이다.

 역시 그 녀석이었다. 이건 내가 전에 전쟁에서도 봐온 루어의 고유한 스타일이었다. 마법을 거는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한 절망을 선보여준 뒤에 나락에 떨어뜨려버리는 아주 질 나쁜 방법. 난 이 녀석을 잘 알고 있다. 전에 이 녀석의 스타일을 정말 뼈저리게 느낀 적이 있으니까.

 불타는 카르텔 성에서 선우가 살고 있는 지구로 오는 90년 동안 한 번도 잊어버린 적이 없다. 그 날의 광경, 그 날의 감정. 나에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드는 할머니, 할아버지. 루어에게 공격당하면서도. 당신들은 행복한 듯이 웃고 있어. 아직도, 아직도 당신들은 내 마음에서 행복한 듯이 웃고 있어.

 

 선우는 나에게 말한다. “보이더, 난 너에게 좋은 계약자인 걸까....” “아니야.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구할 수 있어..” “나 있잖아, 슬비에게 너무 걱정시키게 하는 건 아닐까?” 하나같이 마음 약한 소리뿐이다. 넌 약한 게 아니라고, 오히려 나보다 더 강한 사람이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다. 야자시간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도, 그리고 지금 기숙동으로 가는 중에도 그 소리뿐이다. 루어의 마법이 강력하게 걸린 것이다. 정말 싫다. 선우가 이렇게 절망하다 나를 버릴까봐 두려웠다. 난 선우가 말하는 것처럼 속까지 강한 사람이 아니다. 지금도 이렇게 손발이 떨리고 있는데.

 

 - 보이더.

 ㅡ ?

 - 갑자기 궁금해져서 그러는데 너는 어렸을 때 어땠어?

 ㅡ 뭐가?

 - 공부 말이야. 공부. 너는 그때 공부 잘했었어?

 ㅡ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그래도 상위권은 된 것 같아.

 - , 그렇구나. 그래도 그거로도 굉장하네!

 워먼덱스 속에 부착된 모니텨에서 선우가 쓴 웃음을 짓는 게 보인다. , 실수다. 선우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 역시 넌 달라. 아직 그 카르텔 성이 있었으면 넌 유명한 사람이 됐을 거야! 연구원이나 교수 같은 거!

 ㅡ , 그럴지도 모르지만.....

 

 갑자기 그 카르텔 성에 있던 성립(星立) 식물 연구소가 생각이 났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막 태어난 인공 식물의 싹을 보여주시던 그 시간이, 그 환희가, 내 발끝에서 뿜어져 나와 워먼덱스를 감쌌다. 황홀했다.

 ㅡ 그래도 있잖아. 너도 이 대한민국이라는 곳에서도 안 꿀리는 외고에 다니고 있잖아?

 - 에이, 안 그래. 요즘 이 나라에서는 이 외고 졸업장 딸랑 하나 가지고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어. 얼마나 잘나신 나란데 이정도 가지곤 쨉도 안 돼. 높은 점수를 받아야 된다고. 그래야 어느 정도 앞서나갈 수 있어.

 ....... 정말로 숨 막히는 나라네. 성적으로도 보이지 않는 성적이 있잖아? 안 그래?

 - 그런 의미에서 넌 대단한 거야. 될성부른 떡잎이라는 거네! 근데.. 별이 멸망해버리고..

 ㅡ 뭐 그렇긴 하지만..

 

 기숙동 우리 방에 돌아와서 선우는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서 한숨을 쉬며 말했다.

 - 보이더.

 ㅡ ?

 - 전부터 궁금한 게 있어.

 ㅡ 뭔데?

 - 넌 왜 이렇게 완벽한 건데?

 ..... ? 갑자기 무슨 말을.

 ㅡ 난 별로 완벽하지 않아.

 - 아니야. 넌 완벽해.

 ㅡ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 , 내가 너를 좀 이상하게 여길 때에도 나를 상냥하게 대해주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챙겨주고.

 ㅡ .........

 - 니 고향이 멸망당해서 무서울 텐데도, 처음 보는 나를 보고 떨지도 않고.

 ㅡ .......

 - 게다가 나이스 바디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선우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니.

 - 난 너와 달라서 겁쟁이에, 찌질이에, 너보다 못 생겼어.

 ㅡ ........

 - 있잖아. 보이더.

 ㅡ....

 - , 너하고..

 

 ㅡ 아니야!

 - ... ?

 

 아니야! 넌 나의 둘도 없는 계약자야! 누가 뭐래도 넌! 내 둘도 없는 계약자야!

 

 시계 소리만이 우리들을 갈라놓았다. 째깍, 째깍.

 

 - 정말, 그렇게 생각해?

 ㅡ . 100% 확신이야.

 - ... 고마워.

 ㅡ ..... , 그런 거 가지고.

 선우는 안심이 되는 지,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웃음은 금방 사라질 신기루처럼 투명했다. 왜일까, 난 그 웃음이 중병에 걸린 사람이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고 난 다음에 지어보이는 웃음 같았다. 불안이 엄습해오는 소리가 났다.

 붕대감은 선우의 발에는 아직도 피가 조금 배어나오고 있었다.

 

 

 

 

보이더는 약한 여자입니다. 연약하고도 연약한, 얇은 얼음 한장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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