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27. 사건(1)
그 ‘사건’은 일본어 말하기 대회가 지나고 4일 만에 일어났다.
일본어 말하기 대회가 끝난 지 두 번째 날, 나는 평소대로 공부 하고 밥을 먹고, 슬비와 함께 잡담을 즐겼다. 보이더와도 자주 장난을 칠 정도로 친해졌다. 그 시간들이 나에게 너무나도 소중하게 다가와서 이대로만 지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2일 동안 오빠와 단둘이 있던 적에 느꼈던 따뜻함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세 번째 날도 나는 평범하게 일어나 평범하게 슬비와 인사하고 평범하게 공부를 했다. 오전 수업이 끝나 급식소에 갈 때 까지도 오늘도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겠구나, 라고 느꼈다.
아니, 제발 오늘도 이렇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느꼈다. 그 3일 동안 뭔가가 찜찜하게 남아있었다. 그 일본어 말하기 대회에서 보았던 네이비가 조금이지만 아직 남아있었다.
이상했다. 네이비차미애의 도발는 내가 모두 다 지운 게 틀림없는데..
급식소, 슬비와 나는 점심을 먹고 있었다. 슬비가 어제 S TV에서 방송했던 패션쇼에 나온 모델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도 어제 우연히 기숙사 광장에서 그 패션쇼 방송을 보았는데 모델들의 룩이 꽤 멋졌기에 그만 끝까지 보고 말았다.ㅡ난 그 패션쇼에서 살짝 어깨를 들어낸 블라우스와 가죽으로 된 7부 바지를 입었던 애가 제일로 멋있었다.
하여튼, 둘이서 그 패션쇼 모델들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슬비가 뭔가가 생각이 난 듯 나를 쳤다.
“왜?”
“야, 야, 나 갑자기 생각났어.”
“뭐가.”
“그 뭐신가? 우리 일본어 말하기 대회 끝나고 태클 걸러 온 애 있잖아.”
차미애를 말하는 것 같았다. 마음속에 있던 네이비 색이 조금씩 나를 좀먹어갔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하며 슬비에게 말했다.
“그 애? 왜?”
“내가 복도 지나가다가 그 짜증나는 애 반 친구 같은 여자들이 말하는 걸 얼핏 들었거덩.”
“응, 응. 그래서?”
“그 애 갑자기 그렇게 변했다고 하던데?”
“무슨 소리?”
“그 애가 여기 입학 했을 땐 조용하고 상냥한 애였다고.”
“진짜?”
“응. 그땐 착하고 좋은 애였는데 저쩌번달부터 갑자기 애가 차갑게 변했다는 거야.”
“그래?”
놀랐다. 나로서는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기 싫었다. 그 ‘사람에게 생채기 내고 싶어 하던’ 눈을 가진 그 애가 예전엔 착한 애였다고? 그 차미애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러면 생각해보자. 그 애는 왜 그렇게 변했을까? 그 사람 좋다고 반 친구들에게도 소문난 여자애가 어떻게 그렇게 빨리 변할 수 있을까? 딱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은 귀신같은 그 무언가가 그 차미애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경우였다. 그리고 걔가 차미애를 조종하고.. 거기까지 생각이 나자 갑자기 몸서리가 쳐졌다. 왠지 기분이 안 좋았다. 이 평범하고 재밌는 일상이 끝나고 불길한 뭔가가 일어날 것 같은 싸한 느낌이 들었다.
네이비 색에 다 삼켜질 것 같았다.
“왜, 선우? 무슨 일 있어?”
“아, 아니야. 아니야! 아무것도.”
“그럼 다행이다. 난 또 무슨 일 있나 싶었지.”
“아, 슬비.”
“왜?”
“너는 어떻게 그걸 자세히 아는데?”
“... 아, 그냥. 내가 다른 사람보다 귀가 좋거든.”
슬비는 어색하게 웃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교실로 돌아가 공부를 시작했다. 아직까지 네이비가 나를 휘감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부터 진짜 뭔가가 일어난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 지 걱정이 되었고 두려웠다. 공부 내용에 집중하려고 해도 네이비가 내 시야를 가로 막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때, 보이더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ㅡ 선우.
- 왜.
ㅡ 너, 조심해.
- 왜, 뭐 조심해야 될 게 있어?
본심을 숨기고 말했다.
ㅡ 그 슬비라고 하는 애가 말했던 차미애라는 여자 있잖아.
잠깐만.
- 너 점심시간 얘기 들었어?
ㅡ 응. 조금.
- 그래서, 왜?
ㅡ 나도 조금 그 애 수상하게 생각해.
에..?
- 정말? 너도?
ㅡ 응. 걔 좀 이상해.
- 뭐 때문에 그러는데?
ㅡ 걔한테서 네이비 색깔이 보여.
보이더 너도?
- 네이비? 나도 자꾸 걔만 보면 네이비 색깔이 내 눈을 덮는 거 같은데.
ㅡ 정말? 나도 왠지 누군가가 자꾸 겹쳐 보인단 말이지.
- 에, 누구?
ㅡ 나 외계 행성에 있을 때에 얘긴데.
- 응.
ㅡ ..... 내 고향별하고 다른 별하고 전쟁이 났었던 적이 있었어.
- ..... 아.. 응.
갑자기 슬퍼졌다.
ㅡ 그때 그 무슨 색깔로 마법 쓰는 녀석이 있었거든. 그 녀석이 저런 비슷한 색깔들로 사람들을 조종하는 마법을 부린 것 같아서. 잠시 그런 생각이 났어.
- 너랑 다른 별 사람?
ㅡ 응. 그랬던 걸로 생각해. 그리고 그 사람이 나를 끈질기게 따라 붙었거든.
- .... 그래?
ㅡ 응.. 그러니까 너도 조심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보이더는 울먹이고 있는 듯 했다. 그 박력 있던 목소리가 가늘고 길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보이더를 조금이라도 달래주고 싶었다.
- 당연하지! 나는 그런 네이비에게 지지 않아! 설령 내가 그 네이비에게 쓰러진다고 해도 기절하지는 않을 거야. 보이더, 너도 조심해.
내가 그렇게 보이더에게 말하자 보이더는 웃어 보이며 말했다.
ㅡ 알았어, 알았어. 서로 조심하면서 살자.
그렇게 우리들의 대화는 끝났다.
그 후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 아직도 난 떨고 있었다. 보이더에겐 당당한 듯이 그렇게 말했으면서, 나는 떨고 있었다. 서로 조심하자고, 나는 정말 괜찮다고 말했으면서 아직도 떨고 있었다. 비참했다. 그 일본어 말하기 대회 후에 보았던 그 네이비가 아직도 내 눈을 덮고 있었다. 보이더, 거짓말해서 미안. 사실 엄청나게 무서워.
하지만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려야겠지, 보이더에게 그렇게 말하기도 했고. 이대로 네이비에게 지면 안 된다. 일본어 말하기 대회 때 네이비를 떨쳐냈던 것처럼, 다시 그렇게 하자. 보이더에게 걱정 끼치는 일은 하지 말자.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면서 생각했다.
학교 마치고 일어날 그 사건을 이때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