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에게25. 네이비(5)
ㅡ 수고했어!
대회를 마치고 교실에 들어오는 중, 보이더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 아, 고마워. 보이더가 내 마음을 다 잡아준 덕분이야.
보이더는 웃었다.
ㅡ 그것도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 멋진 대본을 짜고 연습한 것은 선우 너하고 슬비라는 친구잖아? 나는 그것밖에 한 게 없어.
그 말을 들은 나도 웃었다. 네가 그렇게까지 겸손하게 굴 필요는 없는데. 네가 없었다면 아마 난 그 네이비에 굴복 할 뻔 했을 거야.
2층, 2학년 A반 교실에 다다랐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다들 쉬는 시간인지 둘 셋씩 짝을 지어 떠들고 있었다. 슬비를 찾아서 눈을 굴리다 자기 자리에서 땀을 흘리던 슬비와 눈이 마주쳤다. 그 천연파마는 양 눈을 반짝이며 전속력으로 나에게 달려왔다. 슬비야, 스톱, 스토옵!
“선우, 얼렁 와! 기다리다 죽는 줄 알았어.”
스스스, 슬비는 나나나, 나를 껴안으며 말했다.
“스, 슬비? 그거 자, 자제 해주지 않을래? 애들 다 본다고!”
“... 아.”
슬비 볼에 해당화가 피었다. 부끄러운 지 슬비는 뒤로 물러났다.
“미, 미안! 일단 밖에 가서 얘기하자”
“응.”
우리는 복도로 나갔다. 그리고 슬비는 정말 감격한 듯이 내 손을 잡으며 나에게 말했다. 슬비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거렸다.
“네 발표 있잖아, 정말 감동했어! 꿈은 누군가에 노예가 아니라는 거 나도 정말 공감이야!”
왠지 두근거렸다.
“아... 그래? 고마워. 그럼 내 발표가 먹혀 들어간 거나 마찬가지네?”
“응. 그리고 좀 부끄럽기도 했고.... 말야.”
“부끄러웠다고?”
슬비는 머뭇거리다가 나에게 말했다.
“나 사실은 은비 언니를 뛰어넘는 게 꿈이라서 여기 들어왔거든. 그래서 지금까지 억지로 공부를 해왔어. 근데 그렇게 공부해봤자 재미도 없잖아. 거기다 공부한다고 친구도 제대로 안 만들었으니 학교가 재미없었어.”
...슬비도 나와 같았구나.
“하지만, 네 발표를 듣고 결심했어. 나도 진짜 내 꿈을 찾고 싶다고. 그렇게 되면 학교생활도 재미있을 거고 공부도 왜 해야 하는 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거야! 살아가는 의미도 찾을 수 있을 거고.”
나는 웃었다. 그래, 슬비야. 그거야! 그거.
“저, 그래서 부탁이 있는데..”
“응, 뭐?”
“.. 아.”
슬비는 나를 힐끔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이고서는 말했다.
“내 꿈 찾는 거, 도와주지 않을래...? 같이 찾아 줬으면 좋겠어.”
저절로 입 꼬리가 올라왔다. 어디선가 오빠의 콧노래가 들려왔다. 나는 슬비의 두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슬비의 손은 차가웠다.
“응, 내가 도와줄 수 있을 때까지 도와줄게. 서로의 꿈을 위해서 힘내자!”
슬비는 활짝 웃음 짓더니 내가 잡은 두 손을 흔들며 말했다.
“응! 같이 힘내보자!!”
슬비와 나는 마주보고 선 쌍둥이 길에서 서로 바라보며 손뼉을 맞췄다.
지루하게 늘어졌던 수업이 다 지나가고, 슬비와 놀러나가려고 서둘러 가방을 쌌다. 슬비는 오랜만에 밖에 나가 어디로 놀러간다는 것이 기대된다면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이 마치 겨울잠에서 막 깬 아기 곰 같았다.
교실을 빠져나가서 허리를 숙이고 까치발로 걸었다. 숨 쉬는 것조차 들키기 싫어서 입을 막았다. 그렇게 복도를 무사히 빠져나간 후에 슬비와 이야기를 하면서 운동장을 걸었다. 갑자기 내 앞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선우, 앞에 누가 왔는데?”
슬비가 내 어깨를 쳤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긴 머리에 투명한 네이비. 미애였다.
“아, 오늘 대회에서 발표한 애다.”
“..... 몰라. 처음 봐.”
일단 기분 나빠. 얘가 왜 내 앞에 있는 건데, 싫다. 방해하려고 온 건가?
“박선우.”
네이비 색깔 듬뿍 묻힌 한마디였다.
“..... 뭐야?”
“오늘 발표 잘 들었어.”
난 가만히 있었다.
“뭐, 너라면 그 새로운 꿈이라는 거 찾는 데까지 3년, 아니면 5년 정도 걸릴 것 같지만.”
미애는 조소를 머금었다. 내 옆에 있던 슬비가 화가 난 듯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뭐야! 지금 선우를 조롱하는 거야?”
“아니, 딱히 조롱하는 건 아니야. 그저 그게 너의 현실인 것 같아서 말하는 거야.”
미애의 말이 나에게 박혔다.
“... 저게!”
슬비는 당장이라도 미애에게 달려들 것 같았다. 나는 슬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
아니야. 아니야. 네 말은 틀렸어. 네 말은 틀렸어. 난 그런 말에는 속지 않아.
“......... 그랬을 지도 모르지.”
미애가 나에게 고개를 들었다. 네이비가 나를 한 번 더 공격하려 바늘을 들었다.
“지금부터 2주 전까지의 나였으면 말이야.”
“호오?”
미애는 실로 흥미가 간다는 듯이 반응했다.
“그래. 정 그렇게 믿고 싶다면, 그렇게 해봐. 세상이 무너져 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게 될 거야.”
미애는 끝까지 나를 조롱하고 비웃었다. 나는 미애의 네이비색 눈동자를 끝까지 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가, 조금 흔들린 것 같았다.
“어디 한 번 잘 해봐.”
미애는 그 말을 하고 돌아서서 학교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멍하니 미애가 가버린 길을 바라보았다. 미애가 떠나가 버린 길옆에는 외로운 나무 한 그루만이 그 곳을 지키고 있었다.
“저 애, 싸가지 없게 저러네, 선우 혹시 쟤 예전부터 아는 사이였어?”
멍하니 계속 있다가 슬비의 질문을 받았다. 잠시 하늘을 보다가 슬비에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전혀.”
슬비도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우리들도 같이 손을 잡고 학교를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