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에게23. 네이비(3)
수업 1교시가 시작되었다. 대회는 2교시부터라 할 수 없이 난 수업을 들었다.
“어이, 수업에 집중해야 할 시간 아니야? 왜 이렇게 긴장하고 있어?”
내 속의 ‘이성’이 말했다. 얄밉게.
“조금 있으면 드디어 대회잖아? 어떻게 진지하게 있을 수 있냐고.”
곧이어 ‘감성’이 되받아쳤다.
“그래도 일단은 집중을 해야 될 것 아냐.”
“너는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되냐?”
“다음 기말 시험을 생각해봐. 집중해야 그 때 내신 성적 잘 나오지. 안 그러냐?”
“야! 그래도 기말은 공부하는 시간이라도 있지. 대회는 이제 시간도 없잖아.”
“수업이 먼저야. 빨리 집중해!”
“나도 집중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걸 어떡해!”
“그 어쩔 수 없는 걸 어떻게 해라고 말하는 거 아냐.”
.... 쟤들은 언제쯤 안 싸우고 단결해서 지낼 수 있을까...
국어 선생님의 수업이 귀에 안 들려왔다. 그저 마음속에 말 안 듣는 녀석들이 싸우는 것을 듣고만 있었다. 시간은 오늘 따라 느리게 돌아갔고 나는 교실 바닥이 들려지는 환상을 보았다.
그토록 준비했는데 틀리면 어떡하지? 만약 대회 일이 잘못된다면 대한민국을 떠나 저 멀리 그린란드에 가서 땅굴을 파고 살기나 할 거라고 다짐을 했다. 그곳에서 만나게 될 개썰매를 끄는 개들은 나의 서투른 일본어를 알아듣지도 못할 테지, 나는 아무 말도 안 해도 될 거고. 그때 그 얼음들을 상상하며 이상야릇한 웃음을 지어보았다.
그렇게 첫 교시가 끝나고 나는 슬비와 보이더의 열렬한 응원을 받으며(네가 연습한 대로만 하면 상을 못 받을 리가 없어!) 대회가 진행될 방송실로 갔다. 문이 열리자 드러나는 넓은 공간. 방송실 벽 가운데에 일본어 말하기 대회의 플랜카드가 너무 무섭게 보이기도 했고 재밌게 보이기도 했다.
무대 오른쪽에 먼저 온 다른 학생들이 각자 대본을 외우고 있었다. 어떡해. 벌써 대회 10분 전이야. 나 다 못 외웠는데! 생난리를 치는 학생도, 손을 부지런히 떨며 머릿속으로 대본을 생각하는 학생들도, 다들 잘하고 싶다는 마음에 들떠있겠지. 그들을 멀뚱멀뚱 쳐다보며 빈 자리에 앉으려고 했는데 그 옆에 앉아있던 긴 머리의 여자애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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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그대로 빨려 들어갈 뻔 했다. 단 영점 몇 초 사이에 그녀의 눈이 나를 압도해 버렸다. 그 눈 속에 있는 끝 모를 어둠이 내 눈 속으로 흘러 들어와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그 눈의 색깔은 투명한 네이비였다.
그 눈을 지나 다른 빈 자리에 앉아서 대본을 펼쳐들었다. 대본을 쭉 훑어보려고 했지만 아차! 벌써 시야가 네이비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고개를 흔들어 네이비를 떨쳐냈다. 그러나 아무리 떨쳐내도 네이비는 시야에 계속 묻어있었다. 에이, 시간이 없어. 나는 시야가 네이비에 잠복 당하든 말든 내가 발표할 대본에 집중했다. 난 너에게 지지 않을 거야. 어떤 일이 있어도!!
흰 머리의 교장 선생님과 사회자를 맡은 선생님, 심사위원 선생님들이 문을 열고 대회장으로 들어오셨다. 드디어 일본어 말하기 대회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