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15. 전치현상(3)


 난 그 후로 슬비의 뒤 꼬랑지만 졸졸 따라다녔다. 슬비는 눈으로 자신의 눈이 스캔할 수 있는 범위란 범위는 다 훑고 지나갔다. 맘에 드는 표적을 발견하면, 잽싸게 낚아채 먼저 가격을 보고 색깔을 보고 맘에 안 들면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자기의 길을 갔다. 척척 자기의 일을 진행해 나가는 그녀는 패션특화형 로봇 슬비LZ-104였다.

 슬비LZ-104의 눈빛이 옷감을 꿰뚫었다. 슬비LZ-104는 그 옷이 맘에 들었나 보다. 가격 괜찮고, 색감 괜찮고, 곧바로 맞는 사이즈를 부탁해서 입고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그럴 때 마다 내 나름대로 충고를 해줬다. 흥미가 없지만 내 친구의 일이니까.

 피팅룸에서 슬비LZ-104가 각각의 포즈를 취해보는 동안에 나는 슬비가 맡긴 가방을 들고서 애꿎은 거울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슬비LZ-104는 나에게도 옷들을 맞춰보며 를 체크하고 있었다. 슬비LZ-104가 전해준 그 옷들은 나에게 어울리긴 했지만 내 마음엔 들진 않았다. 거짓이 없는 투명한 거울에다 비춰보니 품이 조금 컸다. 난 그런 옷이 싫었다.

 

 슬비는 하나의 옷만을 고르고, 계산을 했다. 그리고 그 옷을 입고 나왔다. 보는 순간 빛이 나에게로 퍼져 나왔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슬비가 고른 품이 넓은 케이프 코트는 처음부터 슬비의 일부분이었던 것처럼 딱 맞아 떨어졌다. 그 코트는 자신을 가려 슬비를 더 돋보이게 해주었다.

 “어때? 네가 보기엔 예뻐?”

 “예뻐. 정말. 진심으로!!”

 “정말? 고마워!”

 슬비는 그러면서 내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텅 빈 나의 손을 보자 슬비는 무언가 결심한 듯이 내 손목을 잡아끌며 말했다.

 “이번엔 저쪽으로 가보자!”

 또 다시 나는 슬비에게 끌려가기 시작했다. 슬비의 눈동자 속엔 우유 거품 같이 하얀 파도가 일렁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슬비 손에 이끌려갔다. 이윽고 슬비가 저기, 저기!’하며 손가락으로 매장을 가리켰다. 그 매장은 패션에 관심 없는 나라도 이름은 들어봤을 악세사리 점이었다.

 슬비LZ-104는 재가동하기 시작했다. 재빨리 전방에 있는 목표물들을 스캔하고 단 하나의 목표물을 찾아서 냅다 달리고 달렸다. 나는 같이 가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슬비는 저만치 가서 팔찌들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를 집어든 후 슬비는 나를 재촉했다. 빨리 와! 왜 이렇게 느려? 아 좀 기다리라고. 너무 빠른 거 아니가?

 

 “, 이제 됐다.”

 

 슬비가 뻗어보래서 뻗어본 내 손목엔 팔찌가 걸려있었다. 네모난 큐브의 행렬 뒤에 색깔이 각자 다른 동그란 보석들이 그 뒤를 받치고 있는 모양새의 팔찌였다.

 “이건 뭐야?”

 “선물이야, 선물.”

 “선물?”

 “.”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이렇게 예쁜 팔찌를, 나에게?

 “이걸 나에게, 하아, ?”

 숨을 거의 헐떡이다시피 하며 말했다.

 “예전에 너 볼 때부터 , 이거 어울리겠다.’라고 생각 많이 해서. 어때?”

 그 팔찌는 나에게 너무나 잘 어울렸다. 마치 커피에 우유 녹아들듯이 스며들어서는, 팔찌 자신도 나도 돋보이는 win-win 조합을 이끌어냈다. 내 마음을 다시 한 번 지탱해준 사람이잖아. 정말 고마워서 뭐라도 해 주지 못하면 못 배기겠더라. 정말 황홀해하는 나 사이로 슬비의 말이 미끄러졌다.

 “너무 예뻐! 맘에 딱 들어!”

 “이야, 너한테 그런 소리를 듣다니. 영광이여.”

 슬비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갑자기 슬비가 위대해보였다. 슬비가 달라보였다. 그 조그마하고 귀여웠던 애가 그렇게 멋있게 보일 줄은 몰랐다. 머리에 앙증맞게 매달려 있던 리본에선 어떤 자신감까지 느껴지는 거였다. 저런 자신감은 어디서 얻을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슬비가 한순간에 부럽게 느껴졌다. 팔찌를 계산하던 슬비의 모습이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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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비는 어떤 존재와 존재를 잘 조합하는 능력이 있어요.

(나도 좀 어울리는 팔찌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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