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14. 전치현상(2)

 

 

 

 

 푸른 색 외피를 벗고 주황색의 비늘로 치장한 하늘이 섹시하게 보였다. 그 섹시한 자태에 새들과 구름은 벗어날 생각도 접은 채 그 색에 물들어 허우적대길 즐겼다. 나도 그 하늘에 가서 주황색으로 물들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럼 온갖 생각 없이 평화롭게 게으름을 탐미할 수 있을 텐데.

 참으로 오랜만에 부드러운 블라우스의 촉감을 느꼈다. 그걸 입으니 내가 어색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평소 밖에 나가서 뭘 해본 적이 거의 없어서, 항상 보라색 잠옷 바지에 후드 티만 입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아마 슬비가 아니었으면 이런 옷 그냥 옷장에 계속 처박아 있었을 거다.

 

 기숙동 맨 왼쪽 입구에서 기다린 지 10, 기숙동 맨 오른쪽 입구에서 슬비가 나왔다. 슬비의 곱슬머리엔 빨간 리본이 아니라 노란 리본이 걸려있었다. 앙증맞았다.

 “많이 기다렸냐?”

 “아니.”

 “그럼 가자!”

 슬비는 내 등을 가볍게 쳤다. 우린 기숙동과 학교를 지나서 시내로 나갔다.

 아울렛이 있는 시내의 거리는 북적거렸다. 헤드폰을 쓴 채로 어딘가에 달려가는 사람. 이리저리 둘러보며 풍경을 즐기는 사람. 매의 눈으로 남의 옷을 자기의 생각으로 훔치는 파파라치들,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토끼들. 그 모든 것들이 한데 뒤섞여 하늘에 떠있는 무지개처럼 시내에 녹아 있었다. 우리도 그 무지개에 있었다.

 “, 오늘 옷차림에 좀 신경 썼는데?”

 “그야, 당연히, 너랑 가니까 어쩔 수 없잖아. 이렇게라도 입어야지.”

 “, ?”

 “그래, . , 패션에 관해서라면 엄청나게 깐깐할 것 같으니까. 니가 좋아하는 분야잖아.

 “, 그거 신경 쓰고 있었어?”

 “친구인데 당연히 그래줘야 될 것 같드라.”

 “, 너 좀 멋있게 보인다?”

 

 나는 생긋 웃어보였다.

 

 “그건 그렇고, 너 일본어 말하기 대회 나갈 거야?”

 “, 올해에도 나가려고.”

 “그래? 저번에도 봤어. 너 상 받는 거. 그 때 장려상 받았었잖아! 너 대단하드라!”

 

 “하지만 그때 많이 발음도 틀리고 말도 느리게 했는걸.”

 “하지만 다른 애들에게 들어보니까 너, 발표 내용도 좋았고 발표 제한시간도 딱 맞췄다며? 그것만으로도 대단해! 난 하라고 해도 잘 못하는데.”

 “아하하!! 그렇게 생각해줘서 정말 고마워!”

 나는 환하게 웃으면서도 생각했다. 에이, 오빠 녀석이 나보다 한 수, 아니 열 수 위일걸? 넌 그 사람의 스피치를 못 봐서 그려. 난 그 사람을 따라갈 수조차 없어. 쓰레기야, 쓰레기.

 

 떠들다보니 벌써 아울렛 근처까지 왔다. 아울렛은 하늘의 높이도 모르는 지 대나무처럼 쭉쭉 뻗어 있었는데 그 아울렛으로 이어지는 길은 마치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활주로 같았다.모든 길은 캐리 아울렛으로 통한다!그 옆에 심어져 있는 조그마한 나무들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줄지어 서 곧 착륙할 손님들에게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유리문을 열자마자 눈 속으로 환한 빛이 파고 들어왔다. 곧이어 내 눈길을 끈 것은 이 아울렛에 입점해 있는 브랜드의 로고들이었다. 그 것들은 차례로 줄지어 서서 각자 제 색을 뿜어내고 있었다.

 “여기는 남성복 매장들만 모아놓은 데니까, 이층으로 올라가자.”

 슬비와 나는 그 곳을 두고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이층은 일층보다 더 넓었다. 가게들마다 총 천연색투성이라 눈이 아팠다. 벽이란 벽에는 청바지와 스커트, 웃옷들의 베스트셀러 격인 제품들을 걸어놓았고 마네킹들은 우리들에게 자기가 입은 옷들을 자랑하고 싶다는 듯이 당당한 표정으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고프면 삼층에 식당하고 디저트 카페가 있으니까 밥은 쇼핑한 다음에 나중에 먹자.”

 “, .”

 슬비가 나에게 말했다. 내가 곧이어 대꾸를 해 주려고 옆을 돌아봤지만 슬비는 없었다. 슬비는 벌써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했는지 그쪽에 순간 이동해 있었다. 그리고 나의 귓전에 돌아오는 것은 빨리 와!’라는 외침뿐이었다. 그 말은 마치 만화에서 나올 법한 너무 급하게 달린 나머지 다리에게 끌려가 버린 상반신 같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