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10. 이슬비(5)
감자 칩 봉지가 경쾌하게 뜯어졌다. 슬비는 조금은 어색한 웃음으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둘이서 이렇게 조용하게 이야기 하는 건 처음이네.”라 말했다. 나도 살짝 웃었다. 그 웃음은 실로 반사적인 거였다. 그 웃음 속에 숨은 나는 초긴장 상태였으니까. 이런 맘을 안 건지 보이더가 살며시 말을 걸어왔다.
ㅡ 떨지 말고. 여태껏 이때를 기다려왔잖아?
그래. 보이더 말이 맞아! 네가 이렇게 있으면 안 되지. 게임은 이미 시작 되었잖아? 정신 차리고 카드를 내어야지. 칠판에 파란 글씨가 떠올랐다. 그래. 지금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돼. 나는 재빨리 ‘일상 이야기’ 카드를 내었다.
“요, 요즘 말야. 시험공부는 어떻게 돼가고 있냐?”
“될 리가 있다고 생각하니?”
슬비가 쿡쿡 웃으며 나에게 대답했다.
“그러는 너는? 잘 돼가냐?
“글쎄올시다. ㅋㅋ 너랑 똑같지 뭐. 망했어! 망했다고!”
조금 과장되게 말했더니 상대방은 웃기다면서 자기 무릎을 쳤다. 히유, 그제서야 눈이 확 트이고 의식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럼, 우리 조금은 희망찬 이야기를 해보자.”
“뭐.”
“시험 끝나면 뭐할 건데?”
슬비는 하늘을 바라보며 이상야릇하게 웃고 있었다. 아마 그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아아아, 그 날이 정녕 오면! 쇼핑을 원 없이 해보고 싶구만.”
“아, 나도 쇼핑 진짜 하고 싶다아. 정말.”
맞장구를 쳤다.
“근데 쇼핑을 하려면 돈을 많이 모아둬야 하겠는데?”
“그래서 지금 돈 모으는 중이야. 그 때 되면 왕창 사려고.”
“얼마?”
“뭐.... 5만원. 그 정도면 왕창 사겠지..?”
헉! 정말 많이도 모아놨네.
“너 옷 사는 거 정말 좋아하는 것 같네?”
“나중에 사고 나서 쇼핑백들 볼 때 ‘아, 내가 제대로 쇼핑했구나.’느낄 것 같아서 말야! 그러면 막 기분 좋아지잖아. 정말 내가 잘 산 것 같고.”
슬비의 말을 들으면서 내 방의 창문을 봤다. 밖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녁이 눈을 뜨는 시간이었다.
“선우는 뭐, 자주 하는 취미라든가 있어? 나는 쇼핑이랑 숙녀복 브랜드 카탈로그 모으는 거 좋아하는데.”
조금 당황했다.
“나? .... 나는 별로 취미 같은 거 없는 데?”
“에이, 없어? 있으면 재밌을 걸?”
“아, 아무튼! 어찌되든 좋잖아. 나 지금은 별로 취미 같은 거 생각 안 해 봤어.”
“그래?”
슬비는 아쉬운 듯한 웃음을 지었다. 니가 아무리 그래 봐도 어쩔 수 없잖아. 아직은 나 아무것도 하기가 싫은 걸. 마음속으로 불만을 집어넣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제 슬비에게 ‘그걸’ 말해야 되겠지.
“슬비.”
“왜?”
박선우 너는 할 수 있어! 잘, 잘.. 할 수 있다고!
“저... 호혹시.. 그, 음, 있잖아. 니가 나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는데 그게 뭐야?”
슬비는 잠깐 경직 되어 있다가 나에게 실실 웃으며 말했다.
“이런, 까먹었다.”
“... 뭐??”
“너랑 재밌게 얘기를 하다 보니 그 고민이란 걸 잊어버렸네. 기다려봐, 다시 생각 좀 떠올리고.”
난 감자 칩을 먹으며 기다렸다. (좋아. 게임의 흐름을 가져왔어. 조금만 더 힘내자!) 잠시 후에 슬비가 말문을 열었다. 슬비의 얼굴은 하늘에 드리운 먹구름 같았다. 아마 쓰라린 기억을 다시 들춰내니까 그런 거겠지.
“사소한 것이라도 들어줘야해? 알겠지..?”
“응응!!”
나는 맹세했다. 그리고 슬비는 얘기를 시작했다.
“있잖아, 나한테는 언니가 한명 있거든?”
“언니?”
“엉. 나보다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이쁘고, 운동도 잘해.”
“우와, 엄친딸이네.”
“그래. 엄친딸!!”
슬비는 쿡! 한번 웃고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또 집안 어른들에게는 완전 싹싹하게 굴어. 규칙도 잘 지키고, 어른들이 이거해라, 저거해라하면 자기 뭐 하고 있는데도 도와주고. 정말 짜증이나. 이런 언니!”
여기, 내 오빠 같은 사람이 하나 더 있구나.
“(씨익)정말 짜증나지. 나도 내 반에 있는 우등생들이 상 받거나 칭찬받으면 정말 짜증 지대루야.”
“정말!!! 너무 짜증나!! 사람들이 우리 언니에게만 칭찬하는 것 같다니까. 아는 사람들이 나를 볼 때도 ‘아~ 그 저번에 상 받은 은비 동생? 반갑다. 야~’라고만 하고. 우리 엄마나 아빠도 언니만 이뻐하고! 짜증나! 나에겐 ‘이슬비’라는 버젓한 이름이 있는데!”
아.
“정말! 너무 짜증나!! 사람들이 우리 오빠만 칭찬하는 것 같다니까. 아는 사람들이 나를 볼 때도 ‘아~ 건우 동생?’라고만 하고. 짜증나! 나에겐 ‘박선우’라는 버젓한 이름이 있는데!”
어디선가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아,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나 지금 짜증나라는 말을 백번도 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도대체 나는 어디에 있는 거야! 다들. 은비, 은비, 은비! 어렸을 때부터!”
슬비는 정말 화가 나는지 손을 무릎에 쳐가며 말했다. 표정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난 그런 슬비 폭주상태를 보며 입만 벌리고 있었다.
“근데 있잖아. 그 은비가 있잖아?”
“언니가 뭐?”
슬비는 팔짱을 끼고 말했다.
“이번엔 또 국제 대회 상을 받아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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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